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인원

도심 속 색다른 쉼터가 되어주는 ‘영휘원과 숭인원’

숭인원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6) 영휘원과 숭인원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려서 영휘원 사거리를 지나면 어느 순간, 길옆의 풍경이 변한다. 간판 대신 돌담길이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면 주차장을 겸한 영휘원과 숭인원의 출입문이 나온다. 소액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안쪽으로는 신과 왕이 걷는 길인 신도와 어도가 곧게 뻗어있고, 그 끝에는 ‘丁’자형 한옥인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펼쳐져있는데 그 위에는 석물이나 망주석 같은 것들이 얼핏 보인다. 정자각의 오른편에는 비각이 세워져있다. 조선시대 왕들이 묻혀있는 왕릉은 대개 이런 형태를 띄고 있다.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 정자각과 무덤의 거리가 좀 떨어져있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영휘원과 숭인원에는 왕들이 묻혀있지 않다. 영휘원은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 보통 엄상궁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묻혀있다. 예전에 갔던 칠궁에서 그녀의 신주가 모셔져있는 덕안궁을 본 기억이 있어서 새삼 반가웠다. 입구 쪽에 있는 것은 영휘원이 아니라 숭인원이었다. 이곳에 묻힌 사람은 태어난 지 9개월 밖에 안 된 아기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순헌황귀비 엄씨의 아들인 의민황태자, 우리에게는 영친왕 이은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의 첫 번째 아들인 이진의 무덤이다. 일본으로 반 강제로 유학을 간 영친왕은 그곳에서 일본 귀족의 딸인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해서 첫 아들인 이진을 얻는다. 하지만 1922년, 조선으로 돌아온 부모를 따라 건너왔다가 1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독살 당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비록 걸음마도 제대로 못 뗀 아이였지만 왕족이었기 때문에 그에 걸 맞는 무덤이 만들어졌다.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작별했다는 사연을 알고 나서 그런지 다른 왕릉들보다 더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영휘원 안쪽에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묻혀있는 영휘원이 있다. 숭인...
우정총국

대한제국 우푯값은? 종로 작은 건물에 담긴 우정의 역사

우정총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5) 우정총국 종로는 묘한 곳이다. 종각역을 기준으로 광화문과 종로 방향은 비록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번화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반면,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걸으면 주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조계사 때문인지 몰라도 농협은행 종로지점을 지나가면 고즈넉한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도심치고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계사를 지나면 길옆에 한옥 한 채가 작은 광장을 마당삼아 서 있는 게 보인다. 붉은 색 단청이 칠해진 다섯 칸짜리 팔작지붕을 한 평범해 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서는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마당 한쪽에는 이곳이 문화재로 보호받는 우정총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하얀색 입간판이 서 있다. 이곳을 오기 위해 종각역에서부터 걸었던 도로의 이름도 우정국로다. 근대의 문물 중 하나인 우편제도는 조선인들에게 신기하고 편리하게 받아들여졌다. 우표만 붙여서 우체부에게 가져다주면 원하는 곳까지 전달해준다는 시스템은 심부름꾼을 따로 쓰거나 보부상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전달해야만 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받아들였다. 개화를 추진하던 고종은 조선에도 이 편리한 우편제도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우정총국을 설립한다. 그리고 우정총판으로 개화파의 핵심인물인 홍영식을 임명한다. 그리고 갑신년인 1884년 12월, 드디어 우정총국이 문을 연다. 하지만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는 피바다로 변하고 만다. 홍영식이 가담한 개화파가 연회에 참석한 외척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창덕궁으로 가서 고종과 명성왕후에게 변란이 발생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때마침 들려오는 폭발음에 놀란 두 사람은 김옥균의 말대로 경우궁으로 옮긴다. 갑신정변의 초반은 성공적이었지만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3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으로 간신히 피해서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홍영식은 끝까지 고종의 곁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갑신정변의 주 무대가 된 우정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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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 공원 속 오래된 일본식 가옥의 정체는?

부엉이 근린공원 일본군 관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4) 부엉이 근린공원 일본군 관사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는 ‘상전벽해’라는 속담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쓰레기 매립지인 난지도였던 이곳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를 치를 축구장이 들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방송국과 영화사, IT 기업들은 물론 한국영상자료원도 입주했으며, 아파트 단지와 공원도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 상암월드컵파크 10단지 아파트 옆 부엉이 근린공원. 아파트 단지에 있는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가옥 두 채가 있다. 콘크리트와 철근, 유리로 지어진 주변 건물들과는 달리 나무와 기와로 만들어졌는데 출입문 부분의 지붕이 툭 튀어나온 것이 눈에 띈다. 궁금증은 출입구 옆에 있는 안내판으로 풀 수 있다. 공원에 있는 두 채의 목조 가옥들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상암 2택지개발 지구에 있던 6채의 가옥들 중 일부다. 1930년대 일본이 수색역 인근에 세운 병영에 있던 것으로 장교용 관사들을 이곳에 옮겨오면서 전시장으로 꾸민 것이다. 두 채 모두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특징을 보인다. 암키와와 수키와가 일체화된 걸침기와가 지붕을 덮었고, 널빤지를 길게 옆으로 붙여서 벽을 만들었다. 창문은 약간 돌출된 형태로 위쪽에 비를 막기 위해 작은 차양이 붙어있다. 앞쪽에 있는 762번지 관사는 위관급 장교 관사, 소위와 중위가 사용한 것으로,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다른 한 채는 728번지 관사는 대위급 장교가 사용하는 관사였다. 올라가는 길에는 관사 단지에 있던 방공호 입구를 재현해놓은 것도 보인다. 길 옆에는 728번지 관사의 지붕구조가 전시되어 있다. 흙과 잡목을 올려서 무거운 한옥의 지붕과는 다른 일본식 주택 지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들보 위에 짧은 기둥인 동자주를 세워서 마룻대와 지붕을 받치도록 되어 있는데 한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지붕이 가볍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72...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가옥 전경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니 고즈넉한 옛집이 눈 앞에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가옥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2) 간송옛집 간송 전형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맞서 우리의 문화재를 지킨 인물이다. 막대한 재산을 써서 하마터면 일본에 빼앗길 뻔했던 수많은 문화재들을 지켜냈다. 그가 지켜낸 문화재들은 간송미술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도봉구 방학동에는 이런 간송 전형필의 흔적이 남아있는 ‘간송옛집’이 보존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와 학교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조금 걸으면 간송옛집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잘 가꿔진 화단과 야트막한 담장 너머에는 사랑채처럼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있다. 이곳은 간송 전형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전명기가 인근의 농장과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의 농지에서 얻은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대략 120여 년 전에 지어진 한옥이라 유리를 사용하는 등 근대와 접해있는 도시형 한옥이다. 이곳에는 옥정연재(玉井研齋)라는 이름의 현판이 붙어있는데 ‘우물에서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뜰 한쪽에는 옥정이라는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있다. 아버지와 연관이 있던 이곳에 간송옛집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다소 슬픈 사연이 깃들어있다. 종로에 있던 간송 전형필의 생가가 철거되고 거기서 나온 자재를 가지고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던 이곳을 수리해서 간송 전형필과 아버지 전명기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현재의 형태로 보수를 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되어 보존 중이다. 간송옛집 밤 풍경 일상의 장소에서 몇 발자국 살짝 벗어난 장소에서 만난 간송옛집은 고즈넉했다. 내부에서 음악회나 전시회가 종종 열리는 것 같았지만 평소에는 그냥 나 같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만 간간히 도달하는 것 같았다. 집 자체는 굉장히 작아서 잠깐 돌아볼 수 있다. 뒷문으로 나가면 궁궐에서나 볼 법한 벽돌로 만든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선농단

농사에서 음식까지 생각보다 많은 ‘설(說)’이 있는 곳

선농단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1) 선농단 뽀얀 국물을 자랑하는 설렁탕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음식이다. 이 설렁탕의 어원에 관해서 몇 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몽골로 고기를 물에 넣고 끓인 음식인 ‘술루’에서 비롯되어서 술루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설, 고기와 뼈를 넣고 설렁설렁 끓였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선농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업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조선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신들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고 적전이라는 밭에서 소가 끄는 쟁기를 잡는 친경이라는 행사를 했다. 이 행사를 구경하러 온 백성들에게 친경에 쓰인 소를 잡아서 대접했고, 선농단의 이름을 따서 선농탕으로 불렸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말라는 우금령까지 내렸던 조선에서 대놓고 소를 잡아서 음식으로 대접했을 리 없다며 반대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쨌든 설렁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 모르는 선농단은 제기동역 근처에 있다. 1번 출구에서 나와서 야트막한 길로 이어지는 주택가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선농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사직단에서 한 번 겪어보고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충격이 덜하긴 했지만 선농단 역시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사직단처럼 사방에 홍살문이 있고, 가운데 돌을 두른 제단 하나가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1년에 한 번 임금이 직접 와서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전전에서 밭을 가는 행사를 한 이후 구경 온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 때 대접한 음식이 설렁탕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농사가 중요하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지내던 제사의 대가 끊긴 것은 1908년 순종 황제 때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훼손되었던 선농단은 놀이터 등으로 이용되다가 2009년부터 정비가 되었다. 현재는 흙과 잔디가 있어서 애완견들의 천국...
연산군 묘

연산군이 도봉구 방학동에 잠들게 된 사연

연산군 묘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0) 연산군 묘 조선을 통치한 27명의 임금들 중에 묘호가 없는 것은 연산군과 광해군 두 명 뿐이다. 묘호는 임금으로 지내다 죽은 이후에 붙기 때문에 반정으로 폐위된 두 사람에게는 묘호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다. 종묘에도 신주가 없다. 그나마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광해군과는 달리 연산군은 빼도 박도 못하는 폭군이었다. 그래서 연산군의 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게 서울에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사실 무덤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서울이 아니라 양주 해촌이었다. 나중에 서울로 편입되면서 도봉구 방학동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실 연산군은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지 두 달 만에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무덤은 강화도에 만들어진다. 그러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요청해서 지금의 자리로 이장된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다보면 오른편에 연산군 묘라는 표지판과 관리사무소가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면 야트막한 시루봉의 산자락에 있는 무덤들을 볼 수 있다. 제일 위에 곡장이 둘러진 무덤이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무덤이고, 중간에 하나 있는 것이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무덤이다. 그 아래 있는 두 쌍의 무덤은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것이다. 총 다섯 개의 무덤이 있는데 주변에 산책로가 있어서 무덤 가까이서 둘러볼 수 있다. 딸과 사위는 그렇다 쳐도 태종의 후궁이 중간에 끼어 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에 가깝다. 원래 이곳에는 의정궁주 조씨의 무덤만 있었다. 그녀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에게 제사를 모시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임영대군은 자신의 소유인 이곳에 무덤을 만든 것이다.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로 자신의 외가 소유인 이곳에 남편의 무덤을 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옆에 묻혔고, 딸과 사위까지 묻히게 되면서 원래 있던 의정...
백사실 계곡 입구에 자리한 현통사

봄맞이 역사 산책! 서울 속 명품 계곡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입구에 자리한 현통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9) 백사실 계곡 내 어머니에게 자하문 너머의 세검정은 자두 밭으로 기억된다. 오래전 기억이고, 분명 그곳에도 사람이 살았겠지만 어머니에게 세검정은 눈처럼 하얀 자두 꽃이 피는 자두 밭 천국이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이 일대는 한양과 가까우면서도 풍광이 아름다워서 임금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자주 놀러갔고, 별서들이 가득했다. 특히 백사 이항복의 별서가 있어서 백사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는 백사실 계곡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다. 서울이 팽창하고 개발되면서 세검정의 자두 밭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은 그대로 남았다. 세검정 우체국을 지나 현통사를 거쳐 처음 백사실 계곡에 접어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혜화동의 낙산도 조용하고, 우리 동네 뒷산도 조용하지만 백사실 계곡의 고요함은 차원이 달랐다. 등산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지리산 같은 큰 산에서나 느낄 수 있던 고즈넉함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이곳은 단순하게 조용한 곳이 아니라 깨끗하고 맑은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그래서 각종 새들과 개구리들은 물론 1급수에서만 사는 도롱뇽까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백사실 계곡으로 가는 코스는 여러 개가 있다. 하지만 산책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다녀오고 싶다면 세검정 우체국 뒤편으로 가서 현통사를 통해 부암동으로 가는 코스를 추천한다. 현통사를 지난 후에는 도롱뇽들이 서식하는 개울을 따라 이어지는 백사실 계곡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일단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미세먼지나 숨이 막히는 매연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도심 한복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해도 이상하지 않는 곳인데도 새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이곳에 함께 왔던 일행들 차와 사람들로 가득한 광화문 광장에서 4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는 곳이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누구나 마치 고향에 온 것 ...
1989년 복원한 ‘망원정’ 모습

핫한 동네 망원동에 숨겨진 정자, 이름이 두 개인 사연

1989년 복원한 ‘망원정’ 모습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8) 망원정 이곳을 처음 만난 것은 대략 17년 전쯤이었다. 이제 막 지어진 파주출판도시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던 나는 합정역에서 셔틀버스를 타야만 했다. 자리에 앉아서 잠을 청하기 전 이 정자를 봤다. 쉴 새 없이 차들이 오가는 강변북로 바로 옆에 정자 같은 걸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정자가 강변북로 보다 훨씬 전에 지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부끄러움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이 정자의 이름은 '망원정'으로 1424년에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이 지었다. 다음 해, 세종대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비가 내리는 걸 보고 기쁜 마음에 정자의 이름을 비가 와서 기쁘다는 뜻의 '희우정'으로 바꿨다. 기록에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을 살펴보러 나왔다고 하지만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내러 온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세종대왕은 인자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태풍과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빈번했다. 따라서 비가 내리는 걸 보고 정자의 이름을 바꿀 정도로 기뻐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희우정이라는 이름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면서 망원정으로 바뀐다. 낡은 정자를 수리한 월산대군은 멀리까지 경치가 보인다는 뜻의 망원정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정자 바깥쪽에는 망원정, 안쪽에는 희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지금은 정자에 올라가도 강변북로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 밖에 안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강가의 절벽 위에 세워져 있어서 망원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강의 풍경을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지금은 섬이 되어버린 선유도에 있던 선유봉을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내내 세월을 견뎌왔던 망원정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훼손되기 시작한다. 특히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와 광복 이후 훼손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망원정은 1989년 다시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변의 풍경은 너무나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곳에 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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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만든 독립선언들이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월 7일 서울도서관 외벽 꿈새김판이 ‘2.8독립선언’ 내용으로 교체됐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7) 2.8독립선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조선 사람들에게 우리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당시 도쿄에 유학을 와 있던 학생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이광수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유학생 중 한명인 송계백이 조선으로 건너와서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최린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천도교 교주 손병희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도 대대적인 저항에 나설 것을 준비한다. 송계백이 돌아온 후 도쿄의 유학생들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일본의 수도 도쿄에 있는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유학생 총회가 진행되던 도중 갑자기 최팔용이 뛰쳐나와 조선청년 독립단을 결성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유학생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자 백관수가 나서서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한민족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으며,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이 마구 폭력을 휘두르면서 대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2.8독립선언은 일본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용감하게 떨쳐 일어난 만세 시위였으며,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2.8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와 연관된 장소들이 있다. 먼저 국내에 들어온 송계백이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을 찾아가서 만났던 장소인 숙직실은 이후 최린과 현상윤 등이 모여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조직하는 일을 준비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숙직실은 강당이 세워지면서 철거되었다. 하지만 1973년 3.1기념관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세워졌다. 중앙고등학교가 ...
동작구 상도동 지덕사와 함께 위치한 양녕대군 이제 묘역

왕이 되지 못한 왕자 ‘양녕대군’은 실패자일까?

동작구 상도동 지덕사와 함께 위치한 양녕대군 이제 묘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6) 양녕대군 이제 묘역 양녕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국사봉 아래 도로가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의 묘역이 있다. 조선 초기의 역사를 다루는 책과 드라마에서 단골 조연으로 나오는 양녕 대군의 실제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의 앞길은 찬란했다. 할아버지가 조선을 세웠고, 아버지가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심지어 그의 외삼촌들도 싹 죽여 버렸다. 하지만 그는 고분고분하게 기다리지 못했다. 왕세자의 자리는 너무 갑갑했지만 궁궐 밖 세상은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궁궐 밖으로 탈출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던 그는 결국 아버지의 눈 밖에 나게 되면서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조선시대 왕족들의 운명을 떠올려보면 살아있는 폐 세자는 걸어 다니는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았다. 그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른 동생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형을 처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빗발치는 상소를 외면했다. 덕분에 오랫동안 별 탈 없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그는 국사봉 아래 묻혔다. 숙종 때 뒤늦게 그를 기리는 지덕사라는 사당이 세워졌는데 1912년, 이곳으로 옮겨진다. 그 이후,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이곳의 문은 2018년 4월, 드디어 열리게 된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작지만 잘 조성된 정원이 나온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는 곳 오른쪽에 1912년 이전한 지덕사가 보인다. 그 옆으로는 비단잉어가 사는 작은 연못과 그곳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서 언덕을 오르면 사당 뒤편에 그의 무덤이 보인다. 무덤 양 옆으로는 문인석이 두 개씩 서 있고, 상석과 장명등이 놓였다. 그는 죽기 전에 무덤을 호화롭게 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마 조용히 잊어지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후손들이 무덤에 석물을 쓰면서 왕족의 무덤으로 남게 된다. 양녕대군이 직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