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저택

백인제 가옥보다 더 오래된 이곳 가옥의 정체는?

윤보선 저택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6) 윤보선 저택과 중정 감시탑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오른편에 야트막한 오르막으로 된 골목길이 나온다.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북촌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라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차와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쭉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전통 한옥의 담장이 나온다. 조금 따라서 걷다보면 가운데가 높은 솟을대문이 나온다. 1870년대 지어진 99칸 한옥으로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지은 지 백년이 넘은 전통 한옥이고, 여러 번 증개축을 하면서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아울러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무대로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의원 시절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현재 윤보선 집안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개방 여부에 상관없이 근현대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자 역사의 현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윤보선 감시 건물’의 흔적, 지금은 출판사로 사용되고 있다 윤보선 저택의 대각선으로는 독특한 건물이 한 채 보인다. 5층 높이의 이 집은 각 층의 높이와 모양은 물론 크기조차 다르다.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줄어서 제일 높은 곳은 거의 옥탑방 수준이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사용하면서 리모델링을 했지만 원형을 찍은 옛날 사진의 모습을 보면 괴상하기 그지없다. 이 건물의 정체는 바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소유의 감시탑이다. 5.16 쿠데타로 실각한 윤보선 전 대통령은 대정부 투쟁에 나서는 한편, 야당인 민주당 최고의원을 역임하는 등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중앙정보부는 그의 집을 감시하기 위해 맞은편의 집을 사서 망원경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한 것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집안의 가로수를 심어서 시야를 가리자 궁여지책으로 한층 씩 높이면서 괴상한 형태를...
일제 당시의 통감관저터

이완용이 빼앗은 옥새 들고 간 경술국치 현장은?

일제 당시의 통감관저 터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5) 통감관저 터 우리가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을 흉물스럽게 차지하고 있다가 1996년 철거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조선총독부가 있기 이전 일본은 남산 자락에 총독부와 통감부를 가지고 있었다.개항 이후 한성에 들어온 일본 세력은 남산 자락에 모여들었다. 조선시대 내내 진고개라고 불리면서 가난하고 자존심 강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남산은 삽시간에 일본공사관을 비롯해서 일본인들의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별천지로 바뀌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할 통감부를 지금의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자리에 세웠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공사관은 통감부를 책임지는 통감의 관저로 사용한다.이곳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1910년 8월 22일, 순종을 윽박질러서 반 강제로 옥새를 빼앗은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관저로 와서 제2대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대한제국의 주권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했다는 점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잘 보존되고 알려져 있던 반면, 더 치욕스러운 경술국치의 현장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린 셈이다.충무로역이나 명동역에서 내려서 걸으면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이곳이 잊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광복 후에 남산 일대에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독재가 이어지던 시기에는 남산은 불길하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곳이었다. 통감부를 비롯한 통감관저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통감관저의 위치가 확인되면서 기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들이 이뤄진다. 통감관저 터 비석(좌) 거꾸로 세워진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우)가장 먼저 생긴 것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세운 비석이었다. 그리고 조선을 집어삼킨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외교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들을 모아서 거꾸로 박아버렸다. 그 다음에 생긴 것은 일본에게 희생당한 위안부를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된 기억의 터였다. ...
1920년대 서촌 일대 전경, 사진 왼편 산 능선에 있던 윤덕영의 별장 ‘벽수산장’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던 초호화 주택은 어디에?

1920년대 서촌 일대 전경, 사진 왼편 산 능선에 있던 윤덕영의 별장 ‘벽수산장’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4) 벽수산장 경복궁 서쪽에 있는 서촌은 80년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골목길과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수성동 계곡으로 유명하다. 특히 정조 때 시인으로 유명한 천수경의 거처인 송석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양반이 아닌 평민인 그는 같은 처지의 동료 문인들과 함께 시회를 열어서 유명세를 떨쳤다.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이 있던 바위에 송석원이라는 글씨를 새기기도 했다. 이렇듯 서촌은 조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져서 거의 흔적도 없는 기억도 남아있다. 필운대로 7길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다보면 이상한 돌기둥과 만나게 된다. 길옆의 다세대 주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돌기둥 두 개가 마치 수문장처럼 서 있는 중이다. 오른쪽은 낮고, 왼쪽은 높은 편이다. 왼쪽 돌기둥 안쪽에는 아치형 출입문의 흔적이 있는 벽돌 담장이 건물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한 때 서촌 일대는 물론 경성 시내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던 벽수산장의 흔적들이다. 벽수산장의 흔적들 사라진 벽수산장의 주인은 윤덕영이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부인 순정효왕후의 큰 아버지이지만 이완용 뺨치는 친일파였다. 일본으로부터 경술국치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의 작위와 함께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다. 윤덕영은 나라를 팔아서 받은 돈으로 서촌 일대의 땅을 사들이고 커다란 저택을 짓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부자들은 서양식 주택을 지어서 부를 과시하곤 했는데 윤덕영이 선두주자였던 셈이다. 무려 10여년에 걸쳐서 지은 서양식 주택을 본 백성들은 아방궁이나 뾰족집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을 했다. 윤덕영은 서양식 주택 뿐만 아니라 한옥과 호수, 정원까지 조성해서 부를 과시했다. 주택이 워낙 크고 독특해서 일제 강점기와 광복 직후 서울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했다. 광복 후에는 병원과 유엔군...
덕수궁 정관헌

‘애잔한 아름다움’ 가을을 닮은 덕수궁 정관헌에서…

덕수궁 정관헌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3) 덕수궁 정관헌 시청과 접해있는 덕수궁은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걷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석조전 같은 이색적인 건축물이 있고, 미술관도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 활동을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더군다나 바로 옆에 걷기 좋은 정동이 있기 때문에 가족들과 역사 나들이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덕수궁 안에 있는 정관헌을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덕수궁을 들어가면 남들처럼 직진해서 중화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꺾어서 돌담길 카페 옆의 연못을 둘러보고 담장을 따라 빙 돌아서 정관헌으로 향한다. 정관헌은 석조전만큼이나 이질적인 서구식 건축물이다. 돌로 만든 기단과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세워진 벽체 위로 녹색 지붕이 드리워진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다른 건축 양식의 이름을 가져다 붙여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낯선 형태이기도 하다. 거기다 발코니처럼 둘러진 공간의 난간과 기둥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한옥의 단청과는 사뭇 다른 형태라서 눈길을 머물게 한다. 덕수궁 정관헌 정관헌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이 만든 건물로 고종이 커피를 마시거나 외국 사절단을 접견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언덕 같은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거나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기에 더 없이 적당한 곳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예전에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아쉬움은 이곳을 무대로 한 각종 행사들, 특히 고종이 이곳에서 외국 공사들과 만나는 접견례를 재현한 행사들을 보는 것으로 달래고 있다. 궁궐은 임금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모시는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손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권력의 주체가 국민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
박노수 미술관은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다

하나의 작품! 가을, 서촌, 그리고 ‘박노수 미술관’

박노수 미술관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2) 박노수 미술관 통인시장을 지나 서촌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올라가다보면 박노수 미술관과 만나게 된다. 박노수 화백은 광복 후 활동한 한국화 1세대 화가로 오랜 기간 독창적인 화법으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곳은 그가 1973년부터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작품과 수집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꾸며져 있다. 원래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부인이었던 순종효황후의 큰 아버지인 윤덕영이 자신의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1937년경에 지어진 이 집은 근대 주택의 여러 가지 특징과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언덕 위쪽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한 눈에도 다른 주택들과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2층 건물인데 위 아래층의 재료도 틀리고 형태도 다르다. 벽돌로 만든 1층은 현관의 지붕인 포치부터 벽면 전체가 전형적인 서양식 주택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하얀색으로 칠해진 2층은 목재로 만들어졌고, 일본식 주택의 특징인 돌출된 창문이 보인다. 그리고 돌출된 창문 아래에 노출된 목재는 한옥의 둥근 서까래를 연상케 한다. 내부 역시 벽난로부터 온돌방까지 여러 양식이 섞여있다.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총독부의 건축과에서 일하던 조선인 건축기사 박길룡이었다. 조선인 중에 드물게 기사까지 역임한 그는 다양한 건축물들을 설계 했는데 박노수 미술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박노수 화백의 미술작품이 있는 내부도 볼거리가 많지만 정원 역시 눈에 띈다.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져서 작은 석등을 비롯한 조각품들이 정원 곳곳에 보인다. 옆으로 돌아가면 장독대로 쓰는 작은 창고 옆에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수조도 있다. 뒤쪽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일종의 전망대로 올라가는 곳이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박노수 가옥의 지붕과 굴뚝들이 보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박노수 미술관의 뒤편에는 벽수산장이 있었다.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기괴한 ...
서울시민청 군기시 유적전시실

서울시청 지하에 이런 곳이? 조선시대 유적의 재발견

서울시민청 군기시 유적전시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1) 서울시민청 군기시 유적전시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웠다. 서울에 있는 수많은 역사적인 장소를 돌아보면서 정작 서울시민청에 있는 군기시 유적을 소개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시민청은 갤러리와 공정무역 상점, 책방 등이 있는 곳으로 시민들에게 안락한 휴식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 시민청 한쪽 구석에는 군기시 유적전시실이 있다. 군기시는 조선시대 무기를 제조하던 관청으로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세워진 곳이다. 조선 전기에는 화약 무기의 개발과 제조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군기시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신청사를 짓던 중에 발견된 이곳에서는 각종 유물들은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불랑기포의 경우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출입문 옆에 있는 불랑기포의 대형 모형과 톱니바퀴 등으로 간단한 동작을 보여주는 오토마타로 된 인형들이다. 특히 오토마타로 된 인형들은 군기시 소속의 장인들이 무기를 만들고 검사하는 과정을 한 눈에 보여준다. 그 옆에는 군기시 건물의 모형들도 볼 수 있다. 갈 때 마다 뭔가 하나씩 추가되는 것 같아서 근처에 오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오게 된다. 군기시 내부는 나무와 강화유리로 된 통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다. 기둥 사이로 신청사 건립 당시 발견된 군기시의 건물터와 초석을 재현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돌더미들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어떤 건물이 어떤 형태로 세워져있는지 상상해보기에 부족하지 않다. 통로 중간 중간에는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깨진 도자기 조각과 각종 도구들은 물론 승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류들도 전시되어 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수천 개의 화살촉들이 열과 압력에 엉켜 붙은 화살촉 더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살촉의 모양이 조금씩 다른 걸 눈치 챌 수 있는데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 밖에 총통에서 쏘는 대형 화살인 ...
독도체험관

때가 때인 만큼 꼭 한 번 가볼만한 ‘독도체험관’

독도체험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0) 독도체험관 동북아 역사재단이 있는 서대문구 농협빌딩 지하에는 서울에서 독도를 만날 수 있는 독도체험관이 있다. 계단을 내려가서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자연관에 120분의 1로 축소된 독도 모형이 있다. 동도와 서도는 물론 독도 경비대의 막사와 계단까지 재현돼 있다. 생태환경은 물론 지질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함께 있어서 독도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관 안쪽의 기획전시실에는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과 일본이 언제부터 독도에 야욕을 드러냈고, 어떤 식으로 도발 했는지 잘 정리돼 있다. 그리고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해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역사 미래관은 독도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 우산국이었던 울릉도가 1,500년 전 신라의 이사부 장군에게 정복되면서 부속된 섬이었던 독도가 우리 땅이 된 이후의 이야기들이 나와 있다. 벽에는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를 비롯한 문헌 증거들이 든 책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빈번하게 침략하는 것을 본 안용복이 두 차례 일본에 가서 벌인 활약을 담고 있다. 안용복의 항의를 받아들인 일본의 에도 막부는 자국민들에게 울릉도와 독도에 가지 말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일례로 에도 막부의 명령으로 사할린을 탐험했던 마미야 린조는 밀무역을 감시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1836년 이즈야마 하치에몬이라는 상인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나무와 전복들을 채취했다는 사실을 적발한다. 이즈야마 하치에몬과 동료 상인들은 마미야 린조에 의해 처형되는데 출입을 금지한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의 이런 행동은 독도가 누구의 영토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독도체험관은 별로 크지 않는 규모로 아주 잠깐이면 돌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자료들은 전문가들의 손길을 거친 곳이라서 소중한 우리 영토인 독도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시간을 ...
경희궁 방공호

서울에 숨겨진 비밀 지하 공간 ‘경희궁 방공호’

경희궁 방공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9) 경희궁 방공호 복원된 경희궁의 오른편 언덕을 넘으면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차장이 보인다. 그리고 주차장 한쪽 구석에는 하늘색으로 칠해진 콘크리트 벽과 두툼한 출입문을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주차장과 관련 있는 시설로 보이지만 이곳은 역사박물관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44년에 완성된 지하 시설물이다. 사람들은 편의상 방공호라고 부르지만 내부 구조나 규모를 생각하면 절대로 일반적인 방공호라고 할 수 없다. 방공호는 원래 공습을 피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내부에 별다른 편의 시설들이 없다. 하지만 이곳은 여러모로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어질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 해군이 주둔 중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다. 이 기습으로 인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초반에는 일본이 승승장구했지만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함대가 전멸당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방공호의 건설을 서두르게 된다. 이곳에 지하 시설물이 들어선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추정된다. 하나는 경희궁이 있던 곳에 세워진 경성중학교를 이용해서 공습을 피하려고 한 것 같고, 또 하나는 이곳이 광화문에서 600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을 정도로 중심지라는 점이다. 건설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체신부 직원은 이곳이 경복궁 앞에 있던 조선총독부와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곳을 단순한 방공호로 볼 수 없다는 점은 내부 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입구 부근에는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고, 지하 공간은 사무공간처럼 분할되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환기시설과 조명시설이 갖춰져 있고, 대형 모터를 설치할 수 있는 받침대도 존재한다. 따라서 몇 시간 동안 공습을 피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랜 시간 머물면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 근처에 있던 조선총독부와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
성북동에 위치한 선잠박물관

조선시대 왕비가 해마다 찾아갔다는 성북구 명소

성북동에 위치한 선잠박물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8) 선잠단과 선잠박물관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 역에서 내려 간송 미술관 쪽으로 가다보면 선잠단과 만나게 된다. 선잠단은 누에의 신인 서릉씨를 모시는 제단으로 조선 성종 때 만들어졌다. 근대 이전에는 베 짜기는 벼농사와 더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산업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크게 장려되었다. 특히 베 짜기에 필요한 명주를 만드는 누에를 기르는 일은 농사만큼이나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임금이 제사를 지내고 직접 쟁기질을 하는 선농단처럼 베 짜기 역시 왕비가 직접 제사를 지내는 선잠단이 있었다. 벼농사가 남자의 일로 여겨졌다면 베 짜기는 여성의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라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는 왕비가 직접 제사를 주관했다. 누에의 신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뽕나무를 앞에 심고, 그 잎을 누에에게 먹이도록 했다는 점이 선농단과의 차이점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선잠단은 복원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볼 수 없다. 하지만 근처에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성북파출소 옆에 있는 선잠박물관으로 지난 2018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성북구 최초의 공립박물관이기도 한 이곳은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선잠단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1층에는 선잠단과 선잠제에 대한 설명이 있고, 복원 중인 선잠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예전 한양지도에서 선잠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2층 전시실에는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미니어처로 만들어져있다. 제단 위의 제사상은 물론 아래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과 춤을 추는 무희들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복원되어 있다. 벽에는 왕비가 직접 선잠단의 제사를 주관하는 친잠례의 모습을 담은 친잠의궤가 전시되어 있다. 3층은 기획전시실과 개방형 수장고로 꾸며져 있다. 개방형 수장고는 누에가 뽑아낸 실로 만든 옷감들을 볼 수 있다. 선잠박물관 하늘정원. 성북동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기획전시실은 9월 22일까지 ‘하늘과 바람과 시간- 한국의 파란색展’으로 ...
중부학당 터

광화문 빌딩숲에서 발견한 역사의 흔적 ‘중부학당 터’

중부학당 터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7) 중부학당 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뒤편, 케이 트윈타워의 남쪽 화단에는 중부학당 터라는 표지석, 그리고 거기에 대한 설명이 붙은 판석, 그리고 뒤쪽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이곳에 조선시대 초중급 교육기관은 학당이 있던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극에 나오는 교육기관은 훈장이 있는 서당이나 성균관 정도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학당은 대단히 낯선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학당의 역사는 고려부터 시작된다. 당시 성균관의 대사성이었던 정몽주가 공양왕 때 개경에 세운 것이 시작이다. 이때는 중앙과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해서 5부 학당이라고 불렀는데 지방의 향교 같은 역할을 했다. 차이점은 향교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신 문묘가 없다는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하기에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조선에서는 성균관은 물론 학당 역시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다만 세워진 장소는 개경이 아니라 조선의 새로운 도읍이었던 한양이었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북부학당은 세워지지 못해서 4부 학당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에 탔다가 다시 중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당은 성균관의 하부 교육기관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들은 성균관의 교수들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도울 훈도들이 각 학당에 파견되었다. 한양의 교육기관 중 하나였던 중부학당은 다른 학당들과 함께 한말에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잊어졌던 중부학당은 이곳에 빌딩이 세워지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공사를 하던 중 중부학당의 것으로 추정되는 적심석들이 발견된 것이다. 적심석은 건물의 초석이 놓을 자리에 땅을 파고 돌을 채워 넣는 것으로 잡석이라고도 부른다. 적심석이 나온 곳 주변은 다져서 평탄하게 하는 동시에 지반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 흔적도 나왔다. 중부학당 터 적심석 표지석 안쪽에는 강화유리로 만들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