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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한인동포 귀국을 위해 애쓴 독립지사

북한산 둘레길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우리나라의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상산 김도연 선생의 묘역을 둘러보고 약간 가파른 내리막길로 내려섰다. 잠깐 걷자 오솔길 3거리가 나타난다. 왼편 솔밭공원 방향으로 가는 이정표 아래 강재 신숙 선생의 묘역으로 가는 이정표도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 200여 미터를 걷자 신숙 선생의 묘역이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강재 선생에 대한 두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애국선열 강재 신숙 선생, 경기도 가평 출신 독립운동가였으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교정 및 인쇄, 배포를 하였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관여했고 활동을 지원했다. 1930년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안내판에는 글과 함께 콧수염을 기른 강직해 보이는 강재 선생의 사진도 있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강재 신숙 삼본주의(三本主義), 민본정치(民本政治)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 건설, 인본문화(人本文化) 창달(暢達). 192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통일당을 조직하고 수령에 올라 삼본주의를 제창하고 당의 강령으로 채택함'이라 쓰여 있다. 강재 선생의 묘역 풍경도 다른 애국선열들 묘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봉분 두 개가 나란히 안치된 것과 양의 모습을 한 석재 조형물, 그리고 특이한 문양의 망주석이 눈길을 끌었다. 강재 신숙 선생은 1885년에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아명은 연길이었으며, 열두 살 때는 태봉이라 하였고 스물한 살 때는 다시 태련으로 고쳐 불렀다. 선생은 아명이 셋이나 되는 특이한 분이다. 신숙이란 이름은 1920년 35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할 때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호도 셋이나 된다. 강재라는 호 외에도 시정과 치정이라는 호가 있다. 강재 선생은 어렸을 때인 12세 때부터 14세까지 당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던 이규봉에게 한학을 공부했는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총명했다고 전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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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조국에서 굴곡 많은 야당정치인으로 살다

올여름 유난히 심했던 무더위가 한풀 꺾인 9월 초순,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는데도 산길을 걷노라니 이마와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숲속을 파고드는 바람결이 풋풋하고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것이다. 동암 서상일 선생 묘역을 지나 황토 흙길 200여 미터를 더 걷자 역시 왼편 산자락에 묘지 1기가 나타난다. 상산 김도연 선생의 묘역이다. 묘역 입구에 서 있는 선생에 대한 안내판에는 '애국선열 초대 재무부장관 상산 김도연 선생, 호는 상산.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일본 동경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서 11명의 대표 중 한사람임. 입법의원과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장관을 지내고 3·4·5대 민의원과 6대 국회의원을 지냈음'이라 쓰여 있다. 무덤 앞에는 작은 컵에 담긴 꽃송이들과 함께 묘역 귀퉁이에서 피어난 무궁화 꽃나무 한 그루가 곱고 싱그럽다. 상산 김도연 선생은 1894년 6월 16일에 경기도 김포 양동면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포의 부유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무렵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조금 더 성장한 후에 신식 교육기관인 태극학교에 입학했으며, 태극소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보성중학교에 진학했다.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긴조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긴조중학교 재학 중에는 '반도중학회'라는 학생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합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과에 진학한 그는, 신익희, 김양수, 장덕수, 최두선 등이 창립하여 주도하던 유학생들의 중추조직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 활동했다. 어린 학생시절부터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애국지사 또 'YMCA 한인 청년회'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18년 1월에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부 개선 때 백남훈, 전영택 등과 함께 이 모임의 서기로 선출되어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해 겨울 도쿄에 있는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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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양일동,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929년 12월, 날씨는 춥고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그렇잖아도 가난에 찌든 조선인들의 삶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총독부 경무국에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정보가 속속 입수되고 있었다. 지난 달인 11월 초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 경무국과 경찰서들은 날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3년 전인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상왕,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 비들의 장례)일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저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젊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라 했다. 총독은 "경찰이 사전에 철저히 차단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삼엄한 일제경찰의 감시와 눈을 피해 12월 2일 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학생비밀결사조직인 '학생전위동맹'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이들은 서울지역 학교들에 조직된 독서회와 청년단체 등을 통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전국의 학생들과 민중들이 총궐기하자는 전단지 격문을 만들어 살포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남의 일처럼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이 주동학생들의 생각이었다. '우리들도 일제에 맞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우리 젊은 학생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 중에 양일동이라는 학생도 끼어있었다. 중동중학생이었다. 학생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12월 5일 경성제2고보(지금의 경복고)의 동맹휴교를 시작으로 경성제1고보(지금의 경기고), 중동, 경신, 보성, 중앙, 휘문, 배재, 이화, 동덕, 협성실업 등의 학교 학생들이 뒤를 이었다. 드디어 12월 9일, 경신과 보성, 중앙, 휘문, 협성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13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서울에서 1만2,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고 그들 중에 1,40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항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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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시 한 수에 고문을 중지한 일본 형사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1928년 대구형무소 옥중 투쟁 중- 일제치하와 해방정국에서 우리나라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요 항일투쟁을 했던 심산 김창숙 선생은 지조를 굽힐 줄 모르는 선비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 선임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거부하며 한 말이다. 선생이 훗날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일컬음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북한산 둘레길 중 수유동 '순례길 구간'에서 양일동 선생과 서상일 선생 묘역 이정표를 따라 100미터 쯤 올라 오른편 길가 언덕 위에서 꼿꼿했던 선비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의 묘역은 오른편 언덕을 올라 다시 왼편으로 20여 미터, 또 다시 오른편으로 10미터 오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묘역의 풍경은 다른 독립선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창숙이라는 조금은 여성스런 이름을 가진 심산 선생은 1879년 경북 성주의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가풍에서 자라났다. 본관은 의성이고 호는 심산이다.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던 유학자 이종기와 곽종석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아버지 김호림은 일찍이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이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창숙과 학동들을 불러내 농부들의 노고를 알아야 한다며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농사일을 돕도록 했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그 후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하는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일본인 형사까지 감동시킨 학문과 인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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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문제겠느냐!”

"쳐 죽일 역적 놈들 같으니라고, 오늘부터 역적 박제순의 집안과는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 선생의 비분강개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였다. 당시 외교를 담당한 외부대신은 을사5적 중 한 명인 박제순이었고 실무 담당인 교섭국장은 성재 이시영이었다. 그러나 실제 조약체결은 실무책임자인 이시영을 완전히 배제시킨 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을사5적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일제의 강요로 조약체결이 추진되자 이시영은 조목조목 부당함을 강조하며 결사반대했다. 그는 당시 조약체결의 실무책임자인 교섭국장을 맡고 있었다. 외부대신 박제순을 만날 때마다 조약체결 반대 입장을 밝히며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일제와 결탁한 박제순 일당은 궁궐을 일본군들이 포위한 가운데 치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시영은 낙망했다. 10년 만에 관직에 나아갔던 그였지만 미련 없이 교섭국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5년 후 그는 형제들과 함께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사랑하는 조국을 떠났다. 국가적인 치욕과 망국의 소용돌이가 한반도를 휩싸고 돌던 구한말, 당시 조선 최고의 명문거족 한 집안이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만주로 떠났다. 바로 성재 이시영선생의 형제들과 가족 식솔 등 60여 명이었다. 이들이 만주에서 세운 학교가 훗날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흥무관학교다. 이시영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매국노들에 의하여 외부 교섭국장도 배제하고 체결된 을사늑약 이시영 선생의 묘역 입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애국선열 이시영 선생, 서울출신 독립운동가 정치가였으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 동포 사회의 일을 다루는 기관인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현 경희대의 시초)를 설립하였다. 임시정부 시절에는 법무, 재무 분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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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안에서 쓰러진 대통령의 꿈

"못살겠다. 갈아보자~" "그래 맞는 말이야. 이번엔 바꿔야 돼. 신익희 선생으로…." 1956년 5월, 온 나라가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로 들썩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의 선거 슬로건은 당시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국민들의 정서에 정말 딱 맞는 말이었다. 선거민심이 술렁이고 있었다. 서울의 한강 백사장과 지방의 넓은 운동장에서 열린 선거유세는 군중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당시 집권여당인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이었고, 야당에서는 민주당의 신익희와 진보당의 조봉암이 출마했다. 이틀 전인 5월 3일, 신익희의 한강백사장 유세에는 3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열렬한 박수와 함성으로 그를 지지했다. 군중들의 열띤 지지에 고무된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지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남지역 유세를 하기 위해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는 너무 허망하게 운명했다. 호남선 이리역(지금의 익산) 도착 30여 분 전이었다. 사인은 뇌일혈과 심장마비로 판명되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전환점이 될 뻔했던 국민적인 열망이 물거품처럼 스러져버린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 비운의 주인공이자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항일애국선열인 신익희 선생. 정치인이며 교육자의 삶을 살았던 그의 묘역을 북한산 자락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 입구 근처 둘레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하우스 입구에서 오른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왼편에 '해공 신익희 선생 묘소입구'라고 쓴 한문자 표지석이 서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4․19혁명 사적비'가 나타난다. 붉은색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몇 개의 계단 위에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무덤 앞에는 '해공평산신익희지묘'라 쓴 묘비와 함께 망주석과 문인석, 그리고 장명등(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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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검사가 누군지 아세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격변기였던 구한말과 일제의 식민통치기간, 그리고 해방정국, 6·25 한국전쟁 등 민족적 시련기에 독립운동가 또는 교육, 정치가로 조국의 해방과 민주국가 건설 및 수호에 앞장섰던 선각자들은 지금 어느 곳에 잠들어 있을까? 이 칼럼은 서울의 둘레길을 걷다 만난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영웅들 이야기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수유리 북한산 둘레길, 일성 이준 열사 묘역 입구 어록 표지석에서 구한말인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밀사로 참가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해 순국한 이준 열사의 어록에서 발췌한 글이다. 당시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의 열강들에게 알리려 했던 열사의 뜻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죽음으로 호소한 열사의 연설문은 세계 유수의 언론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서둘러 이준 열사가 병사했다고 왜곡했지만 열사의 순국은 울분을 참지 못해 할복 자결했다는 소문이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글거리는 태양빛과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북한산 둘레길을 찾았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입구에서 오른편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면 첫 번째로 만나는 묘역이 해공 신익희 선생이다. 두 번째 만나는 분이 일성 이준 열사지만 해공 선생보다 한 세대 앞에 사셨던 분이어서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삼복더위 속에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고종황제의 밀사 일성 이준 열사는 1859년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세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모두 전염병으로 작고하여 조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다. 17세 때 고향을 떠나 상경한 그는 약관의 나이에 위기에 처한 국가를 걱정하며 정객들과 접촉하던 중 대원군을 만나게 되었다. 대원군은 열사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당시 형조판서였던 김병시에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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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타워가 마치 등대처럼 반짝였다

서울엔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등 크고 멋들어진 산이 많다. 가끔 그런 산들을 걸어 오를 때마다 '밤에도 이런 숲길을 걸으면 얼마나 운치있고 좋을까'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히나 요즘처럼 무더운 날엔 그런 밤 산행이 더욱 아쉽기도 하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다음에야 5시만 되도 부지런히 산을 내려 와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그런 밤 산행이 가능한 곳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바로 남산이 그곳으로, '낮에도 좋지만 밤에 산행하는 기분은 어떨까?'로 시작된 내 작은 소망을 바로 해결해 주었다. 동네 뒷산처럼 가까이에 있는 남산이 저녁나절 오르기 좋다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했는지... '가장 좋은 산은 집에서 가까운 산'이라고 했던 작가 김훈의 말은 남산에도 잘 들어 맞는다.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지고 수도 방위를 위한 성곽이 지어지면서 뜬 산이 북악산, 낙산, 인왕산 그리고 남산이다. 해발 262미터의 전형적인 도심 속 낮은 산 이지만 시민들에게 계절의 즐거움에 더불어 걷는 즐거움까지 선사해주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지 않나 싶다. 고즈넉하고 운치있게 걷는 야밤 산행 친구에게 남산 기행을 가자며 그럴듯한 말로 꼬여 내는 것 까진 성공했는데 저녁 7시에 만나자고 하니 놀란다. 그 또한 나처럼 남산의 야경과 저녁나절이 좋다는 걸 한동안 잊고 살았다며 청춘시절 남산 타워에 올라가 데이트 하던 추억을 꺼낸다. 남산에 오르는 초입길이나 방법은 참 다양하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오르기도 하고 바쁜 도시인이나 노약자를 위해 케이블카나 버스, 손쉽게 택시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번 밤 산행의 들머리로 택한 곳은 동국대학교, 장충단 공원이 있는 국립극장이다. 3호선 전철을 타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장충단 공원을 지나 국립극장을 향해 워밍업 하듯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남산 순환로에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는 게 보인다. 예상대로 저녁녘의 남산길은 고즈넉하고 고요해서 요즘 같이 햇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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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길~북한산 둘레길 첫 연결

서울 내사산과 외사산 첫 연결  서울 둘레길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추가됐다. 서울 둘레길은 제주도 올레길처럼 서울 도심에서 자연을 느끼며 거닐 수 있는 총 202㎞ 코스로,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나눠진다. 그런데, 만나기 힘들 것 같았던 내사산과 외사산이 연결됐다. 외사산은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 북한산을, 내사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말한다. 이번에 연결된 구간은 북악스카이웨이길 주변 하늘마루에서 북한산 둘레길 구간인 형제봉 사거리까지 1,200m로, 시는 지난달 이곳의 산책로 정비를 마쳤다. 이에 따라 북악산 와룡공원에서 북한산 둘레길까지 총 4.1㎞의 산책로가 모두 연결됐다. 북악스카이웨이(하늘마루)~여래사~형제봉 사거리까지 1,200m 구간 정비  이에 앞서 지난해에는 와룡공원에서 출발해 숙정문과 소위 김신조루트를 잇는 산책로가 정비되었고, 종로구 부암동에서 성북구 성북동까지의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와도 연결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북악스카이웨이에서 북한산 형제봉 사거리까지는 연결돼있지 않았는데, 이곳은  중간에 군부대가 입지하고 있어 대부분 이용객이 국민대학교로 하산했다가 다시 국립공원으로 진입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악스카이웨이(하늘마루)~여래사~형제봉 사거리까지 1,200m 구간이 정비됨에 따라 두 산의 연결이 가능하게 됐다. 산책로가 연결됨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북한산을 오를 수 있다. 종로구 쪽에서는 삼청동 삼청공원에서 숙정문으로 진입하거나, 성균관대 후문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 와룡공원에서 진입할 수 있다. 성북구 쪽에서는 혜화문에서부터 성곽길을 걸어 오르거나,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로 성북동 우정공원까지 간 후에 걸어서 숙정문 진입로로 접근할 수 있다. 2014년까지 내사산·외사산 사업 추진키로 서울시는 내사산과 외사산을 연결하는 사업을 별도로 추진하고 있다. 완공은 2014년 예정. 서울둘레길이 모두 연결되면 남산에 오른 뒤 북한산을 거쳐 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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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명소 예감!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소나무의 위대함을 새삼 배우고 감탄해 ③ 우이동 ~ 수유리 산기슭 따라 옆으로 가는 산행의 묘미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우이령을 빠져나와 우이동 먹을거리 마을길을 1Km 정도 내려오면 개울이 나온다. 비가 오면 시원한 물줄기가 일품인 개울을 끼고 우회전하면서 ‘소나무 숲길 구간’이 시작된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자태가 신령스러운 소나무가 유난히 많아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이다. 소나무가 빼곡한 길은 넓고 완만하여 산책을 즐기는 데 적합하다. 바로 희한한 소나무가 눈에 띈다. 집안에 뿌리를 둔 소나무가 벽을 뚫고 굳세게 자라고 있는 풍경이다. 아무래도 집 지을 때 소나무를 잘라내기가 아까워 특별공사를 한 것 같다. 그 마음이 엿보인다. 지극한 소나무 사랑이다. 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맑은 계곡 물가에서 놀다가 쓰레기를 그냥 둔 채 가버린 일부 못난 사람들의 흔적이다. 개울을 따라 가는 호젓한 길이 연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소나무가 재미있다. 굳이 소나무를 베어 버리지 않아 사람이 일부러 비켜 가야 한다. 인간이 소나무에 굴복하는 명소이다. 중간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 축소판도 재미있다. 게다가 폭포 위에 개미가 건너갈 수 있는 밧줄도 있다. 우이분소 앞을 지나 '손병희 길'로 들어가 계속 걷다 보면 호젓한 오솔길이 나온다. 우이동제일교회를 지나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면 망고강산 약수터가 나온다. 이곳 역시 우람한 소나무가 지천이다. 전국 최고의 소나무 숲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작품에서 풍기는 신비한 느낌을 받는다. 숲속 길을 나와 빌라촌을 지나면 잘 가꾸어진 솔밭공원이 나온다. 도심에서 쉽게 찾기 힘든 100년생 소나무 1000그루가 1만평 대지에 잘 자라고 있다. 주택가 한가운데 펼쳐진 넓은 숲이 다소 어색한 풍경이다. ‘소나무 숲길 구간’은 3.1Km로 1시간 40분 걸린다. 공원을 나와 조금 걸으면 ‘순례길 구간’이다. 헤이그특사인 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