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

도성 안팎 600년 이야기 가득 품은 ‘창의문’을 만나다

창의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0) 창의문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을 떠나 한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면서 경복궁을 비롯해서 한성의 성곽과 성문을 쌓는다. 창의문 역시 이때 같이 지어진 것으로 4개의 대문과 함께 지어진 4개의 소문으로 북소문에 해당되는데 북대문인 숙정문과 서대문인 돈의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의 지명을 따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일곱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칠궁을 지나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고갯길에 도달한다. 차와 버스들이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이곳에는 청운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맞은편에는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 초입에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흔적들이 남아있다. 1969년 1월 21일, 김신조가 포함된 북한군 특수부대 31명이 휴전선을 넘어와 청와대의 코앞인 이곳까지 진출한다. 국군 복장을 한 그들을 수상쩍게 여긴 최규식 경무관이 막아서 돌연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1.21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나란히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창의문은 숭례문처럼 웅장한 대신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태종 때 풍수지리상 왕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버린다. 이 문만 통과하면 바로 경복궁이라는 점도 폐쇄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닫힌 문은 중종 때가 되어서야 다시 열린다. 임진왜란 때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문루가 불타버렸지만 다른 곳은 무너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았다. 1623년, 왕족인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문루가 없어진 창의문으로 들어와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에 성공한다. 역사의 현장이 된 창의문은 영조 때 다시 문루가 세워지게 된다. 왕래가 별로 없...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

신촌 대학 속에 숨어 있는 ‘사도세자 어머니의 눈물’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9) 연세대학교 수경원 터와 광혜원 신촌 연세대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희생된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뒤편에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 로비의 창문 너머로 두 채의 한옥이 보인다. 오른편은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일자형 한옥이고 왼편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각이다. 두 한옥이 있는 잔디밭에는 석탑을 비롯한 각종 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연세 역사의 뜰이라는 공간으로 단청이 없는 일자형 한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이자, 연세대학교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광혜원을 1987년에 복원한 것이고, 왼편의 정자각은 수경원 터에 세운 전시공간이다. 현재 정자각이 있는 공간 뒤편에 있는 연세대학교회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무덤인 수경원이 있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낳은 그녀는 특히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아버지 영조 역시 어린 시절의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하지만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이 독이 되었는지 아들은 날이 갈수록 엇나갔다. 결국 영빈 이씨는 피눈물을 참으며 며느리와 손자를 살리기 위해 남편에게 아들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영빈 이씨의 아들은 뒤주에 갇혀서 죽고 말았는데 죽은 이후 사도세자라고 불렸다.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고통 때문인지 영빈 이씨 역시 2년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무덤은 한성 바깥인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마련되었다. 왕비가 아니라 후궁이었기 때문에 의열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무덤 역시 의열묘라고 불렸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상인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의열묘도 수경원으로 위상이 높아진다. 그녀의 위패를 모신 곳은 선희궁이었는데 한성에 있다가 1908년, 현재의 청와대 옆에 있는 육상궁에 모셔지면서 현재까지 그곳에 자리 잡고 ...
10년 전 궁산 자락에서 발견된 땅굴을 최근 ‘궁산 땅굴 전시관’으로 개방하였다.

서울에 땅굴이 있다? 봉인된 시공간에서 만난 역사

궁산 땅굴 전시관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8) 궁산 땅굴역사전시관 겸재 정선 미술관 뒤편 궁산 자락에는 궁산 땅굴역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에 대한 답사기를 썼던 경험자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 시간을 내서 들려보기로 했다. 다소 뜬금없는 장소에 이상한 전시관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가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의 입구가 보인다. 안전 문제 때문에 철골을 덧댄 형태이긴 하지만 원형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땅굴은 높이와 폭이 2미터가 넘고, 길이는 거의 70미터에 달한다. 제주도나 지방에서는 일본군이 파놓은 땅굴이 종종 발견되고, 와인창고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경희궁이 있던 지역에 만들어놓은 대규모 지하군사시설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땅굴은 없었다. 물론 백인제 가옥에서 볼 수 있듯 태평양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공습을 우려해서 지하에 방공호를 파놓기는 했다. 하지만 궁산 자락의 땅굴은 단순한 방공호가 아니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 지금의 김포공항 위치에 육군 항공대가 운영하는 비행장을 건설한다. 비슷한 시기 제주도의 알뜨르에는 해군이 주둔할 비행장이 만들어졌다. 중국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삼기 위해 각종 군사시설들을 세웠고, 김포의 비행장도 그 중 하나였다. 궁산 땅굴의 위치나 규모로 봐서는 무기와 유류를 보관하는 것은 물론 공습을 받게 되면 지휘부가 피신하는 용도로 사용할 예정으로 보인다. 궁산 땅굴 내부 특히 땅굴이 있는 궁산은 행주산성의 대각선에 위치한 곳으로 한강을 관측하기 유리한 곳이라 삼국시대부터 성을 쌓아두었던 지리적 요충지다. 따라서 관측소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중일전쟁에 이어서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을 급속도로 군사기지화 한다. 그러면서 미군이 상륙할...
홍살문이 보이는 양천향교 전경

어떻게 양천향교는 서울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홍살문이 보이는 양천향교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7) 양천향교 홍원사를 지나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그리고 홍살문 뒤에는 외삼문과 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곳에 바로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천향교다.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으로서 고려 때부터 설립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향교의 설치와 운영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향교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지방관으로 하여금 잘 관리하도록 별도의 지침을 내렸다. 또한 향교에서 공부를 한 유생들에게만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향교는 교육기관 외에도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다.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은 지방에 세운 향교의 교육과 제사를 통해 유학이 지방까지 뿌리를 내리기를 바랬다. 그래서 향교는 지방마다 예외 없이 하나씩 남았다. 하지만 성균관과 학당이 설치된 한양에는 향교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양천향교는 서울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지방에 있어야 할 향교가 우리 곁에 있게 된 것은 서울의 급격한 확장과 관련이 있다. 서울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양천향교 양천향교는 태종 11년인 서기 1411년에 세워졌다. 세워질 당시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양천군이었다가 나중에 김포와 통합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서울로 편입되었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80년대 전면적인 보수를 해서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지만 양천향교가 아니라 양천향교 터로 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향교에서 머물며 공부를 하는 교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가운데 계단 위쪽에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다. 현재 동재와 서재는 사무실로 사용 중...
우정총국

대한제국 우푯값은? 종로 작은 건물에 담긴 우정의 역사

우정총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5) 우정총국 종로는 묘한 곳이다. 종각역을 기준으로 광화문과 종로 방향은 비록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번화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반면,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걸으면 주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조계사 때문인지 몰라도 농협은행 종로지점을 지나가면 고즈넉한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도심치고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계사를 지나면 길옆에 한옥 한 채가 작은 광장을 마당삼아 서 있는 게 보인다. 붉은 색 단청이 칠해진 다섯 칸짜리 팔작지붕을 한 평범해 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서는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마당 한쪽에는 이곳이 문화재로 보호받는 우정총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하얀색 입간판이 서 있다. 이곳을 오기 위해 종각역에서부터 걸었던 도로의 이름도 우정국로다. 근대의 문물 중 하나인 우편제도는 조선인들에게 신기하고 편리하게 받아들여졌다. 우표만 붙여서 우체부에게 가져다주면 원하는 곳까지 전달해준다는 시스템은 심부름꾼을 따로 쓰거나 보부상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전달해야만 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받아들였다. 개화를 추진하던 고종은 조선에도 이 편리한 우편제도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우정총국을 설립한다. 그리고 우정총판으로 개화파의 핵심인물인 홍영식을 임명한다. 그리고 갑신년인 1884년 12월, 드디어 우정총국이 문을 연다. 하지만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는 피바다로 변하고 만다. 홍영식이 가담한 개화파가 연회에 참석한 외척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창덕궁으로 가서 고종과 명성왕후에게 변란이 발생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때마침 들려오는 폭발음에 놀란 두 사람은 김옥균의 말대로 경우궁으로 옮긴다. 갑신정변의 초반은 성공적이었지만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3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으로 간신히 피해서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홍영식은 끝까지 고종의 곁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갑신정변의 주 무대가 된 우정총국...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2층 침실

덕수궁 석조전으로 ‘대한제국’ 역사여행 떠나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2층 침실 덕수궁 하면 돌담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구불구불 걷는 정취가 좋아 사람들이 사랑하는 길이다. ‘정동길’이라는 명칭 대신 ‘덕수궁 돌담길’로 불리는 이유도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덕수궁은,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대한제국의 정궁이다.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덕수궁을 황궁으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에 가면 대한제국 당시 세워진 근대식 건물 석조전을 만날 수 있다. 1900년에 짓기 시작해서 1910년에 완공 됐다. 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이다. 조선의 전통 건축이 나무로 집을 짓는데 비해, 근대화의 상징으로 지은 이 집은 돌을 사용해 지어졌다. 조선을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만들겠다는 고종황제의 의지를 반영했는데 안타깝게도 고종황제는 석조전에서 대한제국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고종황제의 빼앗긴 대한제국의 꿈을 우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이름이 바뀐 석조전에서 엿볼 수 있다. 1층 중앙홀 대한제국역사관을 관람하려면 덕수궁 누리집을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지정된 시간에 1층에서 모여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는 동선을 따라 관람하게 돼있다. 석조전 중앙홀에서 촬영한 영친왕가 기념사진 1층은 중앙홀이나 접견실 등 공적인 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거실이나 침실 등 사적인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전통적인 궁궐의 경우 침전과 편전을 분리해두는 것에 비해 석조전은 두 곳을 한 곳에 두는 서양식을 따랐다. 중앙홀의 대리석 탁자를 비롯해 1911년 당시 가구 41점이 남아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중앙홀의 대리석탁자다. 이 탁자는 1911년 영친왕이 당시 국내외 유력인사들과 기념촬영을 했던 그 탁자다. 현재 대한제국역사관에는 대리석 탁자를 포함하여 그 당시 가구 41점이 남아있다. 석조...
서울역사문화답사

“걸으면 역사가 보여요” 서울역사문화답사 신청

경치를 즐기면서 2,000년 서울 역사를 함께 배우고 싶다면, 서울역사문화답사에 참여해 보는 건 어떨까. 서울역사편찬원이 올해 서울역사문화답사 일정을 발표하고 참가자를 모집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의 외사산들을 답사할 예정으로 올해는 3월부터 11월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아차산, 불암산 등 서울시민이 쉽게 갈 수 있는 산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답사한다. 답사 첫 걸음은 아차산에서 시작한다. 3월 25일 아차산 일대를 진행하며, 신청은 8일부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 2017년 외사산(서울 외곽) 답사 일정 회차 답사일 접수 공지 답 사 코 스 강사 1차 03.25 03.08~16 03.17 아차산에서 느껴보는 옛 고구려의 기상 순명비 유강원 석물-홍련봉보루–아차산보루-아차산성 서영일 2차 04.29 04.05~13 04.14 대모산에서 느끼는 조선시대 왕의 숨결 광평대군묘역-불국사-대모산성-헌인릉 이장우 3차 05.27 05.10~18 05.19 관악산 자락의 역사 길을 걷는 시간 백제요지-이경직 묘역–강감찬 생가터–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나각순 4차 06.24 06.02~12 06.14 관악산 서쪽 끝 봉우리 호암산 자락에서 느끼는 역사여행 호암산성터–호압사-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서영일 5차 09.09 08.17~25 08.28 망우산 밑 망우리공원에서 근현대 인물들을 만나는 시간 망우리공원 황선익 6차 10.14 09.20~28 10.11 궁산에서 배우는 옛 선현의 유람과 지혜 양천향교–양천고성지–겸재정선미술관–허준박물관 이장우 7차 11.4 10.18~26 10.30 수락산과 불암산 자락에서 배우는 조선의 역사(버스) 서계 박세당 고택–노강서원–석림사-덕흥대원군묘–흥국사 김창현 ※ 본 일정은 변경될 수 있음 8시간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