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연합뉴스

순례 생각만으로도 위로 받는다

영리하거나 힘이 센 것들은 순례를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힘든 여정에 오르지 않아도 자신의 영토 안에서 충분히 잘 살기 때문이다. 밥벌이에 하루하루가 고단한 부류도 고행을 하지 않는다. 일상 자체가 고행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 추방당했거나 거룩한 정신적 부담을 가진 자만이 순례를 선택한다. --해이수 소설 《눈의 경전》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5 H언니가 순례에서 돌아왔다.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45일 동안 걸었다 한다. 바다가 고향이라 회를 좋아하는 언니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떠온 송어에 맑은 술을 먹으며 그 비 오고 바람 불던 먼 길의 이야기를 들었다. H언니는 물론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마마한 시간에 그마마한 거리를 홀로 걸으면 어떤 심오한 영성을 만날 듯도 싶다.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얼굴과 목덜미가 새카맣게 타들어가면서 만나는 빛나는 무엇. 순례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여행과도 다르고 고행과도 다르다. 그 둘 다이면서 둘 중 어느 하나일 수는 없는 묘연한 울림이 있다. 사전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종교적으로는 그 종교의 발생지나 본산(本山)의 소재지,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함. 또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함. 아무래도 좀 재미가 없다. 순례에는 고독과 침묵, 그리고 자성과 순종의 독하고 알싸한 향내가 배어 있다. 함께 세속에서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길잡이가 되는 수도자까지도 깡그리 물리치고 오로지 절대와 나를 오롯이 맞대면하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비밀과 스스로조차 용서할 수 없는 죄까지 모조리 토하고 또 토해서 말갛게 텅 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을 모객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성지 순례’는 ‘성지 여행’ 정도로 그 이름이 겸손해져야 마땅하다. 그처럼 황홀하고도 고통스러운 길에 기꺼이 오르려면 영리하거나 ...
나뭇잎ⓒ오진주

여름이 다 가기 전, 고독을 권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다 보면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고독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시켜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마침내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4 여름은 고독을 누리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열기와 습도의 상승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다가붙기를 꺼리게 되고, 깊은 골방은 서늘해지고,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는 휴가와 방학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홀로 머무를 여유가 생겨도 사람들은 기를 쓰고 그것을 피하려 한다.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독은 예술가들에게나 멋있는 장식이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허물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듯하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하듯 고독의 순기능은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 타인과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진실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나 자신과의 대화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배워도(學) 홀로 익히는(習) 시간이 없으면 제대로 그 내용을 소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 데 있어 혼잣말로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아첨하는 말로 알랑거리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내게 말을 거는 방식은 낯설지만 편안하고 고요할 것이다. 깊은 침묵 속에 빠진 채로 집중해서 나를 들여다보면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던 내가 보인다. 내 결점과 약점과 허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할 수밖에 없는 애정의 지점이 보일 수밖에 없다. 고독이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만이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나 자신을 이해해야만 남을 이해할 수 있다는 ...
야경ⓒ원아이

홀려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무언가에 ‘홀려있는’ 때가 가장 좋은 때다. 성공하여 안락해지면 그때가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때다.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2 삶은 수많은 유혹에 둘러싸인 미끄러운 유리 원반 위의 팽이와 같지만, 진실로 무언가에 ‘홀려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홀림이란 유혹에 완전히 빠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다. 옛사람들은 홀림에 빠져드는 까닭을 (반드시 꼬리가 여러 개 달린)여우라든가 도깨비라든가 귀신 따위의 장난이라고 믿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기에 정체를 알 수 없고, 정체를 모르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그래야 현실을 똑바로 보고 다가올 위험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처럼 안전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대체로 열정을 희생해야 한다. 어쩐지 자기계발서의 제목 같긴 하지만, 열정이 없으면 도전도 없다. 도전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물론 성공도 있을 리 없다. 평범한 필부필부의 삶을 원한다면 아무 것에도 홀리지 않기 위해 여우와 도깨비와 귀신이 나타나는 한밤중의 어두운 뒷골목을 피해 대낮에 뻥 뚫린 큰길만 다녀야 한다. 홀림의 다른 이름은 매혹이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가 말하는 홀림은 정신을 놓았다거나 거짓에 현혹된 상태가 아니라 바로 매혹, 도취와 몰두의 단계를 말한다. 매혹되었을 때 사람은 앞뒤좌우를 재서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만 자신이 강렬하게 원하는 그것에 빠져든다. 그 단계가 더욱 발전하면 자신마저 잊는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른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예술이든 일이든 연구든 새로운 발견이든... 역사는 ‘홀려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성공과 실패조차 따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침내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언제나 삶에 이롭지만은 않다.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의 결과물로 부와 명예를 얻고 난 후 이...
책장ⓒ뉴시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나날이다

제자 자하(子夏)가 시경(詩經)의 구절을 들어 공자에게 물었다. “‘교묘한 웃음에 입맵시여, 아름답고 또렷한 눈맵시여, 흰 바탕에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고 한 말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공자는 답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자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예(禮)는 나중입니까?” 이에 공자가 답하길, “나를 일으키는 자가 너로구나. 비로소 더불어 시(詩)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라며 기뻐했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1 ‘회자후소(繪事後素)’는 공자의 문예관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말로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를 풀면 아무리 교묘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도 흰 바탕이 마련된 후에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흰 바탕이 본질이라면 나머지는 꾸밈이다. 한마디로 예의 본질인 내면의 덕성, 인격을 수양한 후에야 진정한 의미의 문학예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나날이다. 흰 바탕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채 흘러넘친 꾸밈이 거짓에까지 이르렀다. 현대의 작가에게 공자의 문예관을 따라 군자이기까지를 요구할 필요는 없겠지만 '표절'은 흰 바탕을 가장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거짓으로 거짓을 가리느라 교묘한 그림이 추악해지기까지 하였다. 당사자들은 끝까지 뻔뻔하다 못해 당당한데,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일까?! 부인할 수 없이, 문학은 이미 반죽음 상태다. 그런 문학이 저자거리에 끌려나와 조리돌림 당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는 심경이 참담하다. 물론 문학, 그 자체라기보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위선과 세상의 질서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문단의 허위를 질타하는 것이겠지만, 한때의 정백한 바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쓰리고 낯이 뜨거울 것이다. 공자 또한 막무가내로 예술가가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언지무문(言之無文), 행이불원(行而不遠)’, 즉 ‘말이 아름답지 않...
흑백사진ⓒjet96

영원히 청맹과니로 살지 않으려면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있는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 자신을 우리에게 맡겨 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에요.(...) 가장 눈이 심하게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0 역사는 진정 돌고 돌아 반복되는가? 가뭄과 역병의 창궐, 이라는 사서(史書)에서나 읽던 시정기의 일절이 생각나는 즈음이다. MERS(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초유의 사태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생눈이 멀어버리는 병이 번지고, 그렇게 눈먼 사람들은 전염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지옥 같은 수용소에 격리된다. 애초에 원인을 모르니 치유법도 없다. 아직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끔찍한 병균처럼 여기며 내치려고만 한다. 정치인들은 수용 조치 외에는 할일이 없다는 듯 무책임하게 냉소하고, 군인들은 수용자들을 합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감금되어 방치된 눈먼 자들은 너무도 빨리 인간성을 잃고 짐승이 된다. 식욕과 성욕이라는 욕망, 살인과 강간이라는 범죄, 그리고 눈이 멀어서도 여전히 인간 집단이라는 표식인 듯 엄연한 권력에 대한 탐닉과 착취...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영화는 소설만큼의 생생함을 전달하기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그 보이지 않는 ‘백색 공포’를 설명하기에는 시각적 장치에 한계가 있고, 소설 전체에 가득한 삶과 죽음의 끔찍한 악취에 대한 후각적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죽어가는 시대에 소설이 단말마처럼 세상을 예언한다....
포화 속으로 ⓒ뉴시스

“싸움터엔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6·25 당시 주목받지 못한 학도병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화 속으로` 모습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제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린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전투에서 전사한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편지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9 군인 아저씨가 군인 오빠가 되더니, 군인 친구 같다가 군인 동생 같다가 마침내 군인 아들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들이 점차 달라 보이더니, 내년이면 내 아들이 군인이 된다. 그래서 한글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에 전시된 학도병 이우근의 편지를 도저히 심상하게 읽을 ...
연못ⓒtkdgur100412

“다 내 탓이야, 다 내가 잘못이야”

사람은 자책을 할 때 나름의 쾌락을 느끼는 법이다. 스스로를 비난할 때 우리는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우리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고 느낀다. 우리의 죄를 면제해 주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고백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8 어떤 결과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신을 비관하고 책망하는 습성을 지닌 친구가 있었다. “내 탓이야. 다 내가 잘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가톨릭의 기도문을 온몸으로 실현이라도 하는 듯, 친구의 입에는 늘 자기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책과 원망의 말이 붙어 있었다. 그러면 정말 친구의 탓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은 그가 너무 비관하지 않도록 위로하기에 바빴다. 다들 그가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마음이 여리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한 발 앞선 자책이 반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때로는 그가 진짜 잘못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는 자책하고 주변에서는 위로하는 기묘한 풍경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사안이 나름 심각했던지라 몇몇 사람은 뒤돌아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이미 그는 고백성사를 마치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가 고백을 하는 대상도, 그의 죄를 사해주는 상대도 그 자신이었다는 것이었지만. 주로 손목이나 손바닥, 때로 목과 가슴과 배에서 발견되는 얕은 평행의 상처, 자해의 흔적을 법의학에서는 ‘주저흔(躊躇痕, hesitation mark)’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머뭇거리며 망설이다 남긴 상처다. 아무리 모진 마음을 먹은 사람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앞서서는 단번에 치명상을 가하지 못하고 그처럼 흔들린 패배의 흔적을 남긴다. 그런가하면 ‘방어흔(防禦痕, defense mark)’은 공격을 당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막다가 생긴 상처인데, 가해자가 휘두르는 칼이나 흉기에 다칠 ...
하늘ⓒ뉴시스

그처럼 살풍경하기에 사랑은 빛난다

사랑하는 사람은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자기 연인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는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자기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사랑은 존재들을 결합시킨다. 영원히 하나가 된다. 선행은 존재와 존재를 묶어 주고 악행은 존재와 존재를 이간시킨다. 분리란 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분리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상호적인 얽힘뿐이기 때문이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7 이토록 신랄하고 냉소적인, 어쩐지 통쾌하면서도 자꾸 슬퍼지는 소설을 읽어나가다가(왜, 어떻게 그러한지는 부디 직접 읽어보시길-대부분의 ‘좋은 소설’들이 그러하듯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후반부에 다다라 문득 숨고르기를 하듯 멈추어 섰다. 이 지독한 이야기는 마침내, 기어이 사랑으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 살아간다. 꼭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같이. 소설이 세상을 닮고 세상이 소설을 닮는다. 처절한 삶의 풍경 속에서도, 아니 그처럼 살풍경하기에 더욱, 사랑은 빛난다. 사랑은 삶의 오감을 뒤흔들고 육감을 일깨워 아무리 깊은 바다와 높은 산도 뛰어넘어 연인의 목소리를, “엄마!”라고 부르는 자식의 소리를 또렷하게 듣게 만든다. 그들은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둠이 짙을수록 별빛이 영롱하듯, 사랑이라는 결합의 선행은 분리의 악행을 통해 돌올해지고 확연해진다. 착한 마음과 행동은 나를 넘어 타인으로, 세상으로 번진다. 우연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대 없이 받은 선의는 기쁨과 행복감으로 우리의 마음을 녹녹하게 한다. 얼결에 떠안아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못했다면 당사자가 아닌 누군가에게라도 돌려주고픈 선한 충동에 휩싸인다. 그래서 결국 내가 베푼 선의의 대가는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돌려받지 못할지언정 돌고...
노을ⓒ강윤희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연약한 사람은 세상 단 한 곳에 자신의 사랑을 고정시켰고, 강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모든 곳에 펼쳤으며, 완전한 사람은 그의 사랑 자체를 없애버렸다. --성 빅토르의 휴고(Hugo of St, Victor)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6 어느덧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고향을 떠나 산 시간이 더 길어졌다. 돌이켜보면 어설프나마 문리가 트이고부터는 줄곧 고향을 떠나기 위해 발버둥질했던 것 같다. 산맥에 가로막힌 그 작고 좁은 해변 도시가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투박한 말투를 쓰는 고향 사람들은 몇 다리만 거치면 친척이거나, 친구의 친척이거나, 친척과 친구의 지인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주는 안정감만큼이나 압박감과 답답함이 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낯선 곳으로 떠나온 후, 소원대로 익명성이 주는 해방감을 마음껏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외로워질 때면 어김없이 계절을 따라 황홀하게 변하던 고향 바다의 물빛과 산색을 떠올렸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때 나는 세상 단 한 곳의 기억과 그 기억의 사랑에 붙매인 연약한 영혼이었던가 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타향보다 고향이 낯설어졌다. 어린 내가 놀던 골목, 옛집, 친구들까지도 사라진지 오래다. 구(舊)도심으로 불리는 옛 번화가는 빛을 잃은 채 초라하기 그지없고, 상전벽해나 다름없이 논밭을 밀어 세운 신시가지엔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층 아파트와 프렌차이즈 상점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고향이라는 곳에 다녀올 때마다 내 추억 속에 빛나던 고향이 하나씩 죽어간다.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 고대판 라도 되는 양, 오디세우스는 온갖 난관과 죽을 고비를 겪으며 무려 20년 동안 오로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길ⓒ재빈짱

백배 부자부터는 ‘스케일’이 달라진다

세간에서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이 길거리에서 죽는 법은 없다'고 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무릇 사람들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고, 백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사마천, 《사기》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5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령이 우연히 만난 평범한 소녀에게 홀딱 반해 그만 사고를 치는 바람에, 졸지에 아이부모가 된 미성년자 부부가 시댁인 부잣집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중이다. 이따금 가는 인터넷 요리 사이트에서 화제가 되고 때로 논쟁(?)으로 번지기에 관심이 생겨 지켜보노라니, 그 추이가 흥미롭다. 드라마에서는 분명 돈과 권력의 결합으로 형성된 위선적이고 괴악한 특권층과 그에 맞서는 이른바 '을'들의 반란을 그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특권층보다는 평범한 '을'에 더 가까울 것이 분명한 대다수 시청자들의 반응이 예상과 사뭇 다르다. 부자 시부모가 베풀어주는 것들에 감읍하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며 대드는 며느리가 얄밉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고용인들의 편에 서서 시부모를 공격하는 며느리가 꼴사납다, 주제넘게 사돈댁에 폐를 끼칠 궁리나 하는 친정도 한심하다... 그러다 전형적인 미남 미녀가 아닌 주인공들의 외모 때문에 그들을 편들어주기 어렵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데서는 실소가 터졌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가까운 평범한 여주인공보다, 실제로는 한 번도 마주칠 일조차 없는 특권층에 더 감정이입을 하고 심지어 그들을 대신해 연민과 분노까지 터뜨리는 걸까? 돈의 소유, 돈의 흐름, 그리고 돈의 의미가 바뀌었을 때 세상은 변한다. 비로소, 마침내 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비정한 진리가 역사를 통해 증빙된다. 아무러한 신념도, 아름다운 이상도, 그 근본을 뒤흔들지 못하는 한 다만 허황된 망상이거나 위험한 헛짓에 불과하다. 이러한 역사의 핵심을 찌르는, 인간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