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5,179개의 꽃이 장식된 서울광장

서울광장을 수놓은 1만 5,179개의 별

1만 5,179개의 꽃이 장식된 서울광장 서울광장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었다. 3·1절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3월 2일부터 8일까지 서울광장은 독립광장으로 선포됐고, 서울광장에서는 ‘꽃을 기다립니다’ 추모전시가 열렸다. 1만 5,179개의 꽃이 겨울밤을 수놓으니 광장 전체가 향기로 가득했다.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독립을 향한 울음이고 슬픈 노래며 광복된 조국을 간절히 보고 싶은 꽃이었다. 이 전시는 대지의 별로 이 땅에 돋아난 1만 5,179명의 독립유공자를 역사의 은하수로 표현한 것이다. 불빛의 색은 태극기의 색 비율과 일치시켜 흰색, 파랑, 빨강으로 하였고, 등불을 세우고 있는 기둥은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서해성 총감독이 독립광장 선포의 경과를 해설하고 있다 서울시 3·1운동 100주년기념 310 시민위원들은 3월 5일 밤 서울광장 야간전시를 관람하였다. 스카이뷰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고, 기자 자신도 독립유공자의 자녀이기에 참여했다. 야간 서울도서관 옥상에서 보는 서울광장의 야경은 거대한 둥근 은빛 은하수 물결이었다. 시간마다 바뀌는 색의 향연, 조국 산야에서 북만주 광야에서 외쳤던 독립 함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들리는 듯했다. 야간투어를 하는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시민위원들 하나하나의 기둥은 지하로 선을 연결하여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마치 은하수가 광장을 수놓은 듯했다. 밤이면 태극기의 색인 파랑, 빨강, 흰색이 조화를 이루었고, 기둥은 저마다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출생연도, 사망연도가 기록된 함축된 인명부였다. 안타까운 점은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무명의 독립운동자들이 많았다는 것. 독립운동으로 3백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고 크고 작은 부상으로 정상활동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얼마 동안 기억하고 있을까? 광장 한가운데 설치된 이름 없는 군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은하수 별빛으로 변한 서울광장 독립광장으로 선포된 이곳은 고종황제가 즉위식을 한 환구단과 가깝고 마지막 황궁인 덕수궁과 도보로 연...
3월 1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앨버트 테일러의 집 딜쿠샤(Dilkusha) 임시개방됐다.

“붉은 벽돌집에 다녀오다” 딜쿠샤 가옥 임시개방

3월 1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앨버트 테일러의 집 딜쿠샤(Dilkusha)가 임시개방됐다. 3.1운동을 세계에 처음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집 ‘딜쿠샤(Dilkusha)’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임시개방됐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을 가진 딜쿠샤 가옥이 안 그래도 궁금했던 터라 딜쿠샤로 향하는 발걸음이 기대에 찼다. 딜쿠샤의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 경교장,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 동네 길을 걷다 보니 평범한 골목길 안에 커다란 붉은 벽돌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림막으로 가려놓고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 그 옆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까지 이 집이 딜쿠샤란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울시가 마련한 시민참여 장소에는 사전 신청자와 관계자 등 7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중에는 의미있는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려고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이 특히 많았다. 딜쿠샤와 앨버트 테일러, 메리 테일러에 대해 소개한 전시물 그곳에 가보니 이 집을 왜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광산업을 하며 조선의 독립을 돕던 테일러 부부가 한국에서 추방 당한 후 딜쿠샤는 오랜 세월 방치됐다. 그러는 사이에 17가구에 달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불법건축물을 짓고 살았다. 딜쿠샤는 심하게 망가지고 훼손됐다. 빌라와 주택들이 이어진 좁은 골목에 낡고 음산한 딜쿠샤가 주민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아 보였다. 딜쿠샤 시민참여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이 집은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을 찾아나선 후에야 딜쿠샤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2017년에는 등록문화재 제687호 ‘서울 앨버트 가옥’으로 등록됐다. 집 주변을 돌다가 돌에 새겨진 딜쿠샤라는 글씨를 보았다. 해설사와 현장 관계자에게 딜쿠샤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공사현황을 듣고 주변을 자유롭게 둘러보...
독립선언서 배부터인 ‘수운회관’ 앞에 설치된 시민마루의 모습. 나비모양의 명부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 몫이다

삼일대로에 나타난 검은 돌들의 정체는?

독립선언서 배부터인 ‘수운회관’ 앞에 설치된 시민마루의 모습. 나비모양의 명부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 몫이다지난 3월 1일, 100년 3·1운동의 함성을 되새겨보는 만세운동과 퍼포먼스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같은 날, 일상 속에서도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 명소가 탄생했다. 독립운동 테마역 안국역과 탑골공원 사이를 연결하는 삼일대로 주요 거점 5곳에 ‘100년 시민마루’가 오픈된 것이다.‘100년 시민마루’는 시민들의 기부 등 참여와 정성으로 조성된 돌 구조물로 누구나 쉽게 찾아와 쉴 수 있는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더 감동스러운 것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교포, 중국 위안부 피해자 등 해외에서도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서울시 310시민위원회) 단장, 우당 이회영·이은숙 부부의 후손인 이종찬(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위원장 등 기부에 참여한 국내외 인사 3,140명과 70여개 단체의 이름이 검은 벽돌에 아로 새겨졌다.‘100년 시민마루’의 특이한 점은 이름 대신 나비 모양의 문양으로 조각된 명부였다. 사유를 알아보니 이름을 알리기 부담스러운 235명의 사정을 배려해 그렇게 조각했다고 한다. 3·1운동 100년 시민마루 개막식에 참석한 시민들(좌), 시민마루 조성을 주최한 사단법인 사람숲의 양길승 이사장(우)‘100년 시민마루’는 약 650m 구간에 걸쳐 삼일대로 핵심거점 다섯 곳에 위치해있다. ▲독립선언문이 보관, 배포되었던 수운회관 앞, ▲3·1운동 전후 다양한 민족운동 집회 장소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민족계몽운동의 산실 서북학회 터, ▲고종이 출생하여 왕위에 오른 12세까지 성장한 잠저인 운현궁 앞, ▲그리고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던 탑골공원이다.3월 1일 오후 4시 개막식이 진행된 후 곧바로 ‘100년 시민마루 투어’가 이어졌다. 서해성 3·1절100주년기념사업 총감독의 안내로 행사 참가자 모두 3·1운동 거점들을 돌아보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
3·1만세운동 당시 숭실중학교 교정에 게양됐던 태극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3·1운동 기념 전시

3·1만세운동 당시 숭실중학교 교정에 게양됐던 태극기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문의 낭독과 3·1만세시위는 전국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촉발시켰다. 3·1운동 후 4월 상하이에서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열리고 있는데, 서울시 시민청에서 전시하고 있는 와 을 소개할까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3/31)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1888년부터 1945년까지 200여명의 캐나다인이 선교사, 학자, 의사, 기자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프랭크 스코필드, 로버트 그리어슨, 아치발드 바커, 스탠리 마틴, 프레드릭 맥켄지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도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훈을 받았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는 다섯 명의 캐나다인을 통해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로버트 그리어슨은 캐나다 의료선교사로 1898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함경북도 성진에 정착했다. 3·1운동 시 일제에 의해 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부상자를 일일이 치료했다. 맥켄지가 촬영한 의병사진, 사진9_드라마에서도 이를 재연했었다. 프레드릭 맥켄지는 종군기자로 1904년~1905년, 1906년~1907년 두 차례 우리나라를 찾았다. 1907년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을 취재하는 중, 일제의 학살과 방화를 목격한다. 양평에서는 의병을 직접 만나 의병의 사진을 기록으로 남긴다. ‘The Tragedy of Korea(1908), Korea’s Fight for Freedom(1920)’을 발간해 우...
지난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있었다.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덕수궁 광명문’

지난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건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일혈로 알려졌지만 순식간에 ‘독살설’이 매서운 꽃샘바람처럼 온 나라에 퍼졌다. 비록 일제에 의해 황실이 아니라 왕가로 격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하늘같은 존재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은 압제에 숨죽이고 있던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일었고, 승하 후 40여 일 만에 황제의 운구 행렬은 함녕전으로부터 광명문을 통해 남양주 홍릉으로 향했다. 제100주년을 맞은 3.1절 오후 덕수궁에서는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열렸다. 황제의 마지막 순간을 간직한 광명문은 고종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정문으로, 고종이 승하한 후 1938년 강제 이건되었다가 80년 만에 원래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광명문 복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민들 이전영 문화재청 복원정비과장의 경과보고로 시작된 기념식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훼손 변형한 광명문이 제자리를 찾는 오늘은 뜻깊은 날”이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자 자주주권을 지키려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고종황제의 이상이 서려 있는 이곳”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일제가 개칭해 쓴 ‘덕수궁’이 아니라 원래 이름인 ‘경운궁’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기념사를 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경운궁 현판. 경운궁 즉조당에 걸려 있던 덕수궁의 옛 이름 현판으로 고종의 어필이다. 1593년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삼았던 이 궁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한 것은 광해군이었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지며 근대화를 위한 열의를 다졌다. 대한제국 황제로서 황룡포를 입은 고종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3.1운동만세 재현 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시민들

100년 전 그 날처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3.1운동만세 재현 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시민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원 밖으로 나와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거리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참여자의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3.1운동만세 행렬에 참가했다 100년이 지난 2019년 3월 1일에도 많은 시민이 거리행진에 참여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서울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성북구에서 진행한 행사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했다. 거리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신청을 하고 안암동주민센터로 찾아갔다. 400명이 넘는 성북구민들이 여러 팀으로 나뉘어 모였다. 남자들은 흰색 저고리와 바지, 여자들은 흰색 저고리와 검정 치마로 갈아입고 행사에 대한 공지를 숙지하고 퍼포먼스에서 외쳐야 할 몇 가지 구호를 배웠다. 간단하게 마련된 도시락을 먹고 보문동주민센터 옆 작은 공원에 다른 팀들과 함께 모였다. 팀마다 조금씩 다른 구호를 외치며 행사를 위한 연습을 이어갔다. 보문동주민센터 옆 공원에 모인 성북구민들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되었다.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모두 슬퍼한다.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의 외침이 이어지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관악대의 연주가 앞장을 서고 가족 단위로, 친구들과 모여서, 동호회에서 함께 신청한 성북구민들이 3·1만세운동 재현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보문동주민센터에서 시작한 거리행진은 1.2km 정도 성북천을 따라 성북구청까지 이어졌다. 한 손에는 태극기를 흔들고 손을 번쩍번쩍 높이 쳐들기도 하며 “대한독립만세”를 ...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의 하나로 서울광장에서 `100년 대합창` 행사가 열렸다.

서울광장의 100년 대합창, ‘독립광장’을 만들다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의 하나로 서울광장에서 '100년 대합창' 행사가 열렸다. “3·1운동은 합창입니다. 서울광장은 그 날 만세소리가 가장 높게 멀리 울려 퍼진 광장입니다. 3·1운동을 노래합니다.” 지난 1일 ‘서울광장’에서는 ‘100년 대합창’으로 독립운동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마침내 ‘독립광장’이 선언되었다.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00년 만세행진’과 ‘100년 대합창’ 그리고 ‘대형 줄다리기’ 행사를 펼쳤다. 우당, 백범 등 독립유공자 후손 50여 명, 이화여고·중앙고 등 3·1운동 참여 학교 학생들, 시민위원 310 및 육사군악대가 참여하였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며 진행된 ‘100년 만세행진’은 오후 1시 30분에 대한문을 출발하여 세종대로~광화문사거리를 돌아 서울광장으로 입성하는 코스였다. 행진은 100년 전 그날의 기억을 새롭게 해주었다. '100년 대합창'에는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시민학생 3100명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올해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백미는 ‘100년 대합창’이었다. 100년 전 오늘, 만세운동이 시작된 시간인 오후 2시 30분에 맞추어 대합창이 시작되었다. 기자도 이날 시민위원 310의 자격으로 대합창에서 노래를 불렀다. ‘100년 대합창’은 특별히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담기에 중심을 두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상징하는 ‘시민위원 3,100명’과 국립합창단원들로 합창단을 구성했고, 주 무대에는 독립유공자 후손, 이화여고 학생, 각계를 대표하는 남녀노소 시민들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 날, 서울광장에 함께한 시민들, 연주자들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노래했다. 삼일절 노래를 시작으로 문을 연 이 날의 합창은 독립군가, 압록강행진곡, 광야에서, Heal the World, 젊은 그대, 아리랑과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버전 애국가 등 한 시간 동안 총 11곡이 서울광장에 울려 퍼졌다. 삼일절 서울광장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못 다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전시가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진행 중이다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둘러본 ‘기억 기록’ 전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못 다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전시가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진행 중이다 다 듣지 못한 말들이 있었다. 기억하고 기록될 이야기임에도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못했다. 그러한 위안부의 못 다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전시 이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모든 지역에 설치했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간 여성들의 이야기는 50년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알려졌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전시 `기억 기록`은 3월 20일까지 계속된다 전시는 여러 나라 4개의 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이 2016년부터 현재까지 발굴한 사료와 사진, 영상 등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을 담은 3장의 실물사진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 것이다. 세 장의 사진은 고 박영심 씨의 당시 만삭이었던 모습과 버마 미차나에서 여러 한국인 위안부가 찍힌 모습이다. 이 사진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 미군이 만든 사진앨범에서 나온 것으로 1944년에 찍혔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었다. 사진들은 보존상태가 좋아 선명하게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표정까지 읽을 수 있다. 사진은 너무나 가혹한 현실을 그들의 사진 속 상황과 표정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위안부 여성들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확인하니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있음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전시에선 증언과 문서, 사진과 영상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전시회의 개관식이 지난 28일 11시에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개최되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전시장을 방문해 뜻깊은 행사에 동참했다. 전시장의 외부 벽면에는 큼직한 귀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귀환 지도를 보며 위안부 여성들이 얼마나 먼 곳까지 끌려가 고생을 했는지, 그들...
한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

우리가 몰랐던 ‘34번째 민족대표’ 이야기

한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 “석호필을 아시나요?” 이 물음에 당신은 대답을 어떻게 하겠는가. 실제로 여러 시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인기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석호필’이 있다.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활약한 인물, 캐나다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뿐만 아니라 ‘석호필’과 같은 푸른 눈을 가진 4명의 청년들의 존재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명의 캐나다인들이 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을까? 그들의 이야기가 서울시 시민청에서 펼쳐지고 있다.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서울시는 지난 2월 23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서울시청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전시를 개최 중이다.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로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함께 지키고 의료봉사와 학교 설립 등으로 우리나라 발전에 힘을 더한 캐나다인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했다.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3·1운동과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 개막식에 참석한 수많은 시민들 프랭크 스코필드의 손자, 딘 스코필드 전시는 5명의 캐나다인들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이들과 관련된 글, 영상, 사진 50여 점 등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일제강점기 속 이들의 활약을 조명하고 있다. 조선 말기인 1888년부터 1945년까지 200여 명에 이르는 캐나다인이 선교사, 학자, 의사, 기자로 한국을 찾아왔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고, 일제의 학살을 국제사회에 폭로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다섯 명의 캐나다인은 로버트 그리어슨, 아치발드 바커, 스탠리 마틴, 프레드릭 맥켄지, 프랭크 스코필드이다. ‘로버트 그리어슨’이 바라...
3·1운동 100년 만에 재조명하는 시민 영웅

3·1운동 100년 만에 재조명하는 시민 영웅

3·1운동 100년 만에 재조명하는 시민 영웅. 백범 김구 선생부터 무명의 아무개까지 독립운동은 너나없이 소망하는 한민족의 커다란 움직임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을 안국역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100년 하늘문’으로 명명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를 기점으로 안국역 곳곳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안국역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 이외에도 자주독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낸 80여 명의 진정한 시민 영웅을 만날 수 있다. 독립군의 원동력, 이회영 선생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의 우당 이회영 선생은 한말의 교육가이자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를 조직했다.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고, 침체된 무장 독립 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톈진 일본 영사관 폭탄 투척 등 의열 투쟁을 지도하다가 상하이 밀정에 의해 투옥되고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고, 2002년 중국 정부가 그에게 ‘항일혁명 열사 증서’를 수여했다. 하늘에서 펼치는 독립운동, 권기옥 열사 “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 꿈이 있는 나라는 희망이 있다.” 1920년대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총 7,000시간의 비행시간을 보유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한 한 비행사가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은 10년간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며 대위 계급까지 진급한 최고의 비행사였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윈난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비행기를 타는 공부를 해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가겠다’는 구국의 다짐으로 비행기에 오른 것. 이후 평안남도 도청 폭파 사건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