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학당 터

광화문 빌딩숲에서 발견한 역사의 흔적 ‘중부학당 터’

중부학당 터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7) 중부학당 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뒤편, 케이 트윈타워의 남쪽 화단에는 중부학당 터라는 표지석, 그리고 거기에 대한 설명이 붙은 판석, 그리고 뒤쪽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이곳에 조선시대 초중급 교육기관은 학당이 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극에 나오는 교육기관은 훈장이 있는 서당이나 성균관 정도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학당은 대단히 낯선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학당의 역사는 고려부터 시작된다. 당시 성균관의 대사성이었던 정몽주가 공양왕 때 개경에 세운 것이 시작이다. 이때는 중앙과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해서 5부 학당이라고 불렀는데 지방의 향교 같은 역할을 했다. 차이점은 향교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신 문묘가 없다는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하기에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조선에서는 성균관은 물론 학당 역시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다만 세워진 장소는 개경이 아니라 조선의 새로운 도읍이었던 한양이었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북부학당은 세워지지 못해서 4부 학당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에 탔다가 다시 중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당은 성균관의 하부 교육기관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들은 성균관의 교수들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도울 훈도들이 각 학당에 파견되었다. 한양의 교육기관 중 하나였던 중부학당은 다른 학당들과 함께 한말에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잊어졌던 중부학당은 이곳에 빌딩이 세워지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공사를 하던 중 중부학당의 것으로 추정되는 적심석들이 발견된 것이다. 적심석은 건물의 초석이 놓을 자리에 땅을 파고 돌을 채워 넣는 것으로 잡석이라고도 부른다. 적심석이 나온 곳 주변은 다져서 평탄하게 하는 동시에 지반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 흔적도 나왔다. 중부학당 터 적심석 표지석 안쪽에는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조선시대 도시유적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입구

600년 도시 역사가 공평동 땅 속에 살아있네!

조선시대 도시유적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입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6)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종각역 근처에 있는 센트로폴리스 빌딩 지하 1층에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빌딩을 짓던 중에 발견된 조선시대 골목길과 건물터를 복원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빌딩이 세워진 공평동은 조선시대에는 견평방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현재도 번화가이지만 조선시대 역시 한양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린다고 해서 운종가라는 별명이 붙은 시전이 있었던 곳이며,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라는 입지조건 때문에 왕실 사람들의 집이나 의금부 같은 관청들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족부터 관리, 상인들이 함께 지내던 곳으로 활기차고 역동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당시의 그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복원해 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구로 들어가면 우선 강화유리로 된 바닥과 만나게 된다. 복원한 건물터와 다른 흔적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세운상가를 비롯해서 최근에 많이 쓰는 방식이지만 이곳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려가서 건물터를 직접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내부 벽면에는 한양의 대표적인 지도인 수선전도부터 발굴과정과 보존과정을 담은 이미지와 영상들을 볼 수 있다. 동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하다보면 견평방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무엇을 팔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아울러 이곳에서 발견된 청화백자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빌려준 그릇을 돌려받기 위해 바닥에 표시를 해뒀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곳을 무대로 살아가던 여리꾼과 전기수, 왈짜와 순라꾼들이 삶을 엿볼 수 있는 실물크기의 인형과 목소리는 흥겨움 속에 풍기는 삶의 고단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VR이라고 불리는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한옥 내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특히 인형과 장난감등을 통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장...
구세군 중앙회관

나눔 문화의 효시, 구세군의 역사가 숨 쉬는 곳

구세군 중앙회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5) 구세군 중앙회관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덕수궁 길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말하곤 한다. 중간에 미국 대사관저가 있어서 항상 경찰들이 순찰을 돌기 때문이다. 경찰들과 눈인사를 하고 덕수궁 길을 오르막을 넘어가서 광화문 쪽으로 내려가면 길 중간에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인데 현관은 덕수궁 안의 석조전처럼 그리스 신전 스타일이다. 거기다 정확하게 좌우 대칭이기 때문에 안정감과 엄격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이 건물은 1928년 자선냄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이 사관 양성과 선교 사업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구세군에 관한 내용은 별건곤을 비롯한 일제 강점기 발행된 잡지에 종종 등장한다. 그 기사를 보고 연말에 지하철역에서 마주치는 구세군이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2003년부터는 역사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있어서 오래된 자선냄비를 비롯해서 구세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 지붕을 닮은 현관 덕분인지 실제 높이인 2층 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과 닿아있다는 느낌도 충분히 받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건물은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뒤쪽에 신축 건물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돼 있다. 근대에 지어진 건물들은 대개 사용 목적에 맞는 모습으로 지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근처에 지어진 경성재판소는 법원 건물이라는 엄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충분히 화려하고 눈에 띄게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틀이나 벽면, 지붕에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다. 밋밋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고요해서 그런지 지친 다리를 쉬기에는 더 없이 적당하다. 이곳으로 오게 되면 중명전과 이화학당, 러시아 공사관 터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정동과 덕수궁의 답사...
광통관

을지로 한복판 오래된 시간을 머금은 곳, 여긴 어디?

광통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4) 광통관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걷다보면 유리로 전면을 덮은 고층 빌딩이나 알록달록한 페인트로 오랜 세월을 가린 건물들 사이에서 좀 이상한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더 없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2층 건물의 정체는 바로 광통관이다. 근처에 있는 광통교의 이름을 딴 것인데 붉은 벽돌로 된 벽체 사이사이에는 돌기둥이 세워져있고, 지붕과 맞닿은 끝 부분에는 아주 정교한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기둥과 길쭉한 창문 덕분에 2층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아치형의 1층 창문과 문 역시 여러 가지 장식적인 효과를 줘서 화려함을 더한다. 특히 살짝 튀어나온 건물의 양쪽 끝에는 완만한 경사를 가진 지붕이 있는데 잔뜩 부풀어 오른 모양이라 돔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문의 지붕 위쪽으로도 크고 작은 다락 창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바로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로 건너편 동아빌딩 앞에서 보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광통관 뒤편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면부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창문과 지붕을 비롯한 여기저기에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광통관은 1914년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다음해 다시 짓는 과정에서 지붕과 돔이 현재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1년 전인 1909년 탁지부 건축소에서 설계하고 세운 것이다. 원래는 회의장 용도로 만들려고 했는데 때마침 사옥이 필요했던 대한천일은행과 수형조합이 이 건물을 대여했다. 그래서 1층은 대한천일은행과 수형조합이 사무실로 이용했고, 2층은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은행 건물인 셈이다. 아울러 대한천일은행이라는 민족 자본의 산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나서 대한이라는 이름을 빼고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게 되었다. 해방 이후 상업은행으로 명맥을...
2018 서울사진공모전 다시세운상가

‘다시 세운’에서 다시 세우는 우리의 역사

2018 서울사진공모전 다시세운상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3) 다시세운광장 유적전시실 세상이 기운이 모인다는 뜻의 세운상가는 종묘 맞은편에 있다. 일제 강점기 후반, 미군 네이팜탄 공습으로 인한 피해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지역의 민가를 허물고 공터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1968년, 판자촌을 허물고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상가를 짓는다. 세계의 기운이 모두 모인다는 뜻의 세운상가라는 이름을 얻은 이곳은 오랫동안 부유층의 거주지와 전자상가로서 명성을 떨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한 때 철거될 상황까지 갔지만 최근 리모델링을 하면서 다시 세운상가로 재탄생했다.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외부 엘리베이터와 다른 상가와 이어지는 공중복도가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세운상가 지하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다. 이곳이 서울의 한복판이자 종묘의 맞은편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지하에서는 건물터와 유물들이 나왔는데 대략 조선 전기와 후기, 그리고 근현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다시세운광장 유적전시실 내부 현재 다시 세운상가 1층에는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유적전시실이 세워져있다. 아울러 세운홀 일부를 비롯해서 바닥에 두꺼운 유리를 깔고 아래에 발굴유적들을 공개하는 공간도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나온 조선 전기 유물들은 범상치 않은 것들이 많다. ‘天’자가 새겨진 전돌과 청동거울과 화로를 비롯한 청동으로 만든 제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청사기를 비롯한 각종 도자기와 자기들의 파편들도 많이 발굴되었다. 모두 일반 가정에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유물들이었다. 반면, 일반 가정이라면 있어야 할 온돌의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 조사 결과 이곳이 조선전기 중부 관아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문이 풀렸다. 특히 ‘天’자가 새겨진 전돌의 모서리에 경진년에 만들었다는 글씨가 있어서 대략 1520년 즈음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아래...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바라본 대한성공회 대성당

서울 시민기자학교 현장수업, 정동 한바퀴

대한성공회 대성당올해 ‘내 손안에 서울’ 시민기자 교육은 서울시평생학습진흥원 ‘모두의 학교’와 함께 진행해 지난 5월부터 매월 ‘서울 시민기자학교’를 진행해오고 있다.첫 번째 수업은 5월 금천구의 ‘모두의 학교’에서 세 명의 전문 멘토들의 특강이 있었고, 지난 주말 정명섭 멘토와 두 번째 수업이 있었다.정명섭 멘토는 ‘서울 재발견’이란 칼럼으로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서울 이야기를 내 손안에 서울에 연재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 수업은 야외수업으로 역사를 취재하는 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야외 옥상시청역 3번 출구 앞에 위치한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입구에서 만났다. 어느 순간 덕수궁 옆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이 잘 보인다는 것을 느꼈는데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완공되고부터였음을 알았다. 메인 전시공간은 지하 3층으로 내려가야 하지만 지하 1층부터 다양한 형태의 전시공간들이 자리 잡고 있다.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은 건물만 본다면 유럽의 어느 곳에 와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입구가 한옥으로 되어있는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분명 서양식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한옥의 처마와 지붕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수궁 안 연못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대한문을 통해 덕수궁으로 들어왔다. 돌담을 따라 연못을 구경했다. 이 연못은 가을에 특히 예쁘고 정명섭 작가 개인적으로는 눈이 왔을 때 제일 예쁘다고 했다.잠시 연못 구경을 하고 함녕전을 끼고 돌아 고종이 커피를 즐겨마시던 곳이라는 정관헌 내부를 구경하고 맨 위 돌계단에 서서 앞에 보이는 풍광을 바라보았다. 어떤 건물이든지 주인이 보았을 시선으로 풍광을 감상해 보라고 충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게 보니 시원하게 펼쳐진 풍광이 왜 그곳에 정관헌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
서울시민건축학교가 열리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지상 전경

도시의 면면을 만날 수 있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서울시민건축학교가 열리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지상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2) 서울도시건축전시관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덕수궁 옆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이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인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국세청 별관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건물이 사라진 공간에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들어섰다. 성공회 성당을 가리지 않기 위해 지하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서울의 건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미로처럼 복잡한 공간과 맞닥뜨린다. 메인 전시공간은 지하 3층으로 내려가야 하지만 지하 1층부터 다양한 형태의 전시공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지하 1층에는 서울의 과거를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용산에 있던 철도 관사의 모형과 70년대 거여동에 있던 7평 크기의 집을 실제 크기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벽지로 사용된 옛날 신문에서 지나간 세월을 느낄 수 있다. 지하 2층에는 서울의 도시건축에 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는 서울 아카이브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외부와 연결된 통로 역시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경운궁의 운교를 비롯해서 20세기 초반 정동에 있던 건축물들을 보여준다. 지하 3층은 두 개의 전시공간이 있다. 비움홀이라고 불리는 전시공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공공주거 주택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거 문제가 많은 갈등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우리에게 공공주거라는 해결책을 선보이고 있다. 비움홀 옆 갤러리에서는 공공건축과 건축가의 역할이라는 타이틀로 전시가 진행 중이다.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임시주택부터 대피공간을 꾸밀 수 있는 가림 막 같은 것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볼 수 있다.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그들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배려심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2011년 지진으로 인해 ...
SeMA 여의도 지하벙커

비밀의 공간 ‘여의도 지하 벙커’ 속엔 뭐가 있을까?

SeMA 여의도 지하벙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1) SeMA 여의도 지하벙커 금융과 방송이 모여 있는 여의도는 늘 복잡하다. 특히 여의도광장 옆의 버스환승센터는 쉴 새 없이 도착하고 떠나는 버스들과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정신없이 오가는 곳이다. SeMA 여의도 지하벙커의 출입구는 그렇게 정신없는 버스 환승센터 옆에 조용히 서 있다. 2005년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지하벙커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워낙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유지 된 탓에 언제 공사가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대략 1970년대 중반쯤으로 추정하는 것이 고작이다. 당시 여의도에서는 국군의 날에 각종 행사가 열렸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지하 벙커의 위치와 출입구를 고려하면 비상시를 대비한 경호 시설로 추정된다. 시간이 흘러서 지켜야 할 대상이 사라졌지만 지하벙커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갑작스럽게 발견된 지하벙커는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의 약칭인 SeMA를 앞에 단 채 말이다. 입구는 마치 지하철 출입구처럼 생겼지만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철 대신 넓은 공간과 그곳에 전시된 문화와 만날 수 있다. 160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은 탁 트여 있어서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인다. 이 공간은 문화 예술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이용 중이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과 각종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지나가는 노출 천정, 그리고 중간 중간 마치 커튼이 쳐진 것 같은 내벽들이 독특한 느낌을 선사한다. SeMA 여의도 지하벙커 VIP 대기실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오른쪽 측면에 좁은 통로 같은 것과 만나게 된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들었을 당시의 원래 출입구와 함께 역사 갤러리가 된 VIP 대기실이 나온다. 표범가죽 무늬의 소파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는 여의도의 역사와 더불어서 SeMA 여의도 지하벙커에 대해서 ...
창의문

도성 안팎 600년 이야기 가득 품은 ‘창의문’을 만나다

창의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0) 창의문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을 떠나 한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면서 경복궁을 비롯해서 한성의 성곽과 성문을 쌓는다. 창의문 역시 이때 같이 지어진 것으로 4개의 대문과 함께 지어진 4개의 소문으로 북소문에 해당되는데 북대문인 숙정문과 서대문인 돈의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의 지명을 따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일곱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칠궁을 지나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고갯길에 도달한다. 차와 버스들이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이곳에는 청운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맞은편에는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 초입에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흔적들이 남아있다. 1969년 1월 21일, 김신조가 포함된 북한군 특수부대 31명이 휴전선을 넘어와 청와대의 코앞인 이곳까지 진출한다. 국군 복장을 한 그들을 수상쩍게 여긴 최규식 경무관이 막아서 돌연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1.21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나란히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창의문은 숭례문처럼 웅장한 대신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태종 때 풍수지리상 왕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버린다. 이 문만 통과하면 바로 경복궁이라는 점도 폐쇄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닫힌 문은 중종 때가 되어서야 다시 열린다. 임진왜란 때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문루가 불타버렸지만 다른 곳은 무너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았다. 1623년, 왕족인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문루가 없어진 창의문으로 들어와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에 성공한다. 역사의 현장이 된 창의문은 영조 때 다시 문루가 세워지게 된다. 왕래가 별로 없...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

신촌 대학 속에 숨어 있는 ‘사도세자 어머니의 눈물’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9)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와 광혜원 신촌 연세대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희생된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뒤편에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 로비의 창문 너머로 두 채의 한옥이 보인다. 오른편은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일자형 한옥이고 왼편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각이다. 두 한옥이 있는 잔디밭에는 석탑을 비롯한 각종 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연세 역사의 뜰이라는 공간으로 단청이 없는 일자형 한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이자, 연세대학교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광혜원을 1987년에 복원한 것이고, 왼편의 정자각은 수경원 터에 세운 전시공간이다. 현재 정자각이 있는 공간 뒤편에 있는 연세대학교회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무덤인 수경원이 있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낳은 그녀는 특히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아버지 영조 역시 어린 시절의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하지만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이 독이 되었는지 아들은 날이 갈수록 엇나갔다. 결국 영빈 이씨는 피눈물을 참으며 며느리와 손자를 살리기 위해 남편에게 아들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영빈 이씨의 아들은 뒤주에 갇혀서 죽고 말았는데 죽은 이후 사도세자라고 불렸다.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고통 때문인지 영빈 이씨 역시 2년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무덤은 한성 바깥인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마련되었다. 왕비가 아니라 후궁이었기 때문에 의열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무덤 역시 의열묘라고 불렸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상인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의열묘도 수경원으로 위상이 높아진다. 그녀의 위패를 모신 곳은 선희궁이었는데 한성에 있다가 1908년, 현재의 청와대 옆에 있는 육상궁에 모셔지면서 현재까지 그곳에 자리 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