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에서 보이는 남산 서울타워

오밀조밀 풍경 따라 발맘발맘 걷는 후암동 골목길

후암동에서 보이는 남산 서울타워 호호의 유쾌한 여행 (145) 후암동 산책 천만가지 표정을 가진 서울. 당신은 오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초록이 짙어가는 6월 말, 고층빌딩이 즐비한 시크한 도심을 벗어나 남산 아래 정겨운 동네, 후암동 일대를 산책하고 왔습니다. 용산구 후암동 (厚岩)의 지명을 풀이하면 ‘두터운 바위’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이 동네에 두터운 바위가 있었는데요. 마을 이름 또한 그대로 ‘두텁바위’라 부른데에서 동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용산구 후암동 두텁바위로 막다른길 풍경 조선시대 한성부 도성 밖 성저십리 중에서 도성 남서쪽에 있었던 후암동은 1900년 경인철도 남대문역이 들어서면서 가장 빠르게 도심에 편입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용산에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1930년대 일본인 주거지가 형성되었고요. 이후 정재계 인사들이 후암동에 자리 잡으면서 고급 서양식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나면서 이 마을에는 북한 실향민들이 주거지를 형성했습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피난을 온 사람들이 자리 잡으면서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후암동의 상징적인 길 중 하나가 ‘두텁바위길’입니다. 두텁바위길을 따라 그물처럼 좁은 골목이 연결되어 있어요. 막다른 길을 알리는 표지가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언덕으로 이루어진 후암동 골목길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벽돌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습니다. 대문 옆에 걸려 있는 우편함, 집 앞에 내놓은 화분 등 옛 골목의 정서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주택가였던 후암동에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3년 전부터 후암동에 루프탑 식당과 카페, 시장, 서점 등이 생기면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독특한 개성으로 무장한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 또한 후암동의 매력입니다. 스마트폰 지도를 잠시 끄고, 잠시 길을 잃어도 좋아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게 이름도, 인테리어도 독특한...
전경

남산 아래 가파른 언덕, 해방촌의 변화

지금부터 딱 4년 전, 2012년 7월에 해방촌을 취재했다. 그 당시 아이템은 서울의 떠오르는 골목 여행. ‘함석집과 햄버거 가게의 아름다운 동거’가 주제였다. 그 후 경리단길이 방송에 심심치 않게 소개되면서 제2의 가로수길로 폭풍 성장했고, 덩달아 해방촌도 서울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유명해지면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마련이다. 지난 4년 동안 해방촌은 어떻게 변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해방촌을 찾았다. 경리단 앞 교차로에서 해방촌 오거리까지 이르는 신흥로를 따라 올라갔다. 초입부터 가게가 눈에 띄기 시작해 언덕 꽤 높은 곳까지 줄지어 들어섰다. “가게가 많아지니까 임대료가 너무 올랐어요. 외지인이 임대업을 하려고 집을 많이 구입했거든요.” 해방촌의 대표 맛집인 카사블랑카의 주인 나시리 와히 드 씨(모로코)는 “높아진 임대료 때문에 문을 닫는 가게도 많다”며 “특히 오래된 가게가 문을 닫을 땐 안타깝다”고 했다. 대표적인 곳이 인디고. 해방촌 2세대인 오상석 씨가 운영하던 일명 미국식 백반집으로, 해방촌에서 제일 처음 문을 연 외국인 대상 음식점이었다. 임대 기간과 임대료 문제로 해방촌 아랫동네의 상징적인 곳이 문을 닫은 것이다.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흥로 초입의 한신옹기 일제강점기에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만든 108 계단 서울의 대표 낙후 지역 중 하나인 해방촌이 도시재생을 통해 쾌적하고 안전한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또 해방촌의 대표 산업이었지만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니트 산업이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를 통해 재조명받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임대료와 땅값 상승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어 상인이나 토박이 주민 모두 걱정이 많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해방촌은 남산 아래 용산2가동을 말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통에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과 피란민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엄마 손 잡고 네 살 때 해방촌으로 피란 온 이춘경 씨는 해방촌의 옛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
1960년대 인현동 모습

문화주택 ‘후암동’ 인쇄 메카 ‘인현동’ 옛 모습

서울 근대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 ‘후암동’과 ‘인현동’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보고서가 나왔다. 두 동네가 간직한 서울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기록한 보고서를 통해 도시사회적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5년 용산구 후암동과 중구 인현동 2개 지역에 대한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를 완료하고 ,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사업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07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역점 사업으로서, 사회경제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장소별로 기록해 나가는 사업이다. 후암동, 조선시대 한적한 농촌마을에서 일제강점기 일인들의 고급주택으로 남산의 남서측 산록에 위치한 후암동은 조선시대에는 도성 밖의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 일본인들의 신시가지로 개발되어 대규모 고급 문화주택지가 조성된 지역이다. 옛날 후암동 문화주택지 전경 현존하는 문화주택 당시에 지은 문화주택이 아직까지도 302채가 남아 있어 후암동은 현존하는 문화주택의 최대 집결지이며, 이번 조사에서 이러한 문화주택에 대한 실측조사를 비롯한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후암동 지월장 가장 대표적인 문화주택으로는 서선식산철도주식회사(西鮮殖産鐵道株式會社) 상무이사인 니시지마 신조우(西島新藏)의 별장인 ‘지월장’(指月藏, 후암동 250번지)으로, 이 주택은 그 규모가 매우 커서 오랫동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소유로 잘못 알려져 오기도 했다. 보고서에는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후암동의 도시사회적 변화과정을 각종 자료와 후암동 주민들의 구술사를 통해 면밀하게 기록했다. 인현동, 3,651개의 인쇄업체가 몰려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인쇄골목 1960년대 인현동 모습 조선시대 주자소가 설치되면서부터 현재까지 인쇄출판 문화의 대표지역인 인현동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의 도로망과 골목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다. 인현동 인쇄골목 전경 최근 들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