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 가옥 전경

집 주인에 따라 이야기도 한보따리 ‘백인제 가옥’

백인제 가옥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7) 백인제 가옥 한옥과 전통으로 가득 한 북촌에서도 백인제 가옥은 단연 눈에 띈다. 1913년에 지어진 이곳은 수백 평에 달하는 공간과 넓은 정원, 한옥 치고는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있다. 아울러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에 대한 많은 사연들이 남겨져있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안내소가 있는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계단 위에 백인제 가옥의 솟을 대문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붉은색 담장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보인다. 낯선 외부인에게 집안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솟을 대문 좌우의 행랑채에는 백인제 가옥의 첫 번째 주인인 한상룡과 두 번째 주인인 최선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소개되어 있다. 한성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친일파 한상룡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서 북촌 한복판에 거대한 주택을 지었지만 간도 대지진으로 인해 은행 사정이 악화되자 이 저택을 포기해야만 했다. 두 번째 주인인 최선익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44년 백인제 박사에게 저택을 넘겨준다. 3.1 만세 운동에 참가해서 의사 면허를 받지 못할 뻔 한 위기를 넘긴 백인제 박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의사로 활약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백인제 박사는 동생과 함께 납북당하고 만다. 홀로 남겨진 부인 최경진 여사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을 지켰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백인제 가옥은 다른 북촌의 한옥들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되었다. 이후 서울시가 매입하고 수리한 후 일반에 공개되었다. 지어진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벽돌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한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런 모습 역시 중요한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의 거실에는 고급스런 테이블과 의자, 유성기 같은 근대의 발명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개방되어 있지는 않지만 2층은 다다미방이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한상룡이 한옥을 지으면서 서구와 일본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관상감 관천대

서울에도 첨성대가 있다? 현대사옥 앞 돌기둥의 정체

관상감 관천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2) 관상감 관천대 안국역에서 내려서 창덕궁 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현대 계동사옥과 만나게 된다. 원래 이곳은 1906년 세워진 휘문고등학교 자리였다. 1978년, 휘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고 1983년에 현대 계동사옥이 지어진 것이다. 이곳은 현대 그룹의 역사와 함께 했으며, 나아가 경제 발전기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곳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 건물도 역사적인 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계동사옥은 아주 오래된 유물을 품고 있다. 주차장 한쪽에 자리 잡은 관상감의 관천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관상감은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관청으로 세조 때 설치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서운관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경주의 대표적인 유물이 첨성대이고 고려의 궁궐인 만월대에도 첨성대가 존재했다. 이렇듯 과거 왕조국가들은 천문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군주가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지배한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하늘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그곳의 현상을 잘 이해하고 설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일기예보가 없고, 오직 노인의 무릎에만 의존하던 시대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하늘에서 벌어진 현상을 파악하고 미리 예측하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신라와 고려는 궁궐 근처에 첨성대를 세워서 하늘을 관찰했다. 조선 역시 관천대를 만들고, 간의라는 천체관측 기구를 설치해서 별자리의 움직임과 일식 등의 현상을 살폈다. 세종대왕 때 경복궁 안에 대간의를 설치할 관천대를 만든다. 그리고 별도로 소간의를 설치할 관천대 두 개를 경복궁의 천추전과 광화방에 세운다. 궁궐이 아닌 광화방에 설치한 이유는 여기에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서운관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관천대의 모양은 간소하다. 큰 돌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에 제일 위는 돌로 난간을 둘렀다. 가로 세로 모두 3미터가 넘지 않고, 높이도 4미터 남짓이라 ...
딜쿠샤 현재 모습

종로 행촌동 붉은 벽돌집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고색창연한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딜쿠샤 모습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6) 딜쿠샤 월암 근린공원에서 서대문역 방향으로 쭉 가다보면 왼쪽으로 휘어진 골목길이 나온다. 그리고 골목길이 꺾어지자마자 2층 주택이 마치 터주 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빌라와 아파트 사이에서 고색창연한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이 집의 이름은 딜쿠샤(Dilkusha)로 힌두어로 이상향 혹은 기쁨을 뜻한다. 장독대로 사용되던 공간 안쪽에 딜쿠샤와 1923년이라는 숫자가 화강암에 새겨져있다. 이 저택의 주인은 앨버트 테일러로서 원래는 광산업과 무역업을 하던 사업가였다. 앨버트 테일러와 우리의 인연은 그의 아버지인 조지 테일러부터 시작된다. 금광 기술자였던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미국에 불하한 운산금광에서 일하기 위해 입국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앨버트 테일러 역시 아버지와 함께 금광에서 일을 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에게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이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남의 나라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그는 남의 나라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일본경찰이 찾아다니던 독립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의 병실에 숨겨둔 것을 우연찮게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동생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게 해서 전 세계에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일본이 3.1만세 운동을 일으킨 보복으로 군대를 동원해 제암리 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스코필드 목사와 더불어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한편, 조선 총독부에 엄중하게 항의했다. 덕분에 그는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딜쿠샤는 그런 앨버트 테일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다. 옥고를 치른 앨버트 테일러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1923년 지은 이 저택이 딜쿠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영국인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 때문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인 서양식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