대화 끊긴 '무언가족', 벼랑 끝에서 말문을 열다

최경

발행일 2016.08.12. 14:39

수정일 2016.08.19. 16:16

조회 1,417

노을ⓒ김용대(2014빛공해사진UCC공모전수상작)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35) ‘무언가족’, 그 어려운 해법 찾기 1

어느 날, 꽤 오래 호흡을 맞춰왔던 PD가 기획안 하나를 내밀었다. 제목은 <무언가족>. 대화가 끊긴 가족들을 밀착해 그 원인과 해법을 모색해보는 다큐멘터리 2부작에 관한 것이었다. 기획안에 적힌 구체적인 제작 내용은 다분히 극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 실현 불가능해 보였지만 제목의 상징성 때문에 뭔가 핵가족시대, 공동체 해체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처한 문제를 함께 공감하며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는 시작됐고 구체적인 사례가족의 제보를 받고 취재를 하면서 전문가의 조언과 분석, 해결방법을 찾아나갔다.

물론 초기 기획안에 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토리가 구성됐지만, 제목 하나는 제대로 살아남아 첫 방송이 나간 후 뜨거운 반응이 이어져 이후 2편, 3편까지 제작됐다. 여러 사례 가족들을 취재하면서 내가 끊임없이 생각한 것은 대한민국의 가족들 상당수가 ‘20세기에 태어나 19세기 방식으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 남편이 그러했다.

아내 A씨는 최근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아내의 일상은 무척 고달팠다. 깔끔한 성격 탓에 집안은 먼지하나 없이 깔끔하고, 늘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마치 집안에서 일을 해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것처럼. 반면 남편 B씨는 집안에서 항상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빈둥거렸다. 남편이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몇 년 전부터 일을 거의 하지 않아 수입이 변변치 않고, 집안의 생계는 모두 아내의 몫이 됐지만, 경제권을 쥐고 있는 남편은 늘 당당하고 아내를 무시해왔고 했다.

“지문이 없어요. 하도 일을 많이 해서 손가락이 다 갈라지고 닳았어요.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뭔가 자꾸 일을 만들어서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사는 보람을 못 느껴요. 남편이 나를 너무 무시하고 그러는 게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죠. 자기가 그걸 다듬어주고, 애들한테. 그렇게 인도를 해 줘야 되는데 그걸 안 하고 그걸 똑같이 보여주니까. 아 그러면 나는 여기서 같이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죠.”

아내는 지독한 주부습진을 365일 달고 살만큼 새벽엔 식당에 나가 일하고, 저녁엔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해왔다. 그렇게 한 것이 모두 가족을 위해서였지만 정작 가족 사이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서럽고 억울하다고 했다. 사실 A씨는 15년 전, 남매를 둔 남편 B씨와 재혼했다. 당시 사춘기였던 딸과는 오래 떨어져 살았지만 막 걷기 시작했던 어린 아들은 내 자식처럼 키웠다. 재혼이라서 남편이 던지는 비수 같은 말에도 꾹꾹 참으며 살았는데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남편이 툭하면 그래요. 너 지금 머리에 총알 박혔냐? 너 사이코냐? 좋게 설명하면 되는데 네 머리 닭대가리냐? 이런 식으로 얘길 하니까 내가 이 집안에 가족이 아니라 식모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하지만 남편은 원래 자신의 성격이 그런 걸 다 알면서 재혼해놓고 이제와 반란을 일으키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말 사이코라서 그랬겠어요? 그냥 표현을 하다보니까 농담 삼아 한 말인데 그걸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요. 집사람이 나 만나서 고생하고 희생만 한 것도 다 아는데 이제 와서 헤어지자 그러는 건 말도 안돼요. 집 사람이 안 벌어오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어쨌든 서로가 좋아서 이렇게 만났으니까 모든 걸 다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남편은 아내의 오랜 고통의 시간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내의 희생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심지어 운명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까지 했다. 어떻게 이런 남편이 있을까 싶지만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게감을 찾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의 출발은 가족이다. 서로 소중함을 알고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노력 없이는 결코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가족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이해와 희생을 강요한다면, 결국 불화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입을 닫고 서로의 마음을 외면하는 사이, 누군가는 존재감 없는 유령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이 집엔 딸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사춘기 때 아버지의 재혼으로 적잖이 방황을 했었던 딸, 그래서 아내 A씨는 딸에게 더욱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하지만 20대 중반이 된 딸은 어느새 새어머니를 이해할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졌고, 집안의 문제가 무엇 때문인지 자신이 중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해 심리 전문가를 찾아간 아내와 남편 그리고 딸. 그곳에서 전문가는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다.

“남편은 아직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거 모르고 결혼했어?’, ‘헤어지면 나는 무슨 돈으로 살라고 이혼은 절대 안 돼’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은 하나도 변할 생각을 안 하면서 희생만 강요하는 건 가족에게 해서는 안 되는 잔인한 짓입니다. 그리고 딸도 이제 성인이 됐으니 어머니를 새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불러야 합니다. 이미 15년이나 가족으로 살았는데 어머니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었나요? 지금 아내 A씨는 정말 헤어지고 싶어서 이혼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나도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절규하는 거예요. 그 마음을 알아주시면 해결의 열쇠가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이혼 외에는 답이 없을 것 같았던 이 가족은 전문가와의 상담 뒤, 기적처럼 달라지기 시작했다. 딸이 새엄마를 어머니라 부르고 인정하고 둘만의 시간을 자주 보냈고, 아내 A씨는 눈에 띄게 밝아졌다. 딸의 끊임없는 잔소리로 남편 B씨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마음을 읽어주는 누군가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가족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였다.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한 집에서 함께 산다고, 피를 나눴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한 가족이 되는 건 아니다. 서로 무엇을 원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 언제든 가족 사이에 벽이 생기고 틈이 갈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원치 않았던 침묵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역할은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은 당연해 보여도 깨닫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족은 빈껍데기만 남을 뿐이다.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무언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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