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

“독립운동가들의 고통 전해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 기자는 서울시립대학교 평생교육원 특화교양과정 중 ‘역사교실 4기’에 참여하고 있다. 강좌 3일차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견학을 다녀왔다. 교육생들은 해설사의 안내로 오전 10시~11시 40분까지 전시실을 시작으로 옥사, 사형장, 격벽장 등 여러 시설을 견학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선열한 독립운동가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08년~1945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리고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었던 장소다. 3.1독립만세운동과 함께한 태극기 모습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을 관람하는 사람들 이곳은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면서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됐다. 사형장과 제 10·11·12옥사는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8년 국가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 유관순의 모습도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옛 서대문형무소 건물들을 복원해 전시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 동선은 ‘1전시관(보안과 청사) – 2중앙사 – 3옥사 12동 – 4옥사11동 – 5공작사 – 6추모비 – 7통곡의 미루나무 – 8사형장과 시구문 – 9옥사 터와 붉은 벽돌 – 10격벽장 – 11여옥사- 12망루와 담장(입구)’ 이 순서로 참관하면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이 수감됐던 8호 감방 전시관 1층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다양한 정보 검색실, 탄압실체자료전시와 기록영상이 있는 형무소 역사실과 영상실이 있다. 2층에는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 실상이 전시된 민족저항실Ⅰ,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가 전시된 민족저항실Ⅱ,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 모형이 있는 민족저항실Ⅲ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기존 지하고문실을 복원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고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야외전시물로는 격벽장, 여옥사, 취사장, 망루, 담장 ...
3·1독립운동기념탑 주변 조형물

장충동에서 기억하는 1919

3·1독립운동기념탑 주변 조형물 장충동 남산공원 산책을 하고서 국립극장을 지나서 가는 길에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마주했다. 삼일절 99주년인 올해, 100주년 앞두고 있어서인지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그날의 함성이 전해져오는 것 같아 발길을 멈췄다. 높이 19m 19cm(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을 의미)의 3·1독립운동기념탑은 기단 오석판에 3·1독립선언서가 새겨 있다. 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우리 민족이 이루고 나아가려는 바를 담고 있다. 좌·우측으로 한글과 영문 뒷면에는 기념탑 건립 취지문과 건립개요, 헌시가 있다. 3개의 기둥 축은 천·지·인과 천도교·기독교·불교 연합의 상징으로 마치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듯하며, 삼태극(우주)을 원구로 구성하였다. 3·1운동이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세계 최초의 종교연합운동으로서 비폭력 평화운동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원구 위에는 동서남북 4방위를 조형화한 민족웅비의 상을 올려놓았다. 정부수립 제50주년 기념일인 1998년 8월 15일에 착공한 3·1독립운동기념탑은, 3·1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에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탑 주변을 둘러보며 독립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보았다. 벽면에 새겨진 조각 속 장면에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일본 순사가 총검을 겨누고 있는데 사람들의 눈빛에 두려움 같은 건 찾아 볼 수가 없다. 굳건한 표정으로 목이 쉬어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외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귓전에 전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대한독립만세!”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한마디였을까, 삼일절 99주년인 해에 목이 쉬도록 불러도 아깝지 않을 말이 아닐까...
서대문구 시민들이 공연한 유관순 연극 장면

“유관순의 마지막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해”

서대문구 주민들이 공연한 유관순 연극지난 7월 29일 태극기를 찍어내며 독립선언서를 소리 높여 읽는 곳이 있었다. 바로 서대문구 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시민들의 연극 공연 발표 현장이다.서대문구에서는 2016년 광복 71주년을 맞이하여 전문 연극인과 일반인이 함께 배우고 연습하여 공연할 기회를 제공했다. 연극에 참여한 주민들은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다닐 때부터 옥사를 치를 때까지의 독립운동 모습을 공연으로 표현했다. 공연 연습을 하고 있는 주민들공연연습은 4월 4일부터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본부 세미나실에서 저녁마다 진행됐다. 지역 주민 20여 명이 모여 몸 스트레칭부터 발성, 연극의 이해, 대사 읽기, 무대 동작, 희곡 분석, 무대 및 소품 제작, 연극 제작의 전 과정을 배우고, 공연준비를 했다. 배우고 무대에 올리기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극은 감동 그 자체였다. 공연을 보는 관객들까지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전문 연극인이 아닌 시민들이 공연하는데 정말 잘 했어요. 마지막 옥고를 치르는 유관순을 보고 짜릿한 느낌을 받았지요. 저도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요.”라며 멀리서 공연 보러 온 김영숙(59세)씨가 극찬을 했다.또 성남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배지혜(29세) 주부도 “엄마가 연극을 해서 보러 왔는데 혹시 고문받는 장면에서 3살 난 딸이 울까 봐 걱정했는데 울지 않고 공연 보고 박수까지 치는 것이 정말 신기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학교에 와서 공연을 해 주었는데, 그동안 15년이 넘게 안 하다가 다시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니 정말 기뻤어요”라며 엄마를 자랑스러워했다. 연극연습을 함께 준비했던 강사와 주민들 이번 공연은 서대문구청과 서대문연극협회 회장이며 로얄씨어터 윤여성 대표와 김장호 부회장, 김수진 배우, 유준기 팀장, 박인환 배우 등과 시민들이 함께 하는 노력이 있었다. 배우들은 직장인들이 많았지만, 5살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라서 더욱더 의미가 크다.윤여성 대표는 “연극은 시대의 거울입니다. 목마른 관객을 위해서 웃음으로 울음으로 ...
지난 1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 ⓒ뉴시스

유관순 열사의 체포부터 장례까지…

지난 1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 유관순 열사의 묘가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었다는 기사(☞그냥 지나쳤다면, 이번 삼일절에는 꼭!)를 읽고, 찾아가 보았다. 1920년 10월 14일 이화학당의 교장과 학생들이 장례를 치러줬으며,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 실전(失傳) 되었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도 이곳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 들른 부동산에서 만난 팔십대 중반 어르신이 공동묘지 쪽에 산다며 길을 알려주었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은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그녀가 묻혔던 곳의 위치나 수감 당시의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자는 유관순 열사의 묘를 찾은 이 기회에 그녀가 체포당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용산구에 있는 유관순길 97년 전 4월1일(음력 3월 1일)에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아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심법원에서 다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
유관순 열사의 유언과 사진

열여덟 소녀가 감옥에서 남긴 마지막 말

※ 3.1절 특집기사 연재 시리즈 ①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2015.2.25.) ② 3.1절, 한용운 말고 백초월 스님도 있습니다 (2015.2.26.) ③ 3월에는 '3.1절 역사나들이' 어떠세요? (2015.2.27.) (4) 3.1절, 우리가 다시 유관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광복의 기쁨을 맞기 위해 우리 민족은 수많은 고난에도 끊임없이 독립을 위한 운동을 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 만세 운동, 즉 3.1절은 대표적 사례입니다.광복 70주년인 올해 3월 1일은 제96주년 3.1절이기도 합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일제의 총부리 앞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그 날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한자리에 모여 함께 만세를 외칠 수 있었을까요? 이메일도 문자도 보낼 수 없었고, 심지어 전화조차도 귀한 상황에서 3.1운동은 날짜, 장소, 시간 그리고 구체적인 퍼포먼스까지 은밀히 공유되어 수개월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일제의 위협과 해산명령을 피하면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또 대규모로 벌어졌던 3.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플래시몹'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전국방방곡곡 울려 퍼지던 그 날의 함성 안에는 꽃다운 10대 소녀도 서 있었습니다. 3.1 운동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그 분, 유관순 열사입니다. 일제의 고문에 한 송이의 짓밟힌 꽃처럼 아스러져 간, 유관순 열사의 넋이 올해 3.1절을 맞아 시청을 찾아왔습니다. 서울시는 3.1절을 맞아 서울도서관 외벽에 유관순 열사의 사진과 유언을 담은 대형 통천을 설치합니다. 통천에 담긴 유관순 열사의 모습은 3.1운동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는데요, 당시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어 입을 다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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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생각합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지금은 거의 불리지 않지만 광복 후 1960년대까지 3,1절 무렵이면 많이 불렀던 노래다. 당시에는 그저 막연하게 일제의 탄압과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고등학생 누나를 기리는 노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해마다 3,1절이면 그 어떤 이름보다 눈물겹고 가슴 뻐근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선열이 유관순 열사다. 제95주년 3,1절을 앞두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서대문형무소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제가 1908년에 최초로 세운 감옥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통치에 항거하는 독립지사들을 탄압하고 수감해 우리 국민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를 만들었다. 처음 만들 당시 형무소는 500명 정도를 수감할 수 있는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당시 전국의 모든 형무소를 통틀어도 300명을 수감할 수 있는 규모였던 것을 고려하면 결코 작지 않은, 매우 큰 규모였던 셈이다. 실제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는 서대문형무소에 3천여 명에 달하는 독립지사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명칭은 처음에 경성감옥으로 불리다가 서대문감옥(1912), 서대문형무소(1923), 서울형무소(1945),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바뀌며 해방 후에도 형무소로 사용되다가 1987년 3월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편되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잔혹하고 모진 고문으로 400여 명이 순국했는데, 의병활동을 했던 허위선생이 1908년 10월 21일 최초로 순국했다. 1987년 독립공원으로 개편되면서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9, 10, 11, 12, 13옥사와 중앙사, 그리고 나병사가 남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감옥의 모습은 참으로 답답하고 끔찍한 풍경이었다. 옥사들을 한 바퀴 돌아 이른 곳이 '여옥사(女獄舍)' 유관순 열사가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바로 그곳이었다. 안내문에 의하면 수많은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