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뉴시스

“기차 세울 수 없나요? 가스불 안끄고 왔어요”

방송작가 최경의 (65) 인삼 두 뿌리 대추 세알 #씬 1.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그렇다고 아주 먼 옛날도 아닌 때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독신여성 A씨는 어느 봄날, 출장길에 올랐다. 서울로 가는 가장 마음편한 교통편은 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자주 서울을 오간 터라, 미리 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평일 오전엔 한가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일어난 덕분에 아침밥을 거르는 일도 없었다. 다만 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에 예상보다 출발이 조금 늦어졌을 뿐이다. 기차시간에 맞춰 서둘러 집을 나선 그녀, 다행히 제시간에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서울본사의 회의는 따로 준비해갈 것도 없고 참석해서 열심히 메모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서울에 간 김에 친구를 만나볼까. 아니면 백화점에 가서 눈 호강을 해볼까 이런저런 궁리로 설레기까지 했다. 적어도 옆에 앉은 할머니가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마시기 전까지는. #씬 2. 119 소방서에 화재출동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대원들은 신속하게 차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지는 한 아파트. 그런데 신고내용이 좀 이상했다. 화재출동이긴 한데, 화재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으니 가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고를 해온 곳은 역무원이었는데 자신의 집이 아니라 승객의 집이라고 했다. 신고된 집은 저층 아파트 3층, 확인을 위해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현관문을 통해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대원들은 곧바로 베란다를 통해 진입하기 위해 굴절차 사다리를 펼쳤다. #씬 3. 무궁화호 열차는 어느덧 수원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A씨 옆에 앉은 할머니가 보온병을 열자, 구수한 인삼차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익숙한 향기였다. “집에서 끓여온 인삼차인데 같이 마실래요?” 할머니가 인심 좋게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A씨의 뇌리 속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동시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답 대신 자리에서 용수...
매화ⓒ이은경

뭣도 모르고 늙음이 찾아왔다

방송작가 최경의 (64) 나이든 건 미안한 걸까? 예견된 일이었다. 방송에 사자성어가 등장하면 곧바로 인터넷 포탈사이트의 검색어에 오를 때 짐작했어야 했다. 미련하게 그것도 모르고 신기해했다. ‘설마 이 사자성어 뜻을 몰라서 검색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거였다. 방송에 나오는 단어의 뜻이 뭔지 모르거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한 것이었다. 매주 방송을 제작하면서 막바지에 하는 일은 제목과 함께 마지막에 제작진의 생각을 담는 몇 문장의 메시지를 확정하는 일이다. 모두 모여앉아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며, 제목이 주제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가 얼마나 인상에 남게 할 것인지 고심하고 또 고심한다. 시청자들은 흘려보낼 수도 있는 것인데도 제작진들은 머리를 쥐어짠다. 그래봤자 정작 방송을 보면 허무하게도 몇 초만에 훅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걸 알면서도 매번 모여 앉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날도 제목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한 청년이 부모를 찾는 사연에 대한 제목을 고민하다가 내가 불쑥 떠올린 단어는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다. “혈혈단신 ○○씨의 뿌리 찾기, 이건 어때요?” “헉, 너무 옛날 느낌인데요. 혈혈단신 이런 단어 요즘 잘 안 쓰잖아요.” “이걸 제목으로 하면 혈혈단신 단어가 검색어 순위에 오를걸요?” 늙었나 보다. 얼마 전부터 어떤 일상적인 단어를 쓰면, 후배들이 웃는다. “선배님이 쓰는 단어는 참 고풍스러워요.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어봤던 말들이 새삼 생각나요.”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다. 낄낄거리면서 함께 웃었는데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돼 가나보다 싶기도 해서 씁쓸하다. “예전에 내가 프로그램 할 때는...”, “예전에 비슷한 아이템 한 적이 있는데...”, “나도 예전엔 그랬는데...” 과거가 자꾸 튀어나온다. 다행히 착한 후배들은 잘 들어준다. 심지어 재미있어 하면서 (어쩌면 재미있는 척 해주면서) 이야기를 들으며 마지막엔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
31일 목포신항에 도착한 세월호ⓒnews1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세상 어찌 할꼬?

31일 목포신항에 도착한 세월호 방송작가 최경의 (63) 세상은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되고 필연이 계속되면서 세상이 확 뒤집히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다. 북경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뉴욕의 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래서 현실은 늘 변화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요즘 답답한 현실 때문에 ‘고구마 만개 먹은 것 같다’는 말이 유행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더 그렇다. 헌재에서 대통령 탄핵인용 결정이 난 뒤, 국민들의 관심은 파면된 전직대통령의 구속여부로 옮겨졌다. 과연 전직대통령을 검찰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할까. 법원이 구속을 결정할까... 꽤 많은 이들이 말했다. 국민 다수의 뜻으로 대통령직에서 내려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됐다고. 어떤 이들은 구속이 되는지 마는지는 더 이상 관심 없다. 파면된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고도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파면된 뒤, 거짓말 같이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탄핵인용 결정이 난 그날, 5시간 뒤 세월호 인양날짜가 발표됐다. 3년 가까이 바다 속에 묻혀 있던 배를, 그토록 기술적인 문제로 인양이 어렵다고 했던 그 배를 갑자기 들어 올리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세월호가 모로 누운 채, 바다위로 올라왔다. 1,073일 만이었다. 2014년 4월 16일, 모로 누운 채 침몰해가던 세월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모두를 먹먹하게 했다. 그렇게 금방 올릴 수 있는 것을 왜 3년 동안 인양을 못한 것일까. 기술적인 문제였을까 아니면 다른 문제였을까. 이 모든 건 우연일까. 그리고 오늘 새벽 3시를 조금 넘겨 TV에 속보가 떴다. 전 대통령 구속을 알리는 속보였다. 한 사람이 가고 나니, 또 거짓말처럼 세월호가 뭍으로 돌아왔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해 일어난 대형참사를 그저 교통사고쯤으로 말해온 사람들은 왜 구조를 제...
학대반대운동ⓒ뉴시스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학대가 빚은 참극

방송작가 최경의 (61)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 학대가 빚은 참극 새 학기가 됐다. 초등학교 입학예정인 아이들 중에 학교에 오지 않는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꽤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왜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걸까? 장기결석아동과 초등학교입학대상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진 건 작년부터였다. 친부와 동거녀에게 학대를 당해오다 스스로 탈출한 11살 여자아이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되면서 오랫동안 묻혀있던 잔인한 진실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2년 전, 3년 전, 학대로 아이를 죽인 뒤 유기하거나 암매장하고 뻔뻔하게 아무 일 없이 생활해온 비정한 부모들이 붙잡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왜 아무도 아이들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왜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살아서 구할 수 없었나? 아동학대 가해자 10명 중 8명이 ‘친부모’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드러난 학대사건의 피해아동들은 대부분, 살아서 구출되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낳아준 부모의 학대 속에서 유년을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지옥 같은 집에서 아이들의 몸과 정신은 멍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참혹한 결과로 이어진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엽기적인 부부 토막살해사건. 범인은 바로 둘째아들이었다. 그는 명문대 휴학생으로 평소 온순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부모를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걸까. 그와 면담을 한 심리학자는 그의 성장과정에 주목했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거나 폭발해서 폭력을 행사했고,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투사하면서 심리적인 압박을 했죠. 그러면서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시킨다며 매질은 물론이고 모욕을 주고 가슴에 상처를 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능력이 많고 우수한 아이인데도 오히려 열등감이 많은 사람으로 성장했어요.” 그는 명문대에 진...
풍경ⓒ김남영

가족들과 ‘제대로’ 대화하고 계신가요?

방송작가 최경의 (60) 기술이 필요한 가족 대화 제작진 사무실로 한 50대 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아서 제보 보고 연락했어요. 대화가 끊긴 가족, 그거 우리집 이야기에요. 저는 집에서 왕따에요. 집사람도 애들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아요.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는 A씨는 쉬는 날, 가족들 몰래 집 옥상에 올라가 휴대전화를 붙들고 제작진에게 해결방법을 찾아달라고 간곡하게 도움을 청해왔다. “집사람 너무 말이 없어요. 자기 의사 표현을 분명히 안하거든요. 주로 나 혼자 얘기하고 나 혼자 끝내고... 베개머리 송사라고 그러잖아요. 잠자리에서 딸내미는 어떻고 아들내미는 어떻고 나는 이야기를 좀 하자는 편인데 한참 이야기 하고 있으면 옆에서 쿨쿨 잠자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혼자 실컷 떠들었다 싶고 그런 게 계속 쌓이는 거예요.” 제작진이 집을 방문했을 때 A씨는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마시면서 투덜거렸다. 연애할 때는 말수 적고 차분한 아내가 마음에 들어 결혼했다는 그는 이제 아예 자신에게 입을 다물어버린 아내 때문에 답답함을 넘어서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홧김에 시작한 술은 이제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지경이 됐지만 그마저도 아내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어떨 땐 일부러 더 마셔요. 술병 한번 뺏어보라고. 그런데도 반응이 없어요.” 그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 중에 아내가 집에 돌아왔고, 제작진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는 부엌에서 조용히 식사준비를 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지도 않았다. 얼마 뒤엔 함께 사는 장성한 아들도 돌아왔지만 방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아들은 몇 달 전 제대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따로 살고 있는 딸을 제외하고 세 가족이 있었으나 집안은 고요했고 누구 하나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었다. A씨는 그저 거실 한켠에 상을 펴놓고 앉아 술만 마실 뿐이었다. 제작진은 아내에게 왜 남편과 말을 하지 않는지 물었다....
증권거래소

누구나 상상해 봤을 법한 일확천금의 꿈

방송작가 최경의 (59) 주식천재 ‘복덩이’가 나타났다! 얼마 전, 심상치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사촌여동생이 요즘 푹 빠져있는 여자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예전에 방송했던 ‘복덩이’인가 그 여자 같아요.” 사촌여동생이 몇 달 전부터 귀인을 만나 하던 일을 모두 접고 그녀 옆에서 수발을 들며 살고 있는데, 주식천재인 그녀가 워낙 금 펀드 운용을 잘해서 수익금을 어마어마하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일 년만 옆에 있으면서 투자를 잘하면 그동안 쌓였던 빚도 모두 청산할 수 있다며 몹시 기뻐했다는 사촌동생, 하지만 제보자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어디에서 많이 들은 이야기 같아서 방송을 찾아보게 됐고, 주식천재 복덩이로 불리면서 해외선물거래를 한답시고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수십 억 원을 가로챈 뒤 감쪽같이 사라진 그 사기꾼이랑 비슷한 것 같다는 의심이 들어 제작진에게 연락을 해왔다고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사기꾼 ‘복덩이’에 대한 방송 역시 제보로 시작됐다. 서울의 한 지역에서 10여명의 투자자들을 울리고 홀연히 사라진 이모씨, 피해금액만 40억원 대였다. 당시 이씨는 일본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다 막 귀국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이 운용한 펀드가 얼마나 수익률이 좋은지 운용실적을 보여주며 귀가 얇은 사람을 골라 현혹시켰고, 초기엔 투자자에게 투자금의 10%를 매일 입금해주면서 실력을 증명했다. 소문을 듣고 투자자들이 앞 다퉈 이씨에게 돈을 맡겼고, 한 사람은 아예 집 한 층을 내주며 사무실처럼 쓸 수 있게 했다. 이씨는 밤새워 컴퓨터로 선물거래를 하는 모습을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수익금을 돌려주곤 했기에 철썩 같이 믿었다고 한다. 투자자들은 그녀를 ‘복덩이’라고 불렀고, 수익금을 모두 그녀에게 재투자할 뿐 아니라, 있는 돈 없는 돈, 대출에 사채까지 끌어 모아 올인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만큼 주식천재 복덩이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투자자들은 자신의 카드로 온갖 해외고...
어르신ⓒ뉴시스

103세 할아버지의 ‘의외의’ 장수비법

방송작가 최경의 (58) 103세 할아버지의 장수비법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위 ‘골골백년’이 나은지 ‘짧고 굵게’ 사는 것이 나은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치레 하며 고통스럽게 사느니 짧게 살더라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 깔끔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낫다는 사람도 있다. 현대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켜왔고 지병이 있어도 치료와 약을 먹으며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됐다. 보통 사람들도 100세 이상 살 수 있는 시대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수명 100세 시대에 들어선 우리가 모두 바라는 삶의 형태는 바로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깨끗하게 죽는’ 것이다. 꽤 오래 전 일이다. 장수비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장수노인들에게 어떤 비결이 있는지 취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팀 후배작가와 함께 103세 할아버지 한분을 만나기 위해 서울 근교에 있는 집으로 찾아갔다. 과연 103세 할아버지는 자신의 장수비결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실까? 실제로 거동은 가능하신지, 어떤 음식을 드시는지, 하루 일과는 어떤지, 운동습관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할머니가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기다고 있다며 우리를 반겨 맞았다. 허리가 굽은 꼬부랑 할머니였다. 마루의 한 소파에 기대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께 인사부터 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 미스코리아 두 분이 오셨네!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103세 할아버지는 농담도 잘하셨다. 할머니에게도 ‘우리 미스코리아’라고 불렀다. 정확한 나이를 묻는 질문에도 재치 있게 답했다. “겨우 세 살이지 뭐.” “앞에 100은 어디 가고요?” “100은 뚝 떼야지 그 까짓것, 내가 지금 덤으로 사는 거야. 남의 나이 살아요.” 할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이고, 소싯적 일본 유학길에 올라 명문대학을...
야경ⓒ김일중

“제가 당한 사고가 방송꺼리가 되나요?”

방송작가 최경의 (56) 불발로 끝난 추억 1 - 발목이 사라졌던 남자 꽤 오랫동안 방송 제작현장에 있으면서 많은 이들의 사연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때마다 새삼 느끼는 건, 세상은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고,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때론 웃음과 해학으로, 눈물과 감동으로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엮어내고, 또 때론 안타까움과 분노를 희망과 변화의 씨앗으로, 함께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꿈이다. 물론 그러기까지 숱한 어려움을 겪고 벽에 부딪히곤 한다. 세상 일이 그렇지만 방송도 온에어가 되기까지 만사형통, 일사천리로 술술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템을 찾아 사전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엎어지기도 하고, 촬영까지 무사히 잘 마쳐도 마지막에 출연자의 변심으로 방송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더 황당한 경우는 사전취재를 통해 파악한 내용과 직접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 전혀 다를 때다. 오래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아이템을 찾으면서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교통사고로 심하게 찌그러진 차 안에 갇혀 누군가 구조해주기만을 기다리던 한 남자가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을 보자마자 ‘내 발목이 없어졌다’며 찾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내용이었다. 가까스로 구조된 남자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을 받은 끝에 퇴원까지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발목까지 절단될 만큼 큰 사고를 당한 와중에도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그를 만나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순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수소문을 통해 남자와 연락이 닿았고, 그는 흔쾌히 제작진을 만나겠다고 했다. 과연 남자의 발목은 찾은 건지, 다리는 괜찮은 건지, 걸을 수는 있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혹시 우리의 질문이 상처...
야경ⓒnews1

‘세상이 무서워요’ 극심한 공포로부터 탈출하는 법

방송작가 최경의 (55) 현대인의 위기, 공포 2편 -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이유 ㅎ씨는 2년 째 집 밖을 나가지 못한다. 다리가 다친 것도 아니고, 앓아누운 것도 아니다. 집 밖을 나가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증상이었다. “어느 날 지하차도에 차가 멈췄는데, 순간 영원히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곳에 갇혀있을 것 같은 느낌이 몰려오는 거예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거요. 엄청난 공포였죠. 이러다 내가 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지하철을 못 타요.” 한번 시작된 증상은 평온했던 그녀의 삶을 아예 멈춰버렸다. 몇 달 동안은 현관문조차 열수 없었고, 집에서 가까운 슈퍼마켓도 몇 번을 시도하다 길모퉁이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채 집으로 뛰어 들어오곤 했다. 이런 증상이 있기 전까지 ㅎ씨는 누구보다 활달하고, 친구도 많았고, 혼자 해외 배낭여행을 하며 즐겁게 살았다고 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공포에 갇혀 집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일까? 그런데 ㅎ씨와 비슷한 증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어떤 이는 병원을 다니기 위해 기차를 타야 하는데, 기차에서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곧 죽을 것만 같은 증상이 시작되면 중간에 내릴 수가 없어 도저히 기차를 탈 수 없다고 했고, 어떤 이는 같은 증세로 비행기 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공황장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엄청나게 무서운 경험을 한 그런 사람들이 겪게 되는 온갖 생리증상 있죠. 심장계통 증상 또 호흡계통, 소화계통, 신경계통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그런 수많은 증상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전투할 상황이 아닌데 내 몸이 전투모드를 갖추면 나는 해석을 하게 되잖아요. 어? 이건 뭐지? 나 이러다가 죽거나 미치는 거 아니야? 이런 극심한 공포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첫 번째 엉터...
야경ⓒ강명훈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

방송작가 최경의 (54) 현대인의 위기, 공포 1편 - 공포를 직감한다는 것의 의미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을 직감하는 건,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냥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감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험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방송 일이 새벽까지 이어지는 게 다반사라 그날도 새벽에 귀가하던 길이었다, 집 앞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한 10대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아이의 눈빛이 뭔가 이상했다. 왜 그런 느낌이 든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아이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몰려왔을 뿐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몸을 돌려 천천히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갔다. 마치 다른 볼 일이 생각난 듯... 어느 정도 현관과 멀어졌을 때, 뒤를 돌아봤더니 그 남자애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또 다른 일행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나의 직감은 맞는 것 같았다. 그때부턴 살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새벽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경비실을 향해 뛰었다. 마치 꿈속에서 소리를 지르면 큰 소리가 나오지 않아 답답한 것처럼, 내 목소리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소리를 냈던 것 같다. 잠을 자던 경비아저씨가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를 좇아오던 남자 아이들은 멈칫 하더니 몸을 돌려 딴청을 피웠다. 그 아이들도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온몸을 덜덜 떨며 경비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한참동안 불도 켜지 못한 채 숨죽여 울었다. 혹시라도 내가 몇 호에 살고 있는지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엘리베이터 공포증에 시달렸다. 엘리베이터 앞에만 서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지금까지도 늦은 밤 엘리베이터에 낯선 남자가 홀로 타있으면 그냥 보내곤 한다. ‘공포’는 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