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가을빛 닮은 건물이 매력적인 시청역 성당의 비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1)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이곳을 가는 가장 짧고도 빠른 길은 한때 부민관이었으며 지금은 서울시 의회로 사용 중인 건물의 앞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길 대신 코리아나 호텔 옆 골목으로 들어가서 조선일보 미술관 쪽으로 가는 길을 추천하고 싶다. 그 옆에 붉은 벽돌로 만든 성채 같은 건물이 나온다. 특이하게도 입구가 한옥으로 되어있는데 바로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편에 주황색 기와지붕을 한 긴 건물이 보인다. 바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으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등을 돌렸지만 의식과 교회의 건축 양식은 가톨릭과 유사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이 성당은 십자가 형태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곳이다. 1922년에 아서 딕슨의 설계에 따라 건축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설계도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의 상태로 남겨진다. 그러다가 1992년, 영국에서 설계도가 극적으로 발견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된다. 따라서 성당의 머릿돌에 나오는 완공연도는 1996년이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치솟은 첨탑 대신 하늘에 살짝 기댄 것 같은 지붕을 하얀 구름과 몹시 잘 어울리는 주황색 기와가 덥여있다. 분명 서양식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한옥의 처마와 지붕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개방이 된 성당 내부 역시 볼만하다. 가운데가 우뚝 솟은 공간에 서면 1,2층 양쪽의 스탠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과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탠드글라스는 마치 한옥의 창살을 닮아있다. 한낮에 가면 양쪽의 스탠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눈앞에서 교차하는 걸 볼 수 있다. 지금보다 더 종교적이었던 시대라면 충분히 신의 흔적으로 볼만하다. 운이 좋다면 2층에 있는...
경복궁 집옥재

고종은 궁궐 속 작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었을까?

경복궁 집옥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0) 경복궁 속 작은 도서관 ‘집옥재’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경복궁은 숨겨진 보물들이 많은 곳이다. 비록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지만 경회루만큼 아름다운 향원정과 을묘왜변의 비극이 서려있는 건청궁, 그리고 북쪽 끝에 자리 잡아서 늘 한적한 집옥재가 바로 그곳이다. 집옥재는 경복궁 안의 다른 전각들과는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이 간다. 옥을 모으는 곳이라는 뜻의 집옥재는 원래는 창덕궁의 함녕전 근처에 있다가 1891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고종의 거처가 경복궁으로 바뀌면서 함께 이사를 온 것이다. 건물은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지만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벽돌을 사용했고, 용마루에는 중국풍의 용 두 마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우측의 협길당은 전통적인 한옥 형태지만 좌측에 있는 팔우정 역시 유리창을 사용했다. 현판의 집옥재라는 글씨 역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적혀있다. 건물에 칠해진 단청은 궁궐임을 감안해도 굉장히 화려한 편인데 특히 내부의 지붕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천정 가운데에 팔각형으로 솟은 공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청나라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고종은 이곳을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보관했으며,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후원 가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골치 아픈 일에 시달렸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가장 큰 용도는 왕실의 도서관이었는데 서구의 각종 문물과 기술을 소개하는 책들을 비치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구화를 진행하려던 고종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집옥재는 19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벽돌과 유리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와 한옥이 만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옥은 지붕이 무겁기 때문...
돈의문박물관마을 한옥 골목

역사가 슬그머니 다가와 자기소개 하는 마을

돈의문박물관마을 한옥 골목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9) 돈의문 박물관 마을 내가 사랑하는 정동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길을 걷다 지치고 힘들 때 자연스럽게 들리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원래 주택가였으며, 과외방이었다. 그리고 연인들이 다정하게 음식을 먹는 스파게티 집과 직장 일에 지친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대성집 같은 곳이 있던 곳이다. 그것들이 자리 잡기 훨씬 전에는 임금이 지내던 경희궁의 끝자락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백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겨져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다 때려 부순 다음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박물관이라는 간판을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넓은 뜰과 마주친다. 그곳에 서면 이곳이 돈의문 박물관이 아니라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뜰 한복판에 서서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을 살펴보면 집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새로 지은 한옥들이 층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그 옆은 80년대 이어진 것 같은 건물이 있다. 그 아래쪽의 골목길로 들어서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기묘한 건물들도 있다. 건물을 증개축하면서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세월의 무게를 덕지덕지 않은 건물들이 남겨지면서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꾸며진 덕분에 ‘무덤’이 아니라 ‘역사’가 된 것이다. 돈의문 전시관 돈의문 박물관 마을 한쪽에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는 물론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이 있던 시절을 조명했는데 자연스럽게 ‘아지오’라고 불렸던 스파게티 집을 활용한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근대와 현대의 모습이 남겨져있다. 2층에는 미니어처와 그림으로 만들어진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볼 수 있다. 2층에 가면 옆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로 넘어간다. 기존의 건물들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역사가 박제된 것이...
조선시대 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를 발행했던 기별청

“아무 기별이 없느냐?”의 유래가 된 경복궁 ‘기별청’

조선시대 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를 발행했던 기별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8) 경복궁 '기별청' 드넓은 광화문을 들어가서 흥례문까지 지나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은 근정전을 향해 직진하지만 나는 살짝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서 유화문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유화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전각 앞에 선다. 두 칸짜리 작은 전각 위에는 아주 작은 현판이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기별청’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기별'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를 발행했던 곳으로 조보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기별지다. 유화문 옆에 있는 기별청은 기별지가 발행되던 곳이다. 기별지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발행한 관보였다. 따라서 기별청이 궁궐 안에 자리 잡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한 기별지는 매일 아침에 각 관청에서 기별청으로 보낸 기별서리들이 베껴서 가져갔다. 기별서리들이 베껴 쓰기 위해 흘려 쓴 글씨체를 기별체라고 부르는데 빠르게 적어야했기 때문에 보통 한문과는 달랐다. 지방의 경우는 기별군사라는 별도의 전령을 통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보냈다. 기별지에는 다양한 소식들이 실렸는데 주로 임금이 받은 상소문에 대한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 조정의 인사이동 소식과 과거 시험 날짜 등이 적혀있다. 정보의 전달이 극히 제한되었던 조선시대에 기별지는 조정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매체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별지를 손에 넣고자 했다. 선조 때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이 기별지를 활자로 인쇄해서 판매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기별지를 손에 넣으면서 편리하게 여겼지만 딱 한명, 선조가 불편하게 여겼다. 덕분에 기별지를 인쇄해서 판매하던 관련자들이 대거 붙잡혀서 처벌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정보를 통제하고 ...
윤동주 시인의 언덕

가을에 찾아간 이곳에 시인의 바람이 불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7) 윤동주 문학관 나는 윤동주 문학관 앞에서 종종 이곳에는 시인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동행한 사람들이 시인의 바람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때 마다 제대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쓴 웃음을 짓거나 우물거린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시인의 바람이 자하문 고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 불고 있다고 말이다. 이곳에 윤동주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자하문을 품고 있는 인왕산 자락이 윤동주가 하숙을 하던 수성동 역시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 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증조부 때 북간도로 건너갔다가 명동촌으로 옮겨져 정착하면서 그곳이 고향이 된 것이다. 용정으로 이주해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후 일본 유학을 떠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서 1945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썼던 원고들은 후배인 정병욱이 자신의 집 마루 밑에 숨겨놨다가 1948년 유고시집인 으로 나오게 된다.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은 그의 시가 주는 순백의 고결한 느낌처럼 새하얀 색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조금 이상한데 폐쇄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고쳐서 2012년 문을 연 것이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애걔~’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가운데 우물 모형이 있는 곳에 서서 둘러보면 전부 다 보일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동주 문학관은 그곳이 전부가 아니다.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영상전시관도 있고, 자그마한 노천카페가 있는 지붕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시인의 언덕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오르면 인왕산 너머로 펼쳐진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불어오는 도시에 상처...
홍난파 가옥

초가을 홍난파 가옥에서 만난 ‘고향의 봄’

홍난파 가옥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 월암 근린공원과 홍난파 가옥 사람들은 길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이라는 선입견에 걸음을 멈추곤 한다. 나에게는 정동의 끝자락에 있는 강북삼성병원의 뒤편이 그러했다. 분명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지만 오르막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강북삼성 병원에 김구 선생님이 계셨던 경교장이 있고, 그 맞은편에 10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역사문화 마을인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용기를 내서 장벽을 넘는 전사의 기분으로 오르막길을 오르자 잘 조성된 화단이 있는 길과 새로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들이 보였다.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편에 한양성곽이 보인다. 강북삼성병원 사거리에 있는 돈의문에서부터 인왕산까지 이어지는 성곽인데 새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래쪽에는 조선시대 축성한 부분이 남아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시대 쌓은 것도 시대별로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 때 처음 쌓았을 때는 자연석을 그대로 가져와서 약간만 다듬은 상태로 쌓았고, 세종대왕 시절에는 모서리를 다듬어서 쌓았다. 마지막으로 순조 때 쌓은 부분은 마치 벽돌처럼 크기를 일정하게 다듬은 돌들을 올렸다. 성곽을 따라 월암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잔디밭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 운동기구과 놀이기구들이 있다. 그리고 성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도 보인다. 무엇보다 언덕에 만들어져 있어서 주변 전망이 잘 보인다는 점도 이곳에 발길을 머물게 했다. 어니스트 베델의 집터가 있는 월암 근린공원 월암 근린공원은 단순히 한양 성곽을 따라 지어진 쉼터가 아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지나간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산책로 중간 즈음에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하면서 일제 침략의 부당함에 저항했던 영국인 베델의 집터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있다. 배설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그는 일본의 모함 때문에 재판을...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광장 지하에 숨겨진 ‘불멸의 영웅 이순신’ 이야기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 광화문광장 지하 나는 어릴 때 악당 로봇이 나타나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 지붕이 열리고 태권V가 출동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2011년에 국회의사당에서 태권V가 출동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태권V만큼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아마 1979년에 나온 만화영화인 우주전함 거북선이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우연찮게 광화문 지하에서 거북선을 발견했을 때 정말로 광화문광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을까 아주 잠깐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광화문광장 지하에 거북선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루에 수 만대의 차량과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광화문 광장의 지하에 뭔가 있을 것을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 지하에 거북선이 자리 잡게 된 것은 광화문 광장의 탄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 2008년 공사에 착공하면서 필요가 없어진 지하공간에 세종대왕의 기념공간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뒤이어 이순신 장군에 관한 기념공간도 조성되면서 거북선이 들어선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 중이며 이곳에서는 ‘세종이야기’, ‘충무공이야기’라고 이 공간을 부른다.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면서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지하에 기념 공간이 들어선 것이다. 지하 전시관은 잘 조성돼 있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면 난중일기를 비롯해서 무과에 급제하고 받은 교지, 당시 사용된 무기와 깃발, 연표로 만든 일대기를 비롯해서 판옥선과 거북선에 관한 그림과 설명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공간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4D 체험관을 비롯해서 홀로그램을 이용한 영상이나 게임 같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전시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는 점은 낯설고 오래된 이순신이라는 이미지를 가깝게 만들어준다. 거북선의 격군이 되어서 노를 저으면서 일본군의 함선을 추...
종묘 가을 풍경

시간조차 천천히 흐르는 ‘서순라길’을 아시나요?

종묘 가을 풍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 서순라길 이 길을 바라보면 스팅이 부른 영화 레옹의 주제가인 ‘Shape of my heart’가 떠오른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기타리스트 도미닉 밀러의 기타 연주가 일품인 이 노래는 인생을 카드에 비유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음악과 이번에 소개할 ‘서순라길’, 개인적으로는 종묘 옆길이라고 부르는 골목길은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Shape of my heart’가 인생을 얘기한 것처럼 서순라길은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순라길 위치도 서순라길은 창덕궁의 남쪽 종묘 옆에 난 골목길로 권농동과 봉익동을 끼고 있다. 이 길은 종묘 덕분에 탄생했다. 서순라길로 불리는 이유도 종묘의 서쪽길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만들어지고 바로 세워진 종묘는 죽은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따라서 사직단과 더불어 신성불가침의 공간이자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500년의 시간 동안 역사를 품고 지내오던 종묘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훼손된다. 대표적인 것이 북부횡단도로를 개통한다는 이유로 종묘와 창경궁을 절단해버린 것이다. 현재 율곡로라고 불리는 이 길은 지하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런 역사 덕분에 서순라길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서순라길이 정비된 것은 1995년이었다. 생각해보면 신성한 종묘의 담장을 따라 길을 만든다는 것도 조선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종묘 앞 공원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는 노인들과 저렴한 가격에 술과 안주를 파는 선술집과 이발소, 귀금속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서순라길로 접어드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고요함이 찾아온다. 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서울은 어느 곳이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 덕분에 외국에서는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 속에서 구현되던 사이버 펑크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디나 사람과 차들로 가득 할 것 같은 서울 한복판에 ...
지난 8월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

미리 걸어본 ‘고종의 길’…결코 짧지 않은 120미터

지난 8월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 고종의 길 ‘길’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 등이 다닐 수 있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뜻한다. 길을 통해 사람들과 상품들이 오가면서 새로운 문물이 전파된다. 그 밖에도 길은 누가 언제 걸었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따라서 기억되거나 되살아나기도 한다. 서울시가 8월에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이 그렇다. 이 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걸었던 길이다. 그리고 고종이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정세와 일본의 야심 때문이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종은 개인적으로도 큰 아픔을 겪었는데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부인인 명성왕후를 시해한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다음해인 1896년, 경복궁을 탈출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아관파천이라고 불린다. 1년의 피신 기간이 끝나고 고종은 환궁을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하지만 고종이 돌아간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당시에는 경운궁으로 불린 덕수궁이었다. 고종에게 경복궁은 너무 커서 지키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내가 피살되었다는 고통의 장소였다. 반면 덕수궁은 주변인 정동 일대에 외국 공사관과 학교, 교회 등이 밀집해 있어서 일본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덕수궁과 정동은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탑만 남아 있는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탑 밖에 남지 않은 구 러시아 공사관은 덕수궁의 선원전과 붙어있었고, 작은 길이 중간에 있었다. 선원전은 임금의 어전과 신주를 보관하던 곳으로 지금의 신문로를 가로질러 경희궁과 연결된 홍교로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길 중간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만 남은 러시아 공사관의 본관 뒤편에는 비밀 통로가 난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아마 고...
서울시립미술관

‘달달한 낭만’과 ‘격동의 역사’가 공존하는 그곳

서울시립미술관 변화무쌍한 도시 서울. 하루하루 빠르게 모습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나 서울엔 여전히 과거의 기억들을 간직한 곳이 구석구석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엔 그냥 받아들이면 안 되는,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봐야만 하는 부분들이 꽤 있습니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며, 그 첫 번째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 덕수궁 돌담길과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 옆에 있는 돌담길은 데이트 할 장소가 마땅찮던 60~70년대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하지만 연인이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속설 아닌 속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덕수궁 돌담길이 영국 대사관에 의해 중간에 끊겼기 때문에 연인들의 인연도 끊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밖에도 이혼 수속을 덕수궁 옆에 있는 가정법원을 방문해야 했던 것도 속설이 퍼진 이유로 꼽힌다. 1966년 진송남이라는 가수가 부른 이라는 노래에도 둘이 걷다가 홀로 걷게 되었다는 슬픈 가사가 나온다. 아름답고 걷기 좋은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들의 이별코스로 뒤바꿔놓은 가정법원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숲으로 둘러싸인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회색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출입문과 길쭉한 창문을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서울시립미술관이 되기 이전에 가정법원과 대법원이었고, 그 이전 일제강점기에는 악명 높은 경성재판소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의 의해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 받았다. 광복 이후에도 용도에 맞게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탈바꿈해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시절의 흔적은 건물 외관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