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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역사가 영화처럼 펼쳐지는 곳 ‘백인제 가옥’

백인제 가옥 사랑채 정원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 현재의 북촌 한옥마을이 형성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1920년경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경성이 주거 문제에 부딪히자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 기구들을 자리 잡은 뒤 일본인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청계천 북쪽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인 건설업자들은 양반들의 넓은 택지를 매입하여 작은 규모의 한옥을 지어 조선인에게 공급했다. 덕분에 일제는 북촌에 진입할 수 없었다. 특히 가회동 31번지가 대규모 한옥 단지로 개발됐는데 바로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이다. 백인제 가옥 별당 누마루에서 내려다본 북촌 한옥마을 양반들의 마을로 알려졌던 북촌이지만 크지 않은 한옥들이 오밀조밀 들어앉아 있다. 지금 북촌에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주택이 별로 없다. 가회동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고택은 윤보선 가옥이지만 이곳은 후손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저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곳은 백인제 가옥뿐이다. 소슬대문을 들어서면 꽤 넓은 행랑이 나타나고 중문을 통해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애초에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이완용의 조카로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었다. 그는 1913년부터 갖은 정성을 들여 집을 짓고 10여 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그 후 이 집의 운명은 첫 주인의 정체성과는 사뭇 달라졌다. 새 주인이 된 최선익은 1932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인수하여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한 이로, 이 신문은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결국 폐간에 이르렀다. 집안 곳곳에 백인제 가와 관련된 소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안채 안방에 놓인 백인제와 최경진의 결혼사진 백인제가 주인이 된 건 1944년의 일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3.1만세운동 당시 10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힘겹게 경성의학전문학교로 돌아와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럼에도 일제가 의사면허증을 발급하지 않아 총독부 병원에서 2년간 일한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