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aceyhgo

‘모든 게 엉망’이라고 느낄 때

이것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 나는 그 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시인 모든 게 엉망이었을 때도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약물에 의존하려고도 가르침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잠을 자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시를 쓰는 법을 배웠다. 바로 오늘 같은 밤 꼭 나 같은 누군가가 읽을 지도 모를 이런 시를 위해. --레너드 코헨, 전문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9 모든 예술, 그리고 예술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예술적인 것들은 기실 생존의 기록이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질한 흔적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일수록 그 이면은 처절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그림... 그들이 그토록 아름다운 까닭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맡을 수는 없지만 진득한 쟁투의 피비린내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조부박한 세상에서 예술이, 시가, 대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에 빠질 때(이미 너무 오래된 의심이기는 하지만), 문득 레너드 코헨을 듣는다. 읽는다. 들으며 읽는다. 조금은 엉뚱하고 황당하게도, 한국에서 그는 방송 매체에서 야릇한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쓰는 〈I’m your man>을 부른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캐나다 퀘백 출신의 대표적인 작가로 먼저 시인으로 이후 소설가로 등단했으며 노래는 그 다음이었다. 물론 그의 노래는 시나 소설만큼이나, 어쩌면 언어적 장벽이 있는 먼 나라 사람들에게는 시와 소설보다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유대인 카우보이’라는 모순적인 별명을 가진 이들의 계보에 속하는 코헨은 길고 깊은 방황을 했던 사람이다. 청소년기에는 가출해 사회주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가 하면 중년기에는 돌연 티벳의 라마승으로 귀의하기도 했으니, 그를 신비주의적인 음유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는, 그가 평생을 바쳐 자신의 ‘유일한 시’를 찾아 헤맸으며 자신의 삶에 ‘유일한 시인’이 되고자 했다는 것...
공원ⓒjh94645

시간과 나이를 뛰어넘는 ‘치명적인 부끄러움’

인간이 가장 위험할 때는 얼굴을 붉히기에 너무 늙어버렸을 때보다,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을 때다. --사드(Marquis de Sade)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5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파헤친, 폭력과 공포와 성적 도착으로 뒤엉킨 작품들을 쏟아낸 사드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사후 이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학사에서 ‘가장 위험한 작가’로 손꼽힌다. 사드의 작품들은 1960년대까지 프랑스 내에서 공식적 출판이 금지되었으며, 그의 소설 은 2012년 한국에서 과도한 음란성과 반(反)인륜성을 이유로 판매금지 조치 당하기하였다(개인적으로도, 심약하거나 ‘곱게’ 자랐거나 초자아가 발달한 분에게는 일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살다보니 그냥 모르고 사는 것이 나은 경우도 왕왕 있다). 일평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살았고, ‘성적(性的) 대상에게 육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異常) 성욕’으로 해석되는 ‘사디즘’의 어원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주기까지 한, 희대의 문제아 사드가 말하는 ‘위험’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치부를 날것으로 가감 없이 드러냈던 작가로서는 지극히 아이러니하게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상태이다. ‘부끄러움’에 대해 여러 날 곱씹고 있다. 어린 날의 나는 부끄러워도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았다.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는 것이 나약한 패배자의 징후라고 멋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강하게 보이고 싶었기에 위악을 부리며 염치없이 태연하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맨얼굴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치장한 얼굴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천연스레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즈음에 이르러, 부끄러움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새삼스레 느낀다. 나이를 먹으면 세상에 익숙해지고, 세상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레 뻔뻔해진다. 그리고 뻔뻔함에마저 익숙해지면, 더 이상 얼굴을 붉히지 않게(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부끄러움은 여린 삶의 증거, 젊음의 표식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사...
아이들ⓒ뉴시스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

학창 시절에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다.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3 갓 개교한 여자중학교의 2기 졸업생이었던 내게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것만큼 무겁고도 어이없는 말이 다시없었다. 무논이 펼쳐졌던 자리를 메워 개발한 택지 지구에 덩그러니 들어선 학교의 풍경은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우리는 체육시간마다 운동장이랍시고 다져놓은 벌판에서 캐도 캐도 자꾸 솟아나는 돌멩이를 주웠다. 그늘을 드리울 만한 변변한 나무도 없어서 고스란히 땡볕 아래서 붉은 먼지를 들이켰다. 그런 지경에 ‘전통’이라니, 그건 다름이 아니라 비평준화 지역이기에 서열화 된 고등학교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명분은 그럴 듯했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 ‘신흥 명문’으로 부상한다는 게 나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빛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끔찍한 과정이었다. 한마디로 내 중학교 때의 기억은 오로지 끊임없는 체벌, 가혹한 신체적 징벌로 가득 차 있다. 1학년이나 2학년 때도 아주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3학년에 올라가 받은 체벌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할 정도다. 교사들은 자신의 몸과 외부의 기물 전체를 도구로 사용했다. 뺨을 맞고 귀를 잡히고 머리채를 꺼둘릴 때도 있었지만, 성적과 관련된 체벌에는 주로 밀대 걸레 봉, 빗자루 봉, 회초리, 지휘봉 등이 사용되었다. 단체기합도 빈번했다. 그러니 아무리 나 혼자 성적이 좋대도 소용없었다. 어느 모의고사가 끝난 뒤에는 운동장 뒤편에서 3학년 전체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기도 했다. 1시간을 꼬박 그렇게 앉아 있다 일어났을 때 다리에서 느껴지던 기괴한 이물감은 지금도 몸을 저릿하게 한다. 내 곁에서 친구들이 벌목된 나무처럼 쿵, 쿵 쓰러졌다. ...
동산ⓒ동쪽에별

그저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 그뿐!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된다. 성인은 이를 사용하여 지도자가 된다. 하지만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자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제28장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2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이른바 오지라고 불리는 산골 깊숙이 은둔해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남들이야 뭐라든 나물 먹고 물마시며 ‘자연인’으로 사노라 한다. 어쨌든 (흔히 ‘정상’과 혼돈되는) ‘보통’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그들의 모습에 백석의 시 의 일절이 언뜻 겹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리 떠났을까, 오죽하면 그리 숨었을까. 각각이 다른 사연이야 제쳐두더라도 세상의 환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마음만큼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가슴 한가득 비탄과 분노를 품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미워하는 도시는 화려한 문명의 혜택만큼이나 쓰라린 상처를 준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경쟁하고 짓밟고 오르며, 우리는 바늘 끝에서 간신히 서로를 딛고 산다. 나는 산골에서 도시아이처럼 자랐다. 골짜기 마을에서 살며 배를 타거나 농사를 짓는 부모를 두었던 친구들과 달리 부부교사인 부모와 함께 비탈 꼭대기의 학교 관사에서 살았다. 도시로 돌아와서는 산골에서 온 아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녔다. 그렇게 ‘이곳’에서 ‘이렇게’ 살지 못하고 ‘저렇게’ 살다 보니, 도시도 산골도 서름하기만 하다. 산골을 그리워하면서도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서도 멋들어진 도시인처럼 살지 못한다. 도시도 무섭지만 산골도 무섭다. 그리하여 두려움과 게으름으로 오도 가도 못할 때, 맥없이 노자를 펼쳐 읽으며 내가 떠나왔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한다. 가능성과 잠재력이란 말은 누군가에 대한 격려이자 희망이다. 그런데 여기에 노력하면 반드시 이룬다는 신화가 결합하여 ‘그저 보통의 존재’인 개인에게 압박과 부담이 된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 다듬지...
ⓒ연합뉴스

무엇에도 끝끝내 훼손당하지 않도록

나는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익숙해졌고 나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놓고 모욕을 받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받는 교육의 일부분을 이룬다. 오래전부터 나는 더는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나는 인간이란 결코 웃음거리가 될 수 없는 무엇임을 잘 알고 있다. ㅡ 로맹가리 《새벽의 약속》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1 너무 작은 땅덩이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부대끼며 너무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일까, 한국 사회의 ‘관계’는 지나치게 바투고 다밭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기어이 오지랖으로 발휘되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재단하고 심판하기에 바쁘다. 이를 테면 날씬한 몸매는 건강과 미용을 위해 좋다. 하지만 뚱뚱한 몸매를 가진 사람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에 대한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고소득을 보장하는 좋은 직업은 안정적인 생활과 풍요를 약속한다. 그렇지만 적은 수입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웃고 폄하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에서 권장할뿐더러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하는 커플에게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다고 비난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식이다. 모욕과 조롱은 어느덧 서로의 약점과 허점을 흠뜯어 ‘디스’하는 힙합 배틀을 넘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악마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수많은 긴장과 압력들 중에 칼춤을 추는 잣대와 기준이 함부로 휘두르는 모욕과 조롱도 분명히 한 몫을 하고 있다. 서로 ‘리스팩트(respect,존중)’하지 않는 개싸움에 ‘스웨그(swag,자유·만족)’가 있을 리 없다.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 정의롭고 훌륭한 것은 말마따나 올바르고 아름답고 정의로우면서 훌륭하지만, 그것의 기준이 자의적이 되는 순간 폭력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그야말로 잣대와 기준 없이 난무하는 잣...
함께ⓒ사월

천당이냐 지옥이냐, 공생이냐 공멸이냐

어느 신부님이 농담으로 말씀하시기를, “요즘 천당에 갈 수 있는 표 중에 개인 티켓은 매진되고, 단체권밖에 남지 않았다.”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이 “자기 혼자만 살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개인 티켓은 다 팔리고, 이제 세상 사람들이 선한 생활을 함께 해서 모두 천당에 가든가, 아니면 계속 핵무기를 생산하고 지구를 오염시켜서 지옥으로 직행하든가 하는 일만 남았다.”라는 것이다. -- 김영 《인문학을 위한 한문강의》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0 나이차가 존시간에 가까운 선배님께 ‘후배님께’라는 서명이 적힌 책을 선물 받았다. 한때 나는 선배고 후배고 모르던 방자한 인간이었지만, 이제 조금은 철이 나려는지 어쩌는지 좋은 선배와 후배를 만나면 뒷배를 얻은 듯 든든하다. 여기서 뒷배란 학연이나 지연을 내세워 이익을 몰아주고 흠결을 눈감아주는 음흉한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성공의 세속적 잣대인 돈과 권력이 아니라 수신(修身)과 진정한 의미의 명예를 가진 선후배이니 서로 얻고 잃을 것을 셈하지 않을 수 있어 더욱 기쁘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강의하며 한문산문을 대중화하는 작업을 하는 김영 선배는 지금 내가 쓰는 글처럼 동양고전에 사색의 각주를 달아 놓았는데, 그 겸손한 작은 글씨들이 유독 재미있다. 신부님에게서 들은 ‘천당 단체권’에 대한 이야기는 《맹자》의 일절을 설명한 글에 포함되어 있다. 그 구절이란, “옛사람들은 뜻을 펼칠 수 있는 지위를 얻으면 혜택을 백성들에게 베풀고, 뜻을 얻지 못하면 수신을 하여 세상에 모범을 보이고, 곤궁하면 홀로라도 선한 행동을 하고, 출세하면 천하와 함께 선행을 행하였다”는 대목이다. 글귀를 옮기며 다시금 새겼을 지식인으로서의 자각과 고민이 선명하다.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세상이 점점 나아지리라는 희망보다는 점점 나빠지리라는 절망이 우세하다. 지위를 얻으면 혜택을 베풀기보다 독점하기에 급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수신하여 모범이 되기보다 불평불만의 가시를 세운 고슴도...
아이들ⓒ박준덕

부모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이다

“장차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지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에게 부모를 그리라고 하면 대개는 싫어해요. 그리고 싶지 않은 거죠. 그래도 억지로 그리라고 하면-실력이 있는 아이들이니까-굉장한 그림이 나와요.” “1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의 아이들은, 저 자신을 돌이켜봐도 그렇지만, 인생에서 자아가 가장 활성화되는 시기예요. 부모의 자아라는 중력을 뿌리치고 탈출하기 위해 잔뜩 날카로워지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는 너무 멀어지는 거예요. 부모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너무 멀리까지 가버리는 거죠.” “제 스승은 중고등학생에게 그런 부모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그림을 소중히 간직해라. 이것이 바로 지금, 너희들의 젊은 영혼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그림을 약간의 부끄러움과 깊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어른이 되어라.” - 미야베 미유키 소설 《낙원》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9 부모는 아이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창이다. 그것을 통해 언젠가 자신이 나아갈 바깥세상을 내다본다. 그런데 때로 그 창이 불투명하다거나 아이의 눈높이와 맞지 않는 곳에 자리했을 때, 그것은 벽이 된다. 벽이 된 창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아이를 차단하고 가둔다. 창 대신 벽으로 둘러싸인 집은, 둥지가 아니라 감옥이다. 창이든 벽이든,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에 있는 아이라면 그것을 뚫고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소설의 주인공 히토시의 미술 선생 하나다의 말처럼, ‘부모의 자아라는 중력을 뿌리치고 탈출하기 위해 잔뜩 날카로워지’다 못해 ‘너무 멀리까지 가버리’기도 한다. 정직한, 그리고 건강한(여기서 ‘건강’이란 최소한 부모의 중력을 느끼고 스스로 탈출을 시도하는 적극적인 힘을 가진 상태를 말한다) 빠삐용들이 그리는 부모의 초상은 때로 과장된 형상과 괴이한 빛깔을 띤다. ‘자아가 가장 활성화’되던 그때에, 나는 부모를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꽉 막힌 사람들로 취급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
광장시장 ⓒ정혜윤

정신적 허기에 의한 탐식에 가까운 ‘먹방’

광장시장 - 동물은 삼키고, 인간은 먹고, 영리한 자만이 즐기며 먹는 법을 안다. -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 식탁은 첫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유일한 자리다. -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 -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은 그가 내 집 지붕 밑에 있는 내내 행복을 책임지는 일이다. 브리야 사바랭 《미식 예찬》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8 바야흐로 ‘먹(는)방(송)’의 시대다. 공중파와 종편과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일주일 내내 빠짐없이 요리와 요리 품평과 요리 경연 프로가 방영된다. 덩달아 요리사, 요즘 말로 ‘셰프’들은 토크쇼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불려 다니고, 주인공의 직업으로 드라마에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너무 자주 많이 먹으면 질리고 물리는 것처럼 머지않아 슬슬 지겨워질 때가 오겠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기세로 콘셉트만 조금씩 바꾼 요리 프로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한국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간 바람이란다. 요리와 음식 프로그램들은 버블이 꺼지고 깊은 경제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 일본인들의 공허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텔레비전 속의 요리와 미식(美食)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럼에도 지지고 굽고 끓여서 후루룩 짭짭 맛있다 기막히다 최고다 떠들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리만족한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식욕이야말로 삶의 본능 그 자체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배부른 돼지냐 배고픈 소크라테스냐, 식욕과 대립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머지 욕망 전부를 동원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기 밥그릇을 지키거나 남의 밥그릇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고, 브리야 사바랭의 잠언 중 가장 유명한 말대로 자기가 먹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미식의 정의는 그...
산모ⓒ뉴시스

무거워진 몸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은…

수우 족의 언어에는 임신을 뜻하는 낱말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에는 ‘강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어떤 낱말은 ‘과도한 짐을 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메리 크로우 도그 《내 이름은 용감한 새》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7 인디언, 혹은 아메리칸 인디언, 네이티브 아메리칸, 아메린디언스(Amerindians)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 중에 수우(Sioux)이라는 부족이 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라는 기도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수우 족은 평원의 인디언 부족들 중에서 가장 완강하게 자신들의 땅을 침범한 백인들에 맞서 싸웠다. 미국 정부에 항복한 후에도 수우 족의 추장들은 전사들을 이끌고 보호구역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다가 1890년 12월 운디드니에서 대학살 당한 후 마침내 흩어졌다. 영화 에서 주인공이 함께 살게 되는 부족이 바로 수우족 중에서 가장 서쪽에 살던 테톤족이다. 그들의 슬프고도 무섭고 아름답고도 잔인한 역사는 차치하고, 서울 지하철에서 기존의 임산부 배려석을 눈에 잘 띄는 ‘분홍색 디자인’으로 바꾼다는 소식과 그것을 둘러싼 설왕설래를 들으니 문득 수우 족의 언어에서 ‘임신’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떠올랐다. 기존의 지하철 좌석 중에도 노인, 장애인, 임산부를 위한 ‘교통약자석’이 있고 임산부와 영유아 동반자를 위한 ‘배려석’이 있지만, 새로운 조처는 그것으로는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같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임산부를 보호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을 개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까지 표시를 내며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불편해 하는 이들도 있고, 한편에서는 ‘미래의 주인공’을 생산한다는 의미로 여성성을 제한 당한다는 데 불쾌해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임...
말ⓒ뉴시스

비밀을 고백하면 비밀의 노예가 된다

적에게 알려서 안 될 일은 친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비밀을 지키면 비밀의 주인이 되지만 비밀을 고백하면 비밀의 노예가 된다. 평화의 열매는 침묵의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다. --아라비아 격언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6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다는 것은 나의 말에 남의 말이 더하여 빚어지는 헛소동이 끊이지 않음을 뜻한다. “쉿! 이건 비밀이야. 꼭 너만 알아야 해!” 어린 날 계집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비밀스런 약속을 속삭였던가. 고백과 폭로의 욕구는 멀쩡한 입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공유해 공범을 만들면서 결속을 다지는 일도 흔했다. 친구란 결국 남들이 모르는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내 입을 떠나는 순간 너만 알라는 그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고, 비밀을 전한 사람도 비밀을 전해 받은 사람도 비밀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어버린다. 노예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자기의 의지로 행동하지 못한다. 결국 예정된 파국! 누구의 입에서 나와 어떻게 전달되었는가를 따지는 시시비비는 무리 사이에서 빚어지는 가장 흔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비밀 아닌 비밀은 어린아이들끼리의 장난 같은 구설이 어른이 되면 사라지려나 했더니,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게 없다는 사실이다. 불교에서는 입을 화문(禍門)이라고도 부른다. 개구즉착(開口則錯), 입을 여는 순간 진리와 십만 팔천 리는 동떨어지게 됨은 물론이거니와 잘못 벙긋거리다 보면 모든 재앙과 액화가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입이 먹는 용도로만 쓰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할 말은 마땅히 해야 할 테지만,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반드시 소용이 없는 헛된 말이 섞여 나오고 때론 말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말이 많아서도 문제지만 해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도 큰일이다. 평생토록 시시비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볼테르 왈,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고 했다. 실로 악의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다만 할 말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