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현장, 그때 그곳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3) 1979년 10월 26일, 그날의 현장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등교를 준비하고 있던 필자는 충격적인 소식을 라디오 뉴스에서 접했다. ‘박정희(朴正熙:1917~1979)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아나운서의 떨리는 목소리가 계속 반복됐다. 급하게 국어사전에서 ‘유고’라는 뜻을 찾아봤다.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있음’이라는 뜻에서 일단 안심했다. 설마 대통령이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등굣길에 나섰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대통령 유고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고, 결국 그날 저녁 대통령 사망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궁정동의 유래와 안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요 일정은 충청남도 삽교천 방조제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기념식 행사 참석이었다. 방조제 건설로 삽교천 하구 일대에 저수량 8,400만 톤의 삽교호(揷橋湖)가 조성됐으며, 당진·아산·예산·홍성 등 충남의 4개 지역 농업용수가 해결됐다. 방조제 완공을 기념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는 장면은 그날 저녁 텔레비전 방송에 송출됐고, 필자 역시 이 장면을 봤던 기억이 난다.
이날 저녁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奎:1924~1980)가 주관하는 궁정동(宮井洞) 안가(安家)의 만찬이 준비돼 있었다. 궁정동의 동명은 1914년 4월 동명 개정 때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했던 북부 순화방(順化坊)의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의 일부를 병합해 육상궁동에서 ‘궁(宮)’자와 온정동, 박정동에서 ‘정(井)’자를 각각 합성한 데서 유래됐다. 육상궁(毓祥宮)은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조성한 사당으로 처음 육상묘로 했다가 육상궁으로 명칭을 고쳤다. 고종 때에는 숙빈 최씨처럼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도록 했고, 일곱 명의 사당을 모신 곳이라는 의미로 ‘칠궁’이라 했다. 현재 칠궁은 청와대 영빈관 건물과 담을 경계로 위치해 있는데, 오랜 기간 청와대 경호를 이유로 비공개 지역으로 있었지만, 최근에는 자유롭게 칠궁을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궁정동 일대에는 중앙정보부장 집무실을 포함해 안가 5채가 있었다. 부장 집무실 동쪽 옆에 ‘구관’, 골목 건너 북쪽으로 ‘신관’이 있었다. 신관 남쪽의 2층 양옥집이 ‘나동’, 나동 남쪽에 한옥으로 새로 지은 ‘다동’이 있었다. 궁정동 이외에도, 청운동에 3채, 삼청동에 3채, 구기동과 한남동에도 안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거나 일부는 기관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는 궁정동 내 안가들을 모두 철거하고 무궁화동산으로 만들었다. 무궁화동산의 표석에는 “안가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무궁화동산 표석에는 조선후기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金尙憲)의 집터가 이곳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의 집은 인근에 있는 청운초등학교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18세기에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청풍계(淸風溪)’로 당시 대저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에도 청풍계의 바위에 새겨진 ‘대명일월 (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의 여덟 글자 중 ‘백세청풍’의 글씨가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김상용, 김상헌의 배출은 안동 김씨가 조선후기 명문가로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안동 김씨가 세거한 청운동 일대는 장의동(壯義洞)이라 했는데, 이에서 유래한 ‘장동(壯洞)’의 명칭을 따서, 장동 김씨라고 칭한다.10월 26일 운명의 그날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 ‘나동’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참석하는 만찬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재규의 권총이 불을 뿜으면서 박정희는 최후를 맞이했다. 차지철도 그 자리에서 김재규에게 사살됐다.
김재규의 명을 받은 중앙정보부 수행원들이 청와대 경호원들을 사살하면서 궁정동 안가는 피로 물들었다. 박정희는 인근의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김병수 병원장에 의해 바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
국군서울지구병원은 1971년 9월 20일 국군수도병원이 등촌동으로 이전하고 남은 자리에 국군수도통합병원의 분원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격동, 1979년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1978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승격했고, 10월 26일 밤 박정희의 사망을 확인하고, 그 시신을 운구했던 곳이었다. 현재의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면서 삼청동으로 이전했다. 10월 27일 동아일보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헤드 기사로 뽑고, “전국에 비상계엄’, ‘대통령 권한 대행에 최규하 총리 취임’이라는 기사 옆면에(당시의 신문은 세로로 읽게 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26일 오후 7시 50분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서거(逝去)했다.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에 취임했으며, 최 권한대행은 27일 오전 4시를 기해 全國(濟州道 제외)에 비상계엄(非常戒嚴)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 대장을 임명했다. 고(故) 박(朴)대통령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11월 3일에 거행될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은 한자를 다수 병기했으므로 신문 기사 그대로 인용했다.)이어 “어제 저녁 7시 50분경 운명, 차지철(車智澈) 실장 등 5명도 숨져. 궁정동(宮井洞) 정보부식당(情報部食堂)서, 김부장(金部長), 차지철 실장 말 다투다 쏜 총(銃)에”라고 기사를 뽑았다. 궁정동 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말다툼으로 총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김재규의 동선과 체포까지 1979년 10월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진압을 둘러싸고 김재규는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차지철과 큰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리고 유신 독재를 끝내기 위해 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궁정동에서의 만찬이 결정된 날, 김재규는 정승화 참모총장을 궁정동 중정사무실로 저녁 식사를 이유로 미리 초청했다.
대통령 시해 후 김재규는 황급하게 현장을 나와 정승화를 태우고 수행원에게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향하도록 했다. 이때 정승화가 뭔가 큰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군대를 빨리 지휘할 수 있는 육본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고 결국 김재규와 정승화는 육본으로 향했다.
육본으로 간 길은 결국 헌병대에 의한 김재규 체포로 이어졌고, 김재규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수감이 된 후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서빙고 분실이 있던 서빙고동은 조선시대 한강의 얼음을 떠서 보관하는 창고인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유래한 동네명이다. 만약 김재규가 중앙정보부로 향했다면, 10·26 이후 그날의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남산에 있었던 중앙정보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 떠돌 만큼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다. 많은 민주 인사들이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탄압을 받았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었던 남산의 중앙정보부 건물이 있던 곳에는 조선시대 녹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일제강점시기 이곳에 통감 관저가 들어섰고, 1910년 이후에는 총독 관저로 이어졌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가 창설되면서, 옛 통감 관저 자리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남산 중앙정보부 시대가 시작됐다.
1981년 4월 8일 중앙정보부를 개편해 국가안전기획부가 설립됐으며, 1999년 1월 21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됐다. 1996년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으로 건물을 이전하면서 옛 중앙정보부 건물은 완전한 변신을 했다. 중앙정보부 본관에는 서울유스호스텔, 사무동에는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중앙정보부장 공관에는 문학의 집 서울, 5별관에는 중부공원여가센터가 들어서 있다. 통감 관저 건물을 이어받으며, 국내 정치 사찰을 담당했던 6국 건물은 남산예장공원이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중앙정보부의 건물들. 이들 건물 자리에는 공공기관이나 유스호스텔, 공원 등이 단계적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제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완전히 탈바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