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고기념관에서 3.1운동 100주년 모임이 진행되었다. ⓒ김경민

3.1운동 100주년, 310인 시민위원 모이다

이화여고기념관에서 3.1운동 100주년 모임이 진행되었다. 지난 5월 20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정동에 위치한 이화여고기념관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시민위원 모임이 진행되었다. 이화여고는 역사적 장소인 이화학당 전신으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많은 여성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서울시는 지난 3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서울 소재 시민과 중학생 이상 학교 재학생, 직장인 등을 대상으로 총 310인의 시민위원을 모집하였다. 선발된 시민들은 올해 4월부터 12월까지 각종 기념사업에 직접 참여한다. 이들은 의견 제시 및 사업 모니터링을 비롯해 신규 기념사업 아이디어 제안과 SNS를 활용한 기념사업의 홍보활동을 하게 된다. 최초의 독립운동 태극기의 모습 이번 모임은 서해성 감독(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예술감독) 사회로 오프닝 공연과 ‘대한민국 100년의 탄생’을 주제로 미니 다큐가 상영되었다. 3.1운동 100주년의 역사적 가치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서울시의 독립운동 기념시설 조성, 시민참여 행사 및 교육, 독립유공자 예우 강화 등 3개 분야 총 17개 추진 사업이 소개되었다. 이와 함께 310명 시민위원들의 세부 활동 계획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졌다. 이날 소개된 3.1운동 당시 사용되었던 태극기는 시민위원 배지로 제작된다고 한다. 이날 참석한 시민위원들은 예비위원 자격으로 향후 진행될 3.1운동 관련 강연과 답사, 백범일지 낭독 모임과 토론캠프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식견을 쌓은 뒤 정식으로 위촉되어 시민위원 기록 및 기획 활동과 사업제안을 하게 된다. 한편 이번 모임에 앞서 서울시가 기념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위촉한 33인 기념사업운영위원회 위원 강연과 소개도 있었다. 먼저 공동 위원장인 이종찬 위원장은 “3.1운동은 당시 1,000만 조선인 중 2백만 명 이상 양반에서 기생까지 종교와 신분, 지역과 성별에 구분 없이 참여하여...
서울시청 1층, 세계에 3·1운동을 알린 프랭크 스코필드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신새봄

시청에서 만난 푸른 눈의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

서울시청 1층, 세계에 3·1운동을 알린 프랭크 스코필드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위 군중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잡아야 했다. 나는 어느 일본인 가게 2층에 올라가 신을 벗을 사이도 없이 베란다로 나가 급히 셔터를 눌렀다.” “그 날 오후 2시 10분 파고다공원에 모였던 수백 명의 학생이 10여 년간 억눌려 온 감정을 터뜨려 ‘만세, 독립만세’를 외치자, 뇌성벽력 같은 소리에 공원 근처에 살던 시민들도 매우 놀랐다. 공원 문으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종로거리를 달리며 몸에 숨겼던 선언서를 뿌리며 거리를 누볐다.” 서울시청 신청사 1층에 마련된 전시회에서 글귀들을 읽으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1919년 3월 1일 거사일에 사진기를 들고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의 시위 장면을 촬영했으며, 언론을 통해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국내외에 광범위하게 알린 그는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다. 98년이 지난 오늘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인다. 3.1운동 때와 비슷하게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외롭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 마음 한 뜻으로 광화문을 지킨다는 마음이 든다. 98년 전 스코필드 박사의 눈으로 바라본 3.1운동도 외국인의 눈이었지만 똑같이 뜨거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남녀노소 모인 국민들은 태극기 하나만을 손에 든 채, 일제의 총알에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스코필드는 제암리 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언론을 통해 세계에 폭로했다. “그들이 무엇을 했기에 이처럼 잔인한 심판이 그들에게 닥친 것일까? 그들이 왜 갑자기 과부와 고아가 되어야 하는가?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제암리 학살 현장을 본 스코필드 박사의 말이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제암리를 비롯한 화성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곧장 제...
진관사 입구의 모습ⓒ김경민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진관사 입구의 모습 1919년 3.1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중에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많은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을 넘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은평구에 위치한 고려시대 천년 고찰인 진관사를 중심으로 전국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초월 스님은 만해 한용운에 비견되는 대표적인 항일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정진하다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일제의 모진 고문에 의해 청주교도소에서 옥사했다. 지난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제 보수 중 백초월 스님의 1919년 당시 항일운동을 대변해주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귀중한 독립운동 사료들이 발견됐다. 독립신문 , 신대한신문, 자유신종보 등 희귀자료를 비롯한 독립운동 사료들이 태극기에 싸여있는 상태로 불단 안쪽 기둥 사이에 90년 동안 숨겨져 있었다. 뒤늦게나마 백초월 스님이 국내는 물론 상해임시정부 등 해외에 걸쳐 화롱한 독립운동의 증명으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 사료가 발견된 진관사 칠성각 2010년 정부에서는 6총 20점에 이르는 사료들을 등록문화제 458호로 일괄 지정했고, 같은 해 서울역사박물관은 사료를 소개하는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을 개최했다. 우리가 진관사 태극기로 알고 있는 등록문화제 458호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독립단체에서 사용한 태극기로 추정되며, 왼쪽 귀퉁이가 불에 타 약간 손상돼 있고 현재의 태극기와 달리 리와 감의 위치가 바뀐 형태이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 불교인들과 연결돼 자금모음, 시위 등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백초월 스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진관사의 태극기는 일장기의 붉은 원을 도려낸 뒤 흰 광목천에 덧붙여 박음질을 하고 다시 푸른 염료로 물들인 태극이라는 점에서 항일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진관사 태극기의 모습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버스를 타고 진관사 입구에서 ...
1912년 지어진 고풍스런 분위기의 승동교회ⓒ김종성

3.1운동의 흔적을 찾아…승동교회를 아시나요?

1912년 지어진 고풍스런 분위기의 승동교회 종로 탑골공원을 지나 인사동 거리로 접어드는 초입에 100년이 넘은 오래된 예배당 승동교회가 있다.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인사동에서 이정표를 따라 교회 입구 골목으로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주위가 고요해진다. 교회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담벼락 게시판을 지나, 붉은 벽돌의 고풍스럽고 아담한 교회가 보인다. 인사동 거리 초입, 승동교회 가는 골목 1912년 지어진 승동교회는 일제의 창지개명 당시 개명된 ‘인사동’이 생기기 전부터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이 교회의 오랜 역사는 ‘승동’이라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다. 승동교회가 생겨난 자리는 종로 한복판 ‘절골’(寺洞, 지금의 인사동 137번지)이라는 동네였다. 절골 또는 사동(寺洞)이란 동네 이름은 고찰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승려가 많다 해서 ‘승동’(僧洞)이라고도 했다. 이후 교회의 이름은 현재의 ‘勝(이길 승)洞’으로 바뀌었다. 이채로운 종탑과 아치형 창문이 정겨운 승동교회 풍경 로마네스크풍이라고 하는 반원형 아치 모양의 큰 창문이 붙어있는 붉은 벽돌이 눈에 띈다. 교회 마당엔 보기 드문 종탑과 함께 앉아 가기 좋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마련돼 있어, 종탑을 바라보며 종소리를 상상하며 쉬어가기 좋았다. 교회 입구에 관리실이 있지만 누구나 오갈 수 있도록 정문은 물론 후문도 열려 있다. 교회의 몸체를 두른 붉은 벽돌은 군데군데 색깔이 다르다. 한양도성 성곽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개보수를 한 흔적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인 승동교회는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1993년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교회 마당 한 편에는 3·1 독립운동 기념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19년 2월, 교회 1층 밀실에서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을 중심으로 경성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20여 명이 모여 3·1독립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모의했다. 2월 28일 밤엔 1,500장의 독립선언문을 경성 각처로 배포했다. 교회의 위치가 기미...
독립문ⓒ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올해는 특별하게! 3·1절 앞두고 꼭 가봐야 할 곳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죠. 올해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대한민국의 독립 의사를 전 세계에 알린 1919년 3·1 독립운동 제98주년입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내 손안에 서울에서 삼일절에 가볼 만한 곳들을 모아봤습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아로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 파란색 글자를 클릭하시면 관련 정보를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  기억의 터 남산 옛 통감관저터에 열린 `기억의 터` 제막식 중 `세상의 배꼽`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 기억의 터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인권이슈로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내에 그 아픔을 기리고 기억하는 공간조차 없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 8월 조성됐다. ‘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두 작품이 기존의 통감관저터 표지석, 거꾸로 세운 동상과 함께 설치돼 있다.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해외 추가신고자 포함)의 성함과 함께 할머니들의 증언을 시기별(끌려가던 순간-위안소에서의 처절한 삶-해방 후 귀국, 귀향하던 때-반세기의 침묵을 깬 그 이후 인권활동가로서의 새로운 삶)로 새겼다. 또한 故김순덕할머니의 작품 ‘끌려감’이 함께 새겨져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세상의 배꼽’에는 윤석남 화가의 작품과 함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글귀가 한글·일본어·영어·중국어로 함께 새겨졌다. 세상의 배꼽 주변으로 놓이는 자연석들은 전국, 전 세계에서 마음을 모아온 할머니들과 국민들을 뜻한다. 기억의 터에 마련된 `대지의 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역사가 담겼다.(좌) 둥근 언덕으로 둘러싸인 `세상의 배꼽`은 평화를 상징한다....
시민들이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뤘던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고 있다.

국내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문연다

시민들이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고 있다.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문이 발표됐습니다. 이는 국내의 민족지도자·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됐는데요. 8일 서울시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 없이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3.1운동 100주년 맞이 서울시 기념사업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현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국내 최초·유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하고, 일대 명소를 연결하여 ‘독립운동 유적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는 내용인데요. 지금부터 소개해드립니다. ※ 파란색 글자를 클릭하시면 관련 정보를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현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국내 최초·유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이 세워진다.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인 오는 2019년 개관이 목표다. 서울시는 기념관을 중심으로 그 즈음 복원을 마치는 딜쿠샤를 비롯해 독립문, 구 서대문형무소 등 일대 명소를 연결하는 '독립운동 유적 클러스터'를 조성한다. 지하철 안국역은 프랑스 파리의 '기 모케(Guy Moquet)' 테마역처럼 독립운동 테마역사로 조성한다. 종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지는 삼일대로는 3.1운동 대표가로로, 남산 예장자락은 일제의 남산 침탈 흔적을 알 수 있는 역사탐방로인 ‘남산국치(南山國恥)의 길’을 각각 조성한다. (☞ `남산 예장자락` 도시재생 본격 착공) 독립운동을 한 자손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한다. 서울시립대 등록금 전액 면제 대상도 5대손까지(기존 2대손) 확대하고 후손이 없어 방치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묘지를 발굴하여 지원한다. 아울러,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현재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 매년 74억 원을 추가 투입해 생활보조수당을 신설하고 보훈단체에 대한 지원도 대폭 ...
지난 2013년에 공개된 경교장 접견실 ⓒ뉴시스

삼일절 샌드위치 연휴, 어디 갈지 고민된다면?

지난 2013년에 공개된 경교장 접견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의지와 열망이 온 세계로 터져 나왔던 그 날. 뜻 깊은 삼일절을 보내고 싶다면, 뜨거웠던 독립투쟁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보시길 바랍니다. ※ 파란색 글자를 클릭하시면 관련 정보를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3) 3.1절 가볼만 한 곳 ② 백범 김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경교장’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白凡) 김구 ‘나의 소원’ 서울시 종로구 강북삼성병원에 위치한 경교장은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이며, 김구 선생의 저격사건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합니다. 1939년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인 경교장은 김구 선생의 숙소 겸 집무실로 사용됐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열기도 했습니다. 1층에서는 시청각 영상으로 백범 김구를 만날 수 있으며 응접실과 선전부 활동 공간 등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경교장 유리창에 남겨진 탄환 흔적(좌), 김구 선생이 저격당할 당시 입었던 옷(우) 2층에 유리창에 남겨진 탄환 흔적과 지하 전시실에 보관된 혈흔이 묻은 김구 선생의 옷은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을 유물과 영상물 등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어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09:00-18:00 ...
중앙고등학교 전경

그냥 지나쳤다면, 이번 삼일절에는 꼭!

중앙고등학교 전경 (1) 3.1절에 가볼만 한 곳 ①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해 전국에서 독립을 갈망하는 외침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대 규모의 비폭력 만세운동이 시작된 97년 전 서울. 그들의 처절하고도 간절했던 외침을 기억하기 위해 3.1 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았다. 3.1 운동을 처음으로 논의한 곳, 중앙고보 숙직실 “운이 좋은 날에 오신 거예요. 평소에는 개방을 잘 안하거든요” 안국역에서 북촌 방향으로 끝까지 올라가면 외양부터 예사롭지 않은 고등학교가 보인다.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중앙고등보통학교로 개교했다. 지나가던 문화해설가가 평일에는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했다. 중앙고등학교에 위치한 삼일기념관은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이었다. 1919년 1월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교사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를 방문해 유학생들의 독립 운동 계획을 알린 곳이다.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하며 3.1 운동을 처음으로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중앙고등학교(좌), 중앙보통고등학교 숙직실(현 삼일기념관)(우) 3.1 운동을 위해 종교들이 뭉친 곳, 유심사 중앙고등학교에서 안국역 방향으로 내려가면 왼편에 ‘유심사’가 있다. 한옥들 사이에 있어 휴대폰과 지도를 갖고서도 찾는데 애를 먹었다. 담벼락에 작은 기념 현판이 걸려 있어 구석구석 살펴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는 마을 주민도 이곳이 삼일운동과 관련된 장소인 줄 몰랐다고 한다. 1919년 2월 28일 늦은 밤, 만해 한용운이 그의 학생들을 이곳으로 급히 불러 모아 독립선언서 작성 배경과 3.1 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 배포를 부탁했다.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였던 ‘유심사’는 당시 불교계 독립 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3.1 만세운동을 위해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 교섭을 마무리한 최린이 한용운을 방문해 불교계의 참여를 허락...
유관순 열사의 유언과 사진

열여덟 소녀가 감옥에서 남긴 마지막 말

※ 3.1절 특집기사 연재 시리즈 ①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2015.2.25.) ② 3.1절, 한용운 말고 백초월 스님도 있습니다 (2015.2.26.) ③ 3월에는 '3.1절 역사나들이' 어떠세요? (2015.2.27.) (4) 3.1절, 우리가 다시 유관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광복의 기쁨을 맞기 위해 우리 민족은 수많은 고난에도 끊임없이 독립을 위한 운동을 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 만세 운동, 즉 3.1절은 대표적 사례입니다.광복 70주년인 올해 3월 1일은 제96주년 3.1절이기도 합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일제의 총부리 앞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그 날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한자리에 모여 함께 만세를 외칠 수 있었을까요? 이메일도 문자도 보낼 수 없었고, 심지어 전화조차도 귀한 상황에서 3.1운동은 날짜, 장소, 시간 그리고 구체적인 퍼포먼스까지 은밀히 공유되어 수개월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일제의 위협과 해산명령을 피하면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또 대규모로 벌어졌던 3.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플래시몹'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전국방방곡곡 울려 퍼지던 그 날의 함성 안에는 꽃다운 10대 소녀도 서 있었습니다. 3.1 운동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그 분, 유관순 열사입니다. 일제의 고문에 한 송이의 짓밟힌 꽃처럼 아스러져 간, 유관순 열사의 넋이 올해 3.1절을 맞아 시청을 찾아왔습니다. 서울시는 3.1절을 맞아 서울도서관 외벽에 유관순 열사의 사진과 유언을 담은 대형 통천을 설치합니다. 통천에 담긴 유관순 열사의 모습은 3.1운동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는데요, 당시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어 입을 다물 ...
1919년 3.1운동 당시 칠성각 벽 속에 숨긴 의문의 보자기 ⓒ진관사

3·1절, 한용운 말고 백초월 스님도 있습니다

※ 3.1절 특집기사 연재 시리즈  ①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2015.2.25.) (2) 조국을 사랑한 불교계의 대표적 항일 승려, 백초월 선생 1919년 3.1운동 당시 칠성각 벽 속에 숨긴 의문의 보자기 1919년 3·1 운동 당시 북한산의 고찰 '진관사(津寬寺)', 어둠 속에서 극도의 불안과 경계심으로 조심조심 움직이는 한 사람이 있다. 인적이 드문 칠성각(수명장수신 七星을 모신 곳) 안으로 들어가더니 불단(佛壇)을 끌어내리고 벽을 뜯는다. 그리고는 그 안에 '의문의 보자기' 하나를 넣고 다시 벽을 바른다. 감쪽같이 불단을 제자리에 맞춘 다음, 물러나서 큰 절을 올린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2009년, 칠성각 해체 보수 작업 중 90년만에 보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 90년이 흐른 2009년, 진관사에서는 칠성각 해체·보수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5월 26일 칠성각 벽 속에서 '보자기'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날 밤 위험을 무릅쓰고 숨긴 바로 그 '보자기'였다. 칠성각에서 발견된 '보자기' 안에는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신대한(新大韓) 3점, 자유신종보 6점, 경고문 2점 등 총 6종 20점이 둘둘 말린 채 태극기로 싸여있었다. '3·1운동의 숨결'을 간직한 채, 90년 동안이나 숨죽여 있어야 했던 '독립운동사료'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벽에서 발견된 이 자료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항일운동을 대변하는 국내 발간 지하신문과 중국 상하이에서 간행된 신문과 경고문 등이다. 특이할 점은 이 신문들이 모두 '태극기'와 관련된 대한 내용을 싣고 있었고, '태극기 보자기'로 싸서 감췄다는 점이 특별한 주목을 끈다. 보자기로 쓰였던 태극기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등록문화재(제 358호)로 지정되었다. 발견 직후, 태극기 모양의 보자기 속에 담겨있던 각종 독립운동 사료들 그렇다면 누가 칠성각에 보자기를 감추었을까? 경남 고성에서 출생하여 14세에 입산 출가한 백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