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있었다.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덕수궁 광명문’

지난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건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일혈로 알려졌지만 순식간에 ‘독살설’이 매서운 꽃샘바람처럼 온 나라에 퍼졌다. 비록 일제에 의해 황실이 아니라 왕가로 격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하늘같은 존재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은 압제에 숨죽이고 있던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일었고, 승하 후 40여 일 만에 황제의 운구 행렬은 함녕전으로부터 광명문을 통해 남양주 홍릉으로 향했다. 제100주년을 맞은 3.1절 오후 덕수궁에서는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열렸다. 황제의 마지막 순간을 간직한 광명문은 고종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정문으로, 고종이 승하한 후 1938년 강제 이건되었다가 80년 만에 원래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광명문 복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민들 이전영 문화재청 복원정비과장의 경과보고로 시작된 기념식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훼손 변형한 광명문이 제자리를 찾는 오늘은 뜻깊은 날”이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자 자주주권을 지키려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고종황제의 이상이 서려 있는 이곳”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일제가 개칭해 쓴 ‘덕수궁’이 아니라 원래 이름인 ‘경운궁’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기념사를 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경운궁 현판. 경운궁 즉조당에 걸려 있던 덕수궁의 옛 이름 현판으로 고종의 어필이다. 1593년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삼았던 이 궁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한 것은 광해군이었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지며 근대화를 위한 열의를 다졌다. 대한제국 황제로서 황룡포를 입은 고종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