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여의도 지하벙커

비밀의 공간 ‘여의도 지하 벙커’ 속엔 뭐가 있을까?

SeMA 여의도 지하벙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1) SeMA 여의도 지하벙커 금융과 방송이 모여 있는 여의도는 늘 복잡하다. 특히 여의도광장 옆의 버스환승센터는 쉴 새 없이 도착하고 떠나는 버스들과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정신없이 오가는 곳이다. SeMA 여의도 지하벙커의 출입구는 그렇게 정신없는 버스 환승센터 옆에 조용히 서 있다. 2005년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지하벙커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워낙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유지 된 탓에 언제 공사가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대략 1970년대 중반쯤으로 추정하는 것이 고작이다. 당시 여의도에서는 국군의 날에 각종 행사가 열렸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지하 벙커의 위치와 출입구를 고려하면 비상시를 대비한 경호 시설로 추정된다. 시간이 흘러서 지켜야 할 대상이 사라졌지만 지하벙커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갑작스럽게 발견된 지하벙커는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의 약칭인 SeMA를 앞에 단 채 말이다. 입구는 마치 지하철 출입구처럼 생겼지만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철 대신 넓은 공간과 그곳에 전시된 문화와 만날 수 있다. 160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은 탁 트여 있어서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인다. 이 공간은 문화 예술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이용 중이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과 각종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지나가는 노출 천정, 그리고 중간 중간 마치 커튼이 쳐진 것 같은 내벽들이 독특한 느낌을 선사한다. SeMA 여의도 지하벙커 VIP 대기실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오른쪽 측면에 좁은 통로 같은 것과 만나게 된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들었을 당시의 원래 출입구와 함께 역사 갤러리가 된 VIP 대기실이 나온다. 표범가죽 무늬의 소파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는 여의도의 역사와 더불어서 SeMA 여의도 지하벙커에 대해서 ...
창의문

도성 안팎 600년 이야기 가득 품은 ‘창의문’을 만나다

창의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0) 창의문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을 떠나 한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면서 경복궁을 비롯해서 한성의 성곽과 성문을 쌓는다. 창의문 역시 이때 같이 지어진 것으로 4개의 대문과 함께 지어진 4개의 소문으로 북소문에 해당되는데 북대문인 숙정문과 서대문인 돈의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의 지명을 따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일곱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칠궁을 지나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고갯길에 도달한다. 차와 버스들이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이곳에는 청운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맞은편에는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 초입에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흔적들이 남아있다. 1969년 1월 21일, 김신조가 포함된 북한군 특수부대 31명이 휴전선을 넘어와 청와대의 코앞인 이곳까지 진출한다. 국군 복장을 한 그들을 수상쩍게 여긴 최규식 경무관이 막아서 돌연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1.21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나란히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창의문은 숭례문처럼 웅장한 대신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태종 때 풍수지리상 왕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버린다. 이 문만 통과하면 바로 경복궁이라는 점도 폐쇄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닫힌 문은 중종 때가 되어서야 다시 열린다. 임진왜란 때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문루가 불타버렸지만 다른 곳은 무너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았다. 1623년, 왕족인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문루가 없어진 창의문으로 들어와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에 성공한다. 역사의 현장이 된 창의문은 영조 때 다시 문루가 세워지게 된다. 왕래가 별로 없...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

신촌 대학 속에 숨어 있는 ‘사도세자 어머니의 눈물’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9)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와 광혜원 신촌 연세대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희생된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뒤편에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 로비의 창문 너머로 두 채의 한옥이 보인다. 오른편은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일자형 한옥이고 왼편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각이다. 두 한옥이 있는 잔디밭에는 석탑을 비롯한 각종 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연세 역사의 뜰이라는 공간으로 단청이 없는 일자형 한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이자, 연세대학교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광혜원을 1987년에 복원한 것이고, 왼편의 정자각은 수경원 터에 세운 전시공간이다. 현재 정자각이 있는 공간 뒤편에 있는 연세대학교회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무덤인 수경원이 있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낳은 그녀는 특히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아버지 영조 역시 어린 시절의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하지만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이 독이 되었는지 아들은 날이 갈수록 엇나갔다. 결국 영빈 이씨는 피눈물을 참으며 며느리와 손자를 살리기 위해 남편에게 아들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영빈 이씨의 아들은 뒤주에 갇혀서 죽고 말았는데 죽은 이후 사도세자라고 불렸다.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고통 때문인지 영빈 이씨 역시 2년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무덤은 한성 바깥인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마련되었다. 왕비가 아니라 후궁이었기 때문에 의열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무덤 역시 의열묘라고 불렸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상인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의열묘도 수경원으로 위상이 높아진다. 그녀의 위패를 모신 곳은 선희궁이었는데 한성에 있다가 1908년, 현재의 청와대 옆에 있는 육상궁에 모셔지면서 현재까지 그곳에 자리 잡고 ...
10년 전 궁산 자락에서 발견된 땅굴을 최근 ‘궁산 땅굴 전시관’으로 개방하였다.

서울에 땅굴이 있다? 봉인된 시공간에서 만난 역사

궁산 땅굴 전시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8) 궁산 땅굴역사전시관 겸재 정선 미술관 뒤편 궁산 자락에는 궁산 땅굴역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에 대한 답사기를 썼던 경험자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 시간을 내서 들려보기로 했다. 다소 뜬금없는 장소에 이상한 전시관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가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의 입구가 보인다. 안전 문제 때문에 철골을 덧댄 형태이긴 하지만 원형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땅굴은 높이와 폭이 2미터가 넘고, 길이는 거의 70미터에 달한다. 제주도나 지방에서는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이 종종 발견되고, 와인창고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경희궁이 있던 지역에 만들어놓은 대규모 지하군사시설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땅굴은 없었다. 물론 백인제 가옥에서 볼 수 있듯 태평양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공습을 우려해서 지하에 방공호를 파놓기는 했다. 하지만 궁산 자락의 땅굴은 단순한 방공호가 아니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 지금의 김포공항 위치에 육군 항공대가 운영하는 비행장을 건설한다. 비슷한 시기 제주도의 알뜨르에는 해군이 주둔할 비행장이 만들어졌다. 중국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삼기 위해 각종 군사시설들을 세웠고, 김포의 비행장도 그 중 하나였다. 궁산 땅굴의 위치나 규모로 봐서는 무기와 유류를 보관하는 것은 물론 공습을 받게 되면 지휘부가 피신하는 용도로 사용할 예정으로 보인다. 궁산 땅굴 내부 특히 땅굴이 있는 궁산은 행주산성의 대각선에 위치한 곳으로 한강을 관측하기 유리한 곳이라 삼국시대부터 성을 쌓아두었던 지리적 요충지다. 따라서 관측소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중일전쟁에 이어서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을 급속도로 군사기지화 한다. 그러면서 미군이 상륙할...
홍살문이 보이는 양천향교 전경

어떻게 양천향교는 서울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홍살문이 보이는 양천향교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7) 양천향교 홍원사를 지나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그리고 홍살문 뒤에는 외삼문과 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곳에 바로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천향교다.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으로서 고려 때부터 설립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향교의 설치와 운영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향교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지방관으로 하여금 잘 관리하도록 별도의 지침을 내렸다. 또한 향교에서 공부를 한 유생들에게만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향교는 교육기관 외에도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다.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은 지방에 세운 향교의 교육과 제사를 통해 유학이 지방까지 뿌리를 내리기를 바랬다. 그래서 향교는 지방마다 예외 없이 하나씩 남았다. 하지만 성균관과 학당이 설치된 한양에는 향교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양천향교는 서울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지방에 있어야 할 향교가 우리 곁에 있게 된 것은 서울의 급격한 확장과 관련이 있다. 서울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양천향교 양천향교는 태종 11년인 서기 1411년에 세워졌다. 세워질 당시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양천군이었다가 나중에 김포와 통합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서울로 편입되었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80년대 전면적인 보수를 해서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지만 양천향교가 아니라 양천향교 터로 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향교에서 머물며 공부를 하는 교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가운데 계단 위쪽에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다. 현재 동재와 서재는 사무실로 사용 중...
숭인원

도심 속 색다른 쉼터가 되어주는 ‘영휘원과 숭인원’

숭인원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6) 영휘원과 숭인원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려서 영휘원 사거리를 지나면 어느 순간, 길옆의 풍경이 변한다. 간판 대신 돌담길이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면 주차장을 겸한 영휘원과 숭인원의 출입문이 나온다. 소액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안쪽으로는 신과 왕이 걷는 길인 신도와 어도가 곧게 뻗어있고, 그 끝에는 ‘丁’자형 한옥인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펼쳐져있는데 그 위에는 석물이나 망주석 같은 것들이 얼핏 보인다. 정자각의 오른편에는 비각이 세워져있다. 조선시대 왕들이 묻혀있는 왕릉은 대개 이런 형태를 띄고 있다.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 정자각과 무덤의 거리가 좀 떨어져있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영휘원과 숭인원에는 왕들이 묻혀있지 않다. 영휘원은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 보통 엄상궁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묻혀있다. 예전에 갔던 칠궁에서 그녀의 신주가 모셔져있는 덕안궁을 본 기억이 있어서 새삼 반가웠다. 입구 쪽에 있는 것은 영휘원이 아니라 숭인원이었다. 이곳에 묻힌 사람은 태어난 지 9개월 밖에 안 된 아기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순헌황귀비 엄씨의 아들인 의민황태자, 우리에게는 영친왕 이은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의 첫 번째 아들인 이진의 무덤이다. 일본으로 반 강제로 유학을 간 영친왕은 그곳에서 일본 귀족의 딸인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해서 첫 아들인 이진을 얻는다. 하지만 1922년, 조선으로 돌아온 부모를 따라 건너왔다가 1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독살 당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비록 걸음마도 제대로 못 뗀 아이였지만 왕족이었기 때문에 그에 걸 맞는 무덤이 만들어졌다.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작별했다는 사연을 알고 나서 그런지 다른 왕릉들보다 더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영휘원 안쪽에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묻혀있는 영휘원이 있다. 숭인...
우정총국

대한제국 우푯값은? 종로 작은 건물에 담긴 우정의 역사

우정총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5) 우정총국 종로는 묘한 곳이다. 종각역을 기준으로 광화문과 종로 방향은 비록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번화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반면,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걸으면 주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조계사 때문인지 몰라도 농협은행 종로지점을 지나가면 고즈넉한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도심치고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계사를 지나면 길옆에 한옥 한 채가 작은 광장을 마당삼아 서 있는 게 보인다. 붉은 색 단청이 칠해진 다섯 칸짜리 팔작지붕을 한 평범해 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서는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마당 한쪽에는 이곳이 문화재로 보호받는 우정총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하얀색 입간판이 서 있다. 이곳을 오기 위해 종각역에서부터 걸었던 도로의 이름도 우정국로다. 근대의 문물 중 하나인 우편제도는 조선인들에게 신기하고 편리하게 받아들여졌다. 우표만 붙여서 우체부에게 가져다주면 원하는 곳까지 전달해준다는 시스템은 심부름꾼을 따로 쓰거나 보부상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전달해야만 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받아들였다. 개화를 추진하던 고종은 조선에도 이 편리한 우편제도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우정총국을 설립한다. 그리고 우정총판으로 개화파의 핵심인물인 홍영식을 임명한다. 그리고 갑신년인 1884년 12월, 드디어 우정총국이 문을 연다. 하지만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는 피바다로 변하고 만다. 홍영식이 가담한 개화파가 연회에 참석한 외척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창덕궁으로 가서 고종과 명성왕후에게 변란이 발생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때마침 들려오는 폭발음에 놀란 두 사람은 김옥균의 말대로 경우궁으로 옮긴다. 갑신정변의 초반은 성공적이었지만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3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으로 간신히 피해서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홍영식은 끝까지 고종의 곁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갑신정변의 주 무대가 된 우정총국...
thumb_597x377_2

상암동 공원 속 오래된 일본식 가옥의 정체는?

부엉이 근린공원 일본군 관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4) 부엉이 근린공원 일본군 관사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는 ‘상전벽해’라는 속담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쓰레기 매립지인 난지도였던 이곳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를 치를 축구장이 들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방송국과 영화사, IT 기업들은 물론 한국영상자료원도 입주했으며, 아파트 단지와 공원도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 상암월드컵파크 10단지 아파트 옆 부엉이 근린공원. 아파트 단지에 있는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가옥 두 채가 있다. 콘크리트와 철근, 유리로 지어진 주변 건물들과는 달리 나무와 기와로 만들어졌는데 출입문 부분의 지붕이 툭 튀어나온 것이 눈에 띈다. 궁금증은 출입구 옆에 있는 안내판으로 풀 수 있다. 공원에 있는 두 채의 목조 가옥들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상암 2택지개발 지구에 있던 6채의 가옥들 중 일부다. 1930년대 일본이 수색역 인근에 세운 병영에 있던 것으로 장교용 관사들을 이곳에 옮겨오면서 전시장으로 꾸민 것이다. 두 채 모두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특징을 보인다. 암키와와 수키와가 일체화된 걸침기와가 지붕을 덮었고, 널빤지를 길게 옆으로 붙여서 벽을 만들었다. 창문은 약간 돌출된 형태로 위쪽에 비를 막기 위해 작은 차양이 붙어있다. 앞쪽에 있는 762번지 관사는 위관급 장교 관사, 소위와 중위가 사용한 것으로,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다른 한 채는 728번지 관사는 대위급 장교가 사용하는 관사였다. 올라가는 길에는 관사 단지에 있던 방공호 입구를 재현해놓은 것도 보인다. 길 옆에는 728번지 관사의 지붕구조가 전시되어 있다. 흙과 잡목을 올려서 무거운 한옥의 지붕과는 다른 일본식 주택 지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들보 위에 짧은 기둥인 동자주를 세워서 마룻대와 지붕을 받치도록 되어 있는데 한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지붕이 가볍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72...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가옥 전경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니 고즈넉한 옛집이 눈 앞에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가옥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2) 간송옛집 간송 전형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맞서 우리의 문화재를 지킨 인물이다. 막대한 재산을 써서 하마터면 일본에 빼앗길 뻔했던 수많은 문화재들을 지켜냈다. 그가 지켜낸 문화재들은 간송미술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도봉구 방학동에는 이런 간송 전형필의 흔적이 남아있는 ‘간송옛집’이 보존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와 학교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조금 걸으면 간송옛집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잘 가꿔진 화단과 야트막한 담장 너머에는 사랑채처럼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있다. 이곳은 간송 전형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전명기가 인근의 농장과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의 농지에서 얻은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대략 120여 년 전에 지어진 한옥이라 유리를 사용하는 등 근대와 접해있는 도시형 한옥이다. 이곳에는 옥정연재(玉井研齋)라는 이름의 현판이 붙어있는데 ‘우물에서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뜰 한쪽에는 옥정이라는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있다. 아버지와 연관이 있던 이곳에 간송옛집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다소 슬픈 사연이 깃들어있다. 종로에 있던 간송 전형필의 생가가 철거되고 거기서 나온 자재를 가지고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던 이곳을 수리해서 간송 전형필과 아버지 전명기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현재의 형태로 보수를 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되어 보존 중이다. 간송옛집 밤 풍경 일상의 장소에서 몇 발자국 살짝 벗어난 장소에서 만난 간송옛집은 고즈넉했다. 내부에서 음악회나 전시회가 종종 열리는 것 같았지만 평소에는 그냥 나 같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만 간간히 도달하는 것 같았다. 집 자체는 굉장히 작아서 잠깐 돌아볼 수 있다. 뒷문으로 나가면 궁궐에서나 볼 법한 벽돌로 만든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선농단

농사에서 음식까지 생각보다 많은 ‘설(說)’이 있는 곳

선농단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1) 선농단 뽀얀 국물을 자랑하는 설렁탕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음식이다. 이 설렁탕의 어원에 관해서 몇 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몽골로 고기를 물에 넣고 끓인 음식인 ‘술루’에서 비롯되어서 술루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설, 고기와 뼈를 넣고 설렁설렁 끓였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선농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업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조선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신들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고 적전이라는 밭에서 소가 끄는 쟁기를 잡는 친경이라는 행사를 했다. 이 행사를 구경하러 온 백성들에게 친경에 쓰인 소를 잡아서 대접했고, 선농단의 이름을 따서 선농탕으로 불렸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말라는 우금령까지 내렸던 조선에서 대놓고 소를 잡아서 음식으로 대접했을 리 없다며 반대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쨌든 설렁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 모르는 선농단은 제기동역 근처에 있다. 1번 출구에서 나와서 야트막한 길로 이어지는 주택가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선농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사직단에서 한 번 겪어보고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충격이 덜하긴 했지만 선농단 역시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사직단처럼 사방에 홍살문이 있고, 가운데 돌을 두른 제단 하나가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1년에 한 번 임금이 직접 와서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전전에서 밭을 가는 행사를 한 이후 구경 온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 때 대접한 음식이 설렁탕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농사가 중요하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지내던 제사의 대가 끊긴 것은 1908년 순종 황제 때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훼손되었던 선농단은 놀이터 등으로 이용되다가 2009년부터 정비가 되었다. 현재는 흙과 잔디가 있어서 애완견들의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