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외관

남서울미술관, 예사롭지 않은 외관 속에 얽힌 사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외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6) 남서울미술관 이곳의 정식 명칭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생활미술관이지만 보통은 남서울미술관이라고 부른다. 사실 나도 정식 명칭은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서울 남쪽 지역의 분관이라는 뜻으로 사당역 6번 출구에서 100미터 정도 거리에 있으며, 2004년 처음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게 서울 재발견 코너에 왜 소개되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을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면 남서울 미술관은 본래 사당역 근처에 있지 않았고, 미술관도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서구화를 추진하면서 다양한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 중 한 곳이 바로 벨기에였다. 1900년, 벨기에 외교관 레온 방카르가 한성에 들어오면서 양국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1902년에 접어들면서 레온 방카르는 현재의 회현동에 지상 2층, 지하 1층 크기의 영사관을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공한다. 영사관 건물은 당시 유행하던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붉은 벽돌로 쌓아올렸는데 중간 중간에 화강암을 띠처럼 둘렀다. 2층 치고는 꽤 높은 편이고, 채광 때문인지 창문도 꽤 긴 편이다. 양쪽 측면에 기둥으로 지탱된 발코니 공간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1층과 2층의 기둥머리 모양이 틀리다는 것이다. 2층은 덕수궁의 석조전에서 볼 수 있는 이오니아식의 양머리 형태이고, 1층은 간소한 형태의 도리아식 기둥머리를 하고 있다. 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주요한 특징인 좌우 대칭에 맞춰서 한 가운데 정문 옆에 나란히 창문이 하나씩 있고, 그 옆의 발코니 공간을 받치는 기둥 역시 숫자와 위치가 똑같다는 점을 비춰보면 다소 의외다. 하지만 1층과 2층의 창틀도 조금 다른 점을 감안하면 2층을 다소 볼륨감 있게 보이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대리석이 깔린 내부는 미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바뀌어 있지만 최소한으로 그쳤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부 역시 1층과 ...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전통문화공간 '무계원'

종로 뒷골목 100년 전 세월과 풍류를 따라 걷다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전통문화공간 '무계원'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5) 무계원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분해가 조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둥과 서까래에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끼우는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 한옥의 특징 때문에 처음 만들어진 자리와 다른 곳에 위치한 전통 건축물들이 몇 개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 있는 양이재는 원래 덕수궁이 경운궁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궁 안에 있던 것이고, 경희궁의 흥화문은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2년, 일본 사찰인 박문사로 옮겨졌다가 1994년에 와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무계원 역시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하문을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 뒤편의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무계원이 나온다. 담장이 야트막하건 아예 없어서 지나가는 누구나 환영한다는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무계암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무게는 만만치 않다. 무계원의 이름은 바로 무계정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건물들이 잔뜩 차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당연히 텅 비어 있으니 무계원 즈음이면 인왕산과 자하문이 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안평대군의 사저인 무계정사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선비와 예술가들과 교류를 했다고 전해진다. 무계원의 한옥들은 오진암의 것을 가져와서 다시 재조립한 것이다. 1910년 지어진 오진암은 전형적인 근대 도시한옥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곳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낸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에는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요정으로 손꼽히기도 했던 곳이다. 2010년 관광호텔 신축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울시와 종로구청에서 협의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서 옮기도록 한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무계원은 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자 인문학 세미나와 강연, 전시회 등이 열리기도 한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건축물

덕수궁 석조전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4) 석조전 덕수궁 대한문으로 들어가서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가면 돌담길이라는 이름의 카페 겸 선물 가게가 있다. 연못과 접해있기 때문에 고즈넉한 덕수궁 안에서도 더 없이 조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잠시 연못 구경을 하고 함녕전을 끼고 돌아가면 많은 사람들이 정관장과 헷갈려하는 그 유명한 정관헌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정원처럼 꾸며진 곳이 나오는데 꽃과 나무를 구경하다보면 회백색의 기둥과 난간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무와 기와, 벽돌로 만든 전통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 건물은 1910년 완공된 석조전이다. 이곳이 대한민국의 덕수궁이라는 사실을 머리에서 지워버린다면 한 가지 생각 밖에는 안 떠오를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 신전이네.’ 석회암으로 만든 굵은 원형 기둥이 줄지어 서 있고, 삼각형의 박공과 난간의 형태는 영락없이 TV에서 봤던 그리스 신전과 판박이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전의 석상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석조전 1층 중앙홀 ‘안은 유럽의 궁궐이군.’ 한옥들로 가득한 덕수궁 안에 겉은 그리스 신전이고 내부는 유럽의 궁궐처럼 꾸며진 석조전이 만들어진 이유는 다소 서글프다. 1897년 2월, 고종은 약 1년간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서 경운궁으로 향한다. 청일전쟁 이후 기세가 등등했던 일본은 러시아라는 강적에게 밀려 숨을 죽인 상태였다. 고종은 그 틈을 타서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데 연호를 따서 광무개혁이라고 부른다. 석조전의 건축은 개혁 정책 중 하나였다. 조선을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에게 서구 건축물을 보여줌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영국인 고문 하딩의 건의로 1900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석조전의 내부는 19세기 유럽의 궁궐이나 귀족의 저택처럼 꾸며졌다. 1층과 2층으로 나눠진 석조전 내...
사직단 모습

많이 들어본 종묘사직, 종묘는 아는데 사직은 모른다?

사직단 모습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3) 사직단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듣는 대사 TOP 3는 아마 ‘통촉하여주시옵소서’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목숨을 걸고 종묘나 사직을 보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역사적인 유적지로 남아있다. 마지막 대사에 등장하는 종묘는 탑골공원 옆에 있어서 정말 많이 가봤다. 점심 먹고 가봤고, 저녁 먹기 전에 가봤고, 평일에 가봤고, 주말에 가봤고, 명절에도 가봤다. 하지만 사직단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종묘는 뭔가 행사도 많이 열리고 언급이 많이 되면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반면, 사직단은 대사를 통해서 들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르게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뜻한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제후국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래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만든 것이다. 어쨌든 사직단은 조선시대 내내 선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와 더불어 왕실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종종 국가의 운명을 드러내는 장소로 언급되었다. 사극에서 신하들이 목청 높여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라는 외치는 것은 곧 국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사직단 대문 사직동 주민 센터와 접해있는 사직단에 도착하면 붉은색으로 칠해진 사직단 대문과 만나게 된다. 보물 제177호인 이곳은 원래 더 앞에 있었지만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현재의 위치로 밀려났다. 안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으로 둘러싸인 담장이 보인다.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문은 각각 동신문과 서신문, 남신문과 북신문으로 불린다. 북신문이 가장 큰데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역시 야트막한 담장과 홍살문들이 보이고 그 안...
칠궁 전경

왕비는 아니지만 조선의 왕을 낳은 일곱 후궁 이야기

칠궁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2) 칠궁 칠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일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시간에 맞춰서 무궁화동산에 있는 칠궁 안내소로 가야 한다.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 도로를 건너면 비로소 칠궁에 들어갈 수 있다. 관람객들과 함께 경찰과 경호원이 동행한다.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이유는 칠궁의 담장 너머에 청와대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고, 지금도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칠궁은 조선시대 임금을 낳은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비록 임금을 낳았지만 왕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과 함께 종묘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별도로 세운 사당에 모셔야만 했다. 원래는 이곳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만 존재했다. 그러다가 고종과 순종 때 다른 사당들이 이곳에 옮겨왔고, 1929년에 덕안궁이 이곳에 오면서 칠궁이 되었다. 이곳에 모셔진 사당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를 모신 저경궁과 남편인 숙종의 손에 죽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사당인 대빈궁,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 효장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를 모신 연호궁,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를 모신 선희궁, 정조의 아들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를 모신 덕안궁으로 모두 일곱 개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칠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사당은 모두 다섯 채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육상궁과 연호궁, 선희궁과 경우궁이 각각 한 사당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3개의 사당 중 가운데가 희빈 장씨의 사당 대빈궁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희빈 장씨를 모신 대빈궁이다. 다른 사당의 기둥들이 모두 사각형인데 비해 대빈궁의 기둥만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후궁들 중에 유일하게...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가을빛 닮은 건물이 매력적인 시청역 성당의 비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1)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이곳을 가는 가장 짧고도 빠른 길은 한때 부민관이었으며 지금은 서울시 의회로 사용 중인 건물의 앞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길 대신 코리아나 호텔 옆 골목으로 들어가서 조선일보 미술관 쪽으로 가는 길을 추천하고 싶다. 그 옆에 붉은 벽돌로 만든 성채 같은 건물이 나온다. 특이하게도 입구가 한옥으로 되어있는데 바로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편에 주황색 기와지붕을 한 긴 건물이 보인다. 바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으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등을 돌렸지만 의식과 교회의 건축 양식은 가톨릭과 유사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이 성당은 십자가 형태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곳이다. 1922년에 아서 딕슨의 설계에 따라 건축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설계도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의 상태로 남겨진다. 그러다가 1992년, 영국에서 설계도가 극적으로 발견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된다. 따라서 성당의 머릿돌에 나오는 완공연도는 1996년이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치솟은 첨탑 대신 하늘에 살짝 기댄 것 같은 지붕을 하얀 구름과 몹시 잘 어울리는 주황색 기와가 덥여있다. 분명 서양식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한옥의 처마와 지붕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개방이 된 성당 내부 역시 볼만하다. 가운데가 우뚝 솟은 공간에 서면 1,2층 양쪽의 스탠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과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탠드글라스는 마치 한옥의 창살을 닮아있다. 한낮에 가면 양쪽의 스탠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눈앞에서 교차하는 걸 볼 수 있다. 지금보다 더 종교적이었던 시대라면 충분히 신의 흔적으로 볼만하다. 운이 좋다면 2층에 있는...
경복궁 집옥재

고종은 궁궐 속 작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었을까?

경복궁 집옥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0) 경복궁 속 작은 도서관 ‘집옥재’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경복궁은 숨겨진 보물들이 많은 곳이다. 비록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지만 경회루만큼 아름다운 향원정과 을묘왜변의 비극이 서려있는 건청궁, 그리고 북쪽 끝에 자리 잡아서 늘 한적한 집옥재가 바로 그곳이다. 집옥재는 경복궁 안의 다른 전각들과는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이 간다. 옥을 모으는 곳이라는 뜻의 집옥재는 원래는 창덕궁의 함녕전 근처에 있다가 1891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고종의 거처가 경복궁으로 바뀌면서 함께 이사를 온 것이다. 건물은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지만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벽돌을 사용했고, 용마루에는 중국풍의 용 두 마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우측의 협길당은 전통적인 한옥 형태지만 좌측에 있는 팔우정 역시 유리창을 사용했다. 현판의 집옥재라는 글씨 역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적혀있다. 건물에 칠해진 단청은 궁궐임을 감안해도 굉장히 화려한 편인데 특히 내부의 지붕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천정 가운데에 팔각형으로 솟은 공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청나라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고종은 이곳을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보관했으며,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후원 가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골치 아픈 일에 시달렸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가장 큰 용도는 왕실의 도서관이었는데 서구의 각종 문물과 기술을 소개하는 책들을 비치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구화를 진행하려던 고종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집옥재는 19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벽돌과 유리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와 한옥이 만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옥은 지붕이 무겁기 때문...
돈의문박물관마을 한옥 골목

역사가 슬그머니 다가와 자기소개 하는 마을

돈의문박물관마을 한옥 골목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9) 돈의문 박물관 마을 내가 사랑하는 정동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길을 걷다 지치고 힘들 때 자연스럽게 들리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원래 주택가였으며, 과외방이었다. 그리고 연인들이 다정하게 음식을 먹는 스파게티 집과 직장 일에 지친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대성집 같은 곳이 있던 곳이다. 그것들이 자리 잡기 훨씬 전에는 임금이 지내던 경희궁의 끝자락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백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겨져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다 때려 부순 다음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박물관이라는 간판을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넓은 뜰과 마주친다. 그곳에 서면 이곳이 돈의문 박물관이 아니라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뜰 한복판에 서서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을 살펴보면 집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새로 지은 한옥들이 층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그 옆은 80년대 이어진 것 같은 건물이 있다. 그 아래쪽의 골목길로 들어서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기묘한 건물들도 있다. 건물을 증개축하면서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세월의 무게를 덕지덕지 않은 건물들이 남겨지면서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꾸며진 덕분에 ‘무덤’이 아니라 ‘역사’가 된 것이다. 돈의문 전시관 돈의문 박물관 마을 한쪽에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는 물론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이 있던 시절을 조명했는데 자연스럽게 ‘아지오’라고 불렸던 스파게티 집을 활용한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근대와 현대의 모습이 남겨져있다. 2층에는 미니어처와 그림으로 만들어진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볼 수 있다. 2층에 가면 옆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로 넘어간다. 기존의 건물들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역사가 박제된 것이...
조선시대 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를 발행했던 기별청

“아무 기별이 없느냐?”의 유래가 된 경복궁 ‘기별청’

조선시대 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를 발행했던 기별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8) 경복궁 '기별청' 드넓은 광화문을 들어가서 흥례문까지 지나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은 근정전을 향해 직진하지만 나는 살짝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서 유화문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유화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전각 앞에 선다. 두 칸짜리 작은 전각 위에는 아주 작은 현판이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기별청’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기별'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를 발행했던 곳으로 조보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기별지다. 유화문 옆에 있는 기별청은 기별지가 발행되던 곳이다. 기별지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발행한 관보였다. 따라서 기별청이 궁궐 안에 자리 잡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한 기별지는 매일 아침에 각 관청에서 기별청으로 보낸 기별서리들이 베껴서 가져갔다. 기별서리들이 베껴 쓰기 위해 흘려 쓴 글씨체를 기별체라고 부르는데 빠르게 적어야했기 때문에 보통 한문과는 달랐다. 지방의 경우는 기별군사라는 별도의 전령을 통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보냈다. 기별지에는 다양한 소식들이 실렸는데 주로 임금이 받은 상소문에 대한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 조정의 인사이동 소식과 과거 시험 날짜 등이 적혀있다. 정보의 전달이 극히 제한되었던 조선시대에 기별지는 조정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매체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별지를 손에 넣고자 했다. 선조 때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이 기별지를 활자로 인쇄해서 판매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기별지를 손에 넣으면서 편리하게 여겼지만 딱 한명, 선조가 불편하게 여겼다. 덕분에 기별지를 인쇄해서 판매하던 관련자들이 대거 붙잡혀서 처벌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정보를 통제하고 ...
윤동주 시인의 언덕

가을에 찾아간 이곳에 시인의 바람이 불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7) 윤동주 문학관 나는 윤동주 문학관 앞에서 종종 이곳에는 시인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동행한 사람들이 시인의 바람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때 마다 제대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쓴 웃음을 짓거나 우물거린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시인의 바람이 자하문 고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 불고 있다고 말이다. 이곳에 윤동주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자하문을 품고 있는 인왕산 자락이 윤동주가 하숙을 하던 수성동 역시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 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증조부 때 북간도로 건너갔다가 명동촌으로 옮겨져 정착하면서 그곳이 고향이 된 것이다. 용정으로 이주해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후 일본 유학을 떠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서 1945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썼던 원고들은 후배인 정병욱이 자신의 집 마루 밑에 숨겨놨다가 1948년 유고시집인 으로 나오게 된다.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은 그의 시가 주는 순백의 고결한 느낌처럼 새하얀 색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조금 이상한데 폐쇄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고쳐서 2012년 문을 연 것이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애걔~’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가운데 우물 모형이 있는 곳에 서서 둘러보면 전부 다 보일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동주 문학관은 그곳이 전부가 아니다.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영상전시관도 있고, 자그마한 노천카페가 있는 지붕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시인의 언덕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오르면 인왕산 너머로 펼쳐진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불어오는 도시에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