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전과 자정문 등 경희궁 전경을 담장 밖에서 바라본 모습

‘고궁+오솔길’ 고즈넉한 경희궁 산책

※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시행에 따라 별도 안내 시까지 휴궁합니다비가 내려도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은 고궁을 찾았다. 모처럼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경희궁을 향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으뜸이고 최근에 경희궁지 발굴조사가 있던 곳이기에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증도 많이 일었다.서궐로 불리는 경희궁 숭정문이 보이는 전경 ©염승화경희궁은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경복궁과 창덕궁 등을 대신해서 지은 것이다. 궁의 모습을 온전히 그림에 담은 보물 1534호 서궐도안에 따르면 전각과 문 등 건축물들이 19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하지만 참담하게도 일제 침탈 시기에 거의 모든 건축물들이 파괴되었고 크기 또한 대폭 축소되었다.궁안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흥화문 ©염승화지하철 서대문역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니 정문인 흥화문 앞이다. 경희궁이 행궁으로 지어졌기에 문루가 없는 단층 문이다.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궁 안의 유일한 건축물이라 드나들 때면 아무래도 더 눈여겨보게 된다. 본래 위치는 현 구세군회관 자리이나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인 사찰(박문사)이나 호텔 문으로 쓰인 수난사를 안고 있다.최근에 진행된 경희궁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석물들이 현장 한편에 비치되어 있다. ©염승화전각 방면으로 발길을 옮겼다. 옛 서울고가 자리하고 있던 야트막한 언덕 위 공터와 숭정문 앞 광장에 널찍하게 파헤쳐져 있었던 발굴 현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흙과 잔디로 말끔히 덮여 있다. 아직 조사 결과는 알길 없으나 한편에 모아 놓은 몇몇 석물들은 직접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유물이나 유적지가 발표, 확인될지 기대가 자못 컸다. 일제 침탈로 제자리를 잃은 숭정전의 비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염승화곧장 숭전문 문턱을 넘자 박석이 넓게 깔려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군주가 조회를 하던 정전인 숭정전 앞뜰이다. 그 중앙에 좌우 두 줄로 세워져 있는 품계석들에 눈길을 보내다가 임금이 만조백관이 도열해 있는 어로를 지나 월대 위로 ...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에 팔리는 수모를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로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 모습

일제강점기 흔적이 남아 있는 경희궁의 눈물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울 도심 속에 언제든 찾아가 조용히 쉴 수 있는 궁궐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서울에 모처럼 눈이 내린 이튿날 눈이 녹을세라 궁궐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 지어진 궁궐로, 1617년(광해군 9)에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인 1620년에 완공됐다. 처음에는 경덕궁으로 불렸고 서쪽에 있는 궁궐이라고 하여 서궐로 불리기도 했다. 경희궁은 16대 임금인 인조에서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여러 왕들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정경 ⓒ박분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다 보면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궁궐의 정문 좌우로 마땅히 있어야 할 담장 하나 없이 덩그러니 문만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훼손된 경희궁의 모습은 궁 앞 정문에서부터 시작된다. 흥화문은 경희궁 창건 때 세워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인 절인 박문사로 옮겨졌다.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
경희궁 전경

조선 5대 궁궐? 5초 만에 안 떠오르는 ‘비운의 궁’

경희궁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0) 경희궁 강북삼성병원에서 광화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경희궁이 있다. 하지만 경찰박물관과 서울 역사박물관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가버린다. 인지도로만 따져보자면 경희대나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보다도 낮을 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임금들의 사랑을 받았던 경희궁이 이렇게 안구에 습기가 찰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역사가 남긴 상처 덕분이다. 원래 이곳은 궁궐이 아니라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기가 흐른다는 얘기가 돌자 임금이었던 광해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광해군은 궁궐 덕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궁궐의 신축에 집중했는데 정원군의 저택 역시 궁궐로 바꿔버린다. 이때는 경덕궁이라고 불렸다. 졸지에 집을 빼앗긴 정원군은 역모 혐의로 아들 중 한명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한 충격까지 겹치면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집도 빼앗긴 능양군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반정에 가담해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결국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흐른다는 것은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이렇게 애매하게 궁궐이 되었지만 경희궁은 조선 후기 많은 임금들의 사랑을 받는다. 원래 주인이었던 인조는 물론 영조와 정조가 머물렀다. 원래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사라지고, 덕수궁이 제 역할을 못하던 시절이라 창덕궁과 더불어서 당당하게 왕궁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창덕궁을 동궐이라고 부르는 것에 빗대서 서궐이라고 불렀다. 임금들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새로운 전각들이 들어섰고, 차츰 규모가 커지면서 궁궐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경희궁의 비극이 시작된다.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재들을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었고, 뒤이어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이곳에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경성중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이 와중에 경희궁의 전각들은 모두 없어지거나 통째로 팔려나갔다. 해방 후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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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덕수궁, 경희궁만 용 그림으로 바뀐 이유?

서울시에는 조선시대의 궁궐이 다섯 개가 있고, 각 궁궐에는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왕위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치르던 곳인 정전이 있다. 각 정전으로 들어서면 천장 중앙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자, 우선 황룡이 있는 정전으로 찾아가 보자. 조선시대 첫 궁인 경복궁 근정전은 태조3년(1394)에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불타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근정전 천장을 올려다보면 한가운데에 칠조룡으로 발톱이 일곱 개인 두 마리의 황룡이 있다. 근정전 천장에 칠조룡이 있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나와 중국에서는 오조룡은 왕을 상징하며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은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했다. 명나라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은 발톱 4개 밖에 쓸 수 없었지만 청나라가 들어선 뒤 은밀히 발톱 5개를 적용했다. 청일전쟁 이후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근정전 천장의 황룡 발톱을 7개로 다시 그렸다. 대한제국이 더 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뜻의 표현이자 대한제국의 존엄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황룡이 그려진 곳으로 덕수궁 중화전과 경희궁 숭정전이 있다. 중화전은 1902년 건립된 덕수궁의 정전이다. 그러나 1904년 함녕전에서 비롯된 큰 화재로 현재의 덕수궁 영역이 잿더미가 되면서 중화전은 옛 모습을 잃고, 지금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1906년 재건된다. 이곳에서는 당시의 궁핍한 재정상황과 더불어 나날이 쇠락해 가는 대한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지만 천장에는 다섯 개의 발톱이 있는 두 마리의 황룡이 있다. 경희궁 숭정전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의 규모는 약 23만1,405여m²(7만여 평)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2002년 숭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시민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