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는 ‘장의사지 당간지주’

서울 초등학교 운동장 안에 보물이 있다?!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는 ‘장의사지 당간지주’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5) 장의사지 당간지주 자하문을 넘어가면 인왕산 자락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비록 주택과 도로 때문에 많이 가려졌지만 야트막한 산자락과 홍제천이 따라 흐르는 주변 풍경은 조선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래서 백사실 계곡이 있고, 대원군이 탐을 낸 석파정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검정을 지나 신영동 삼거리에 세검정초등학교가 있다. 1948년 개교해서 70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킨 이곳에는 보물 제235호인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운동장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초등학교에 문화재가 있는 경우는 보물로 지정된 석등과 5층 석탑이 있는 군산 발산초등학교와 더불어서 유이하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발산초등학교에 있는 석등이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다 하나 앞선 보물 제234호라는 점이다.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에 만들어놓은 깃대로서 짐대라고도 부른다. 보통 사찰에서 법회가 열릴 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탱화를 높이 매달아놓는데 그걸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당간지주였다. 보통은 돌기둥 두 개를 나란히 세우고 위 아래로 구멍을 뚫어놓은 형태로 남아있는데 장의사 당간지주는 위쪽에 하나만 뚫려있다. 돌기둥 사이에 탱화를 매단 나무 기둥을 세우고 넘어지지 않도록 위쪽 구멍에 빗장처럼 나무를 꽂아서 고정시키는 방식을 쓴다. 당간지주가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당간의 높이가 3.6미터나 되기 때문에 사찰의 규모도 적지 않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장의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태종무열왕 때인 659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종무열왕의 꿈에 백제와 싸우다 전사한 화랑인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세력이 맞물린 전쟁터였다는 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장의사는 신라가 사라진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간다. 고려 때는 임금이 행차해서 불공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경

100년 전 근대 교육 발자취를 따라 걷는 정동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3)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경성재판소를 활용 중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오른쪽 주차장 입구 쪽으로 나오면 길가에 높고 번쩍거리는 건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작고 아담한 건물 하나를 굽어보고 있다. 빌딩의 철과 유리에 대비되는 돌과 벽돌로 만든 이 건물의 정체는 바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가정집 벽을 허물고 만든 교실에 2명의 학생이 입학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을 하사했다.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을 서양의 언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가정집에서 서양식 단층 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학생들이 계속 늘어나서 공간이 부족해졌다. 결국 1916년에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된 건물을 새로 짓게 된다. 그러면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소월을 비롯해서 한글학자 주시경,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등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이곳에서 지식을 쌓고 세상으로 나아갔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 배재학당을 승계한 배재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1984년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현재는 배재학당의 동관만이 남았고, 역사박물관으로 변신한 상태다. 작은 종이 매달려있는 현관을 지나서 내부로 들어가면 배재학당의 역사와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울러 예전 교실을 그대로 복원해놨고 한쪽 구석에는 당시 입었던 교복과 교모가 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썼던 피아노와 타자기, 인쇄기 등을 볼 수 있다. 규모는 비록 크지 않지만 배재학당이 존재했던 시기의 역사를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학교 건물답게 외관은 단출하고 밋밋한 편이라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의 화려한 현관과 위압적인 외관과 여러모로 대비가 된다. 이 건물의 특징을 꼽자면 ...
환구단

빌딩숲 속에 가리어진 대한제국 ‘황제의 품격’

환구단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1) 환구단 서울광장에서 웨스틴조선호텔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큼지막한 대문이 나온다. 굳게 닫혀있는 그 문의 옆으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나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팔각형의 탑처럼 생긴 3층 한옥 건물과 중국풍의 문들이 보인다. 별 생각 없이 보면 호텔의 정원 장식쯤으로 보이고, 실제로 일본은 그렇게 보이기를 바랐다. 이곳은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내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이 추진한 야심찬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1년간의 피난 아닌 피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고종은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을 허물고 그곳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것은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다름 아닌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 때 간혹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는 했다. 하지만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운 사대부들의 반대에 세조 이후 더 이상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환구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기단 위에 원형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면서 환구단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1899년에는 오늘날 남아있는 환구단을 짓고, 각종 신들의 신위판을 모셔놓는다. 그리고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 즉 돌로 조각한 북을 가져다놓는다. 이렇게 신성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던 환구단이 사라지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 병합이었다. 대한제국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일본은 이곳에 호텔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환구단을 허물어버린다. 그리고 황궁우는 그대로 나눴는데 호텔 투숙객들의 눈요기 거리로 삼기 위해서였다. 환구단 난간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 환구단은 대단히 정교하게 지어졌는데 특히 기단의 난간에 세워진 해태는 마치 살아있는 ...
경희궁 전경

조선 5대 궁궐? 5초 만에 안 떠오르는 ‘비운의 궁’

경희궁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0) 경희궁 강북삼성병원에서 광화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경희궁이 있다. 하지만 경찰박물관과 서울 역사박물관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가버린다. 인지도로만 따져보자면 경희대나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보다도 낮을 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임금들의 사랑을 받았던 경희궁이 이렇게 안구에 습기가 찰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역사가 남긴 상처 덕분이다. 원래 이곳은 궁궐이 아니라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기가 흐른다는 얘기가 돌자 임금이었던 광해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광해군은 궁궐 덕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궁궐의 신축에 집중했는데 정원군의 저택 역시 궁궐로 바꿔버린다. 이때는 경덕궁이라고 불렸다. 졸지에 집을 빼앗긴 정원군은 역모 혐의로 아들 중 한명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한 충격까지 겹치면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집도 빼앗긴 능양군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반정에 가담해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결국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흐른다는 것은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이렇게 애매하게 궁궐이 되었지만 경희궁은 조선 후기 많은 임금들의 사랑을 받는다. 원래 주인이었던 인조는 물론 영조와 정조가 머물렀다. 원래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사라지고, 덕수궁이 제 역할을 못하던 시절이라 창덕궁과 더불어서 당당하게 왕궁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창덕궁을 동궐이라고 부르는 것에 빗대서 서궐이라고 불렀다. 임금들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새로운 전각들이 들어섰고, 차츰 규모가 커지면서 궁궐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경희궁의 비극이 시작된다.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재들을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었고, 뒤이어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이곳에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경성중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이 와중에 경희궁의 전각들은 모두 없어지거나 통째로 팔려나갔다. 해방 후에도 ...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한국방송통신대 역사기록관)

뜻밖의 발견으로 밝혀진 ‘방통대 역사기록관’의 진실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한국방송통신대 역사기록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9)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대학로를 걷다보면 낯설고 이질적인 2층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이 건물의 정체는 조선총독부 산하의 중앙시험소다. 이곳에서는 각종 공업 관련 실험 및 연구가 진행되었다. 방송통신대 본부 안에 있는 이 건물은 몸통이 하늘색이고 고풍스러운 첨탑까지 있어서 눈에 확 들어온다. 거기다 먼발치서 보면 벽돌이나 돌로 쌓은 것처럼 눈속임을 했지만 가까이 가보면 나무로 만든 목조건물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가까이서 보면 어떤 식으로 속임수를 썼는지 알 수 있는데 널빤지를 마치 잘 다듬은 돌을 쌓아놓은 것처럼 붙여놨고, 지붕이 있는 출입구인 포치(porch)에 붙은 장식과 2층 창틀 사이의 벽기둥의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서 석조 건물처럼 만들어 놨다. 거기다 양쪽 끝에 있는 커다란 반원형 창틀과 위쪽의 난간 역시 나무로 만들었으면서 영락없이 석조 건축 양식을 빌려왔다. 지금은 하늘색으로 칠해놓은 탓에 비교적 쉽게 간파할 수 있지만 만약 회색으로 칠해놨다면 대충 봐서는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속임수를 썼을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급격한 서구화를 겪는다. 그러면서 건축물 역시 서구의 것을 흉내 내서 짓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 건축이 목조인데 반해서 서구의 건축물들은 벽돌과 돌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일본의 건축가들은 재료는 목조를 쓰지만 외형은 서구의 석조 건축물들을 흉내 내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의양풍(擬洋風) 혹은 화양절충(和洋折衷)이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고스란히 대한제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버텨서 우리 곁에 남았다. 그 백 년이 살아남기에 난이도가 높은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곳은 한 때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에 만들어진 공업전습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12년에 공업전습소가 있던 자리...
석파정은 서울미술관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탐낸 한양 최고의 별장 ‘석파정’

석파정은 서울미술관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7) 석파정 어머니는 자하문 너머를 자두 밭으로 기억한다. 회사 동료들끼리 놀러가서 자두를 실컷 먹었던 어머니에게 그곳은 서울 밖의 변두리이자 고향을 닮은 시골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자하문 밖은 권력가들의 별천지였다. 백사실 계곡 안에 있던 별서도 그렇고 장의사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세검정 초등학교는 연산군의 명령으로 꽃밭으로 조성되었던 곳이다. 세검정 정자 역시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한양 바로 바깥이라는 지리적 장점과 함께 인왕산과 북악산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자하문 밖에는 권력가들의 별서들이 자리 잡았다. 권력가들의 사랑을 받던 곳이라 그만큼 사연이 깊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석파정이다. 석파정의 원래 주인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으로 세도정치의 핵심인 안동김씨의 일원이었다. 그가 주인이었던 시절에는 석파정이라는 말 대신 삼계동 별서로 불렸다. 그 이유는 별서가 있는 곳 바위에 삼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글씨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새겨졌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석파정 유수성중관풍루(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 조선시대 14살의 어린 나이에 금강산을 올랐던 김금원이 한양에 들렸을 때 백사실 계곡을 가는 길에 삼계동 별서를 지나친 적이 있었다. 김금원은 훗날 자신이 쓴 호동서락기에 작은 서재가 숲 사이로 보이는데 무척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평을 남겼다. 이후, 고종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이 별장을 무척이나 탐낸다. 하지만 김흥근이 끝끝내 판매하는 걸 거절하자 치사하게도 아들을 이용한다. 고종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게 한 것이다. 그러자 김흥근은 신하가 임금이 쓰던 곳을 쓸 수 없다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곳을 넘겨받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석파정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얼마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외관

남서울미술관, 예사롭지 않은 외관 속에 얽힌 사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외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6) 남서울미술관 이곳의 정식 명칭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생활미술관이지만 보통은 남서울미술관이라고 부른다. 사실 나도 정식 명칭은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서울 남쪽 지역의 분관이라는 뜻으로 사당역 6번 출구에서 100미터 정도 거리에 있으며, 2004년 처음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게 서울 재발견 코너에 왜 소개되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을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면 남서울 미술관은 본래 사당역 근처에 있지 않았고, 미술관도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서구화를 추진하면서 다양한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 중 한 곳이 바로 벨기에였다. 1900년, 벨기에 외교관 레온 방카르가 한성에 들어오면서 양국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1902년에 접어들면서 레온 방카르는 현재의 회현동에 지상 2층, 지하 1층 크기의 영사관을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공한다. 영사관 건물은 당시 유행하던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붉은 벽돌로 쌓아올렸는데 중간 중간에 화강암을 띠처럼 둘렀다. 2층 치고는 꽤 높은 편이고, 채광 때문인지 창문도 꽤 긴 편이다. 양쪽 측면에 기둥으로 지탱된 발코니 공간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1층과 2층의 기둥머리 모양이 틀리다는 것이다. 2층은 덕수궁의 석조전에서 볼 수 있는 이오니아식의 양머리 형태이고, 1층은 간소한 형태의 도리아식 기둥머리를 하고 있다. 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주요한 특징인 좌우 대칭에 맞춰서 한 가운데 정문 옆에 나란히 창문이 하나씩 있고, 그 옆의 발코니 공간을 받치는 기둥 역시 숫자와 위치가 똑같다는 점을 비춰보면 다소 의외다. 하지만 1층과 2층의 창틀도 조금 다른 점을 감안하면 2층을 다소 볼륨감 있게 보이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대리석이 깔린 내부는 미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바뀌어 있지만 최소한으로 그쳤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부 역시 1층과 ...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전통문화공간 '무계원'

종로 뒷골목 100년 전 세월과 풍류를 따라 걷다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전통문화공간 '무계원'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5) 무계원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분해가 조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둥과 서까래에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끼우는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 한옥의 특징 때문에 처음 만들어진 자리와 다른 곳에 위치한 전통 건축물들이 몇 개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 있는 양이재는 원래 덕수궁이 경운궁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궁 안에 있던 것이고, 경희궁의 흥화문은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2년, 일본 사찰인 박문사로 옮겨졌다가 1994년에 와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무계원 역시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하문을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 뒤편의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무계원이 나온다. 담장이 야트막하건 아예 없어서 지나가는 누구나 환영한다는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무계암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무게는 만만치 않다. 무계원의 이름은 바로 무계정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건물들이 잔뜩 차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당연히 텅 비어 있으니 무계원 즈음이면 인왕산과 자하문이 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안평대군의 사저인 무계정사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선비와 예술가들과 교류를 했다고 전해진다. 무계원의 한옥들은 오진암의 것을 가져와서 다시 재조립한 것이다. 1910년 지어진 오진암은 전형적인 근대 도시한옥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곳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낸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에는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요정으로 손꼽히기도 했던 곳이다. 2010년 관광호텔 신축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울시와 종로구청에서 협의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서 옮기도록 한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무계원은 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자 인문학 세미나와 강연, 전시회 등이 열리기도 한다....
사직단 모습

많이 들어본 종묘사직, 종묘는 아는데 사직은 모른다?

사직단 모습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3) 사직단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듣는 대사 TOP 3는 아마 ‘통촉하여주시옵소서’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목숨을 걸고 종묘나 사직을 보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역사적인 유적지로 남아있다. 마지막 대사에 등장하는 종묘는 탑골공원 옆에 있어서 정말 많이 가봤다. 점심 먹고 가봤고, 저녁 먹기 전에 가봤고, 평일에 가봤고, 주말에 가봤고, 명절에도 가봤다. 하지만 사직단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종묘는 뭔가 행사도 많이 열리고 언급이 많이 되면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반면, 사직단은 대사를 통해서 들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르게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뜻한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제후국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래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만든 것이다. 어쨌든 사직단은 조선시대 내내 선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와 더불어 왕실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종종 국가의 운명을 드러내는 장소로 언급되었다. 사극에서 신하들이 목청 높여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라는 외치는 것은 곧 국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사직단 대문 사직동 주민 센터와 접해있는 사직단에 도착하면 붉은색으로 칠해진 사직단 대문과 만나게 된다. 보물 제177호인 이곳은 원래 더 앞에 있었지만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현재의 위치로 밀려났다. 안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으로 둘러싸인 담장이 보인다.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문은 각각 동신문과 서신문, 남신문과 북신문으로 불린다. 북신문이 가장 큰데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역시 야트막한 담장과 홍살문들이 보이고 그 안...
칠궁 전경

왕비는 아니지만 조선의 왕을 낳은 일곱 후궁 이야기

칠궁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2) 칠궁 칠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일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시간에 맞춰서 무궁화동산에 있는 칠궁 안내소로 가야 한다.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 도로를 건너면 비로소 칠궁에 들어갈 수 있다. 관람객들과 함께 경찰과 경호원이 동행한다.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이유는 칠궁의 담장 너머에 청와대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고, 지금도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칠궁은 조선시대 임금을 낳은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비록 임금을 낳았지만 왕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과 함께 종묘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별도로 세운 사당에 모셔야만 했다. 원래는 이곳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만 존재했다. 그러다가 고종과 순종 때 다른 사당들이 이곳에 옮겨왔고, 1929년에 덕안궁이 이곳에 오면서 칠궁이 되었다. 이곳에 모셔진 사당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를 모신 저경궁과 남편인 숙종의 손에 죽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사당인 대빈궁,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 효장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를 모신 연호궁,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를 모신 선희궁, 정조의 아들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를 모신 덕안궁으로 모두 일곱 개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칠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사당은 모두 다섯 채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육상궁과 연호궁, 선희궁과 경우궁이 각각 한 사당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3개의 사당 중 가운데가 희빈 장씨의 사당 대빈궁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희빈 장씨를 모신 대빈궁이다. 다른 사당의 기둥들이 모두 사각형인데 비해 대빈궁의 기둥만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후궁들 중에 유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