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작가 김남영

“일기는 고독한 위안이자 치유다”

일기는 고독한 인간의 위안이자 치유다.날마다 기록되는 이 독백은 일종의 기도이자 영혼과 내면의 대화, 신과의 대화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혼탁에서 벗어나 평형을 되찾게 해준다. 의욕도 보장도 멈추고,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게 된다. 일기를 쓰는 행위는 펜을 든 명상이다. -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아미엘의 일기》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9 나는 7살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아직도 고향집 창고에는 엄마가 라면 박스에 차곡차곡 모아둔 일기장들이 세월의 먼지를 이고 쌓여있다.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하고 그리기를 좋아하지도 않아서 그림 일기장에도 빼곡하게 글만 썼다. 결국 글 밖에 다른 무엇으로도 나를 표현할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되리라는 전조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나는 몸과 마음이 자주 아팠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일에 쫓겨 허둥지둥 바빴고 집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기보다는 찬 방바닥에 배를 깔고 혼자 놀기에 익숙했다. 외톨이에게 대단한 하루 일과가 있을 리 없었다. 매일 매일이 닮은꼴로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서 쓸 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항상 쓸 거리를 만들어냈다. 기분이 나쁘다고 썼다. 엄마 때문에, 동생 때문에, 무언가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썼다. 억울하고 슬프고 우울해서 기분 좋은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고 썼다. 내 일기장의 제목은 ‘기분 일기장’이었다. 상처 받은 아이의 일기장은 감정의 요철로 울퉁불퉁했다. 사춘기 때는 열쇠로 잠그는 일기장이 유행했다. 별다른 비밀도 없는 글을 끄적거릴 때마다 비밀처럼 꼭꼭 숨겼다. 대학에 와서도 계속 일기를 썼다. 예전만큼 매일 강박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머리맡에는 언제나 호흡의 기록 같은 일기장이 있었다. 그때는 글이 쓰고 싶다고 글을 썼다. 언젠가 글만 쓰며 살고 싶다고 글을 썼다.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창작은 내가 가진 모든...
도서관ⓒ뉴시스

세상에 선비가 무슨 소용인가?

학업을 위한 공부든 참된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든, 그것이 기쁨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지요? 정말 기쁨 속에서 공부하고 책을 읽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반성하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답을 알고 있나요? 저는 《논어》에 나오는 세 번째 구절, 그러니까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면 군자”라는 말에서 깨달을 바가 많다고 봅니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사람은 누가 알아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성낼 일이 없는 것이지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라야 기쁨이 됩니다. 사회에서 가라고 해 억지로 선택했다면 짐이 되고 말겠지요. 그 길은 가시밭길일 터이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봐 안달을 부릴 가능성이 큽니다. - 이권우,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8 나 역시 책을 쓰고 펴내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서 갓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을 증정 받고 이상스럽게 뭉클한 감정이 들 때가 있다. 그것에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을수록, 제목이며 표지가 주인을 닮아 소박하고 담담할수록, 공으로 받는 손이 부끄러운 마당에 주는 사람이 먼저 얼굴을 붉힐수록 그렇다. 어찌어찌한 인연으로 이따금 여럿이 만나 찬술 한 잔씩 기울이는 사이가 된 도서평론가 이권우 선생의 신간을 받았을 때 꼭 그랬다. 그는 한사코 축하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표지에 적힌 “무엇을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가 요즘 내 고민거리였는데 열심히 읽어보겠다고 ‘진심으로’ 말했는데도 변변찮은 글을 그리 여길 필요 없다며 화들짝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것이 의례적인 겸양의 제스처가 아님을 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다. 옛적 어느 한적한 시절에 태어났으면 일평생 초야에 파묻혀 책을 읽으며 백면서...
석양ⓒ시민작가 강명훈

자아실현, 얼마나 꿈같은 소리인지…

여러분은 삶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소중하고 영원하며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과, 반대로 사소하고 우습고 일시적이고 아무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혜로 둘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소음으로 시끄럽게 만드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에 매달려야 합니다. --E. F. 슈마허 《굿 워크(Good Work)》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7 천재적인 경제학자이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유명한 실천적 사상가 슈마허가 생애 마지막으로 강연한 대상은 ‘노동자’였다. 자본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고, 우리 대부분은 노동자다. 작가라는 직업 또한 ‘지식 노동자’이며, 다만 그 노동의 형태나 내용이 다른 것들과 조금 다를 뿐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자’라는 말이 곧이곧대로 쓰이지 않는다. ‘근로자’라는 이상스럽게 촌스러운 단어로 대체되기도 하고, 홍길동이 홍판서에게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고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하고 부르짖었던 옛날 코미디처럼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고 부르지 못하는(않는) 경우도 숱하다. 막일꾼을 가리키는 ‘노가다’라는 속어와 혼동되어 “신성한 직업인 교사가 어떻게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른단 말인가?!”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드라마로도 방영된 말처럼 “제가 왜 노동자인가요? 저는 S그룹 들어갈 건데요!”라는 식으로 부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동한다. 노동자로 산다. 노동은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를 통해 인간 존재를 보여준 까뮈가 말한 대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한없이 쉬고 노는 삶을 부러워하곤 하지만 그런 무위도식의 삶은 반드시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까뮈는 이 진리에 한 가지 중요한 덕목을 부언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는. 이것은 철학자 ...
ⓒ시민작가 남효진

눈은 밝게 뜨고, 말은 어눌하게

식견은 무겁게(識欲沈) 기운은 날카롭게(氣欲說) 힘은 진중하게(力欲定) 담력은 결단성 있게(膽欲決) 눈은 밝게(眼欲明) 말은 어눌하게(口欲訥) - 황순요, 《자감록(自監錄)》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6 새해가 밝았다.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오늘이지만 날짜를 적어 넣는 앞머리가 새로운 만큼 마음은 얼마간 다를 수밖에 없다. 기실 나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믿음 하에 기대하지 말아야 실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별간장이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변해보려 애쓰는 눈물겨운 시도까지 반대할 생각은 없다. 아니, 권장하고 격려한다. 끝끝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고 또 굴리는 시시포스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상징이 아니런가?! 그런데 변하고 싶다, 변화시키겠다는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변하고 싶은지,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은지를 아는 것이 더 긴요하다. 잘못 변하면 더 나쁘게 변한다. 나쁜 세상에 나쁘게 적응하다보면 차라리 예전보다 못해지는 경우가 숱하다.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되고, 어리보기가 세상 물정을 알았나 싶더니 속물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변할 것인가?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고 운동과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는, 그런 뻔한 것들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을까? 바로 이럴 때 앞서 시간을 살아냈던 옛사람들의 지혜가 소중하다. 황순요는 명나라 말기의 문인으로 혼란의 시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냈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해 열심히 학문에 힘쓴 그였지만 난세에는 홀로 온전할 길이 없었다. 청나라에 항거하는 민중봉기에 지도자로 추대되었다가 성이 함락되자 친동생과 함께 암자에 들어가 목을 매어 자살했으니, 그 비극적인 생의 후반기가 절개와 지조의 한평생을 증명한다. 난세의 문사 황순요는 스스로를 이렇게 살피고 경계했다. 사물을 분별하는 식견은 가볍지 않고 무겁게, 살아 움직이는 기운은 둔하지 않고 날카롭게...
그믐ⓒ뉴시스

민낯의 나를 만나는 섣달 그믐밤

한 해가 막 끝나는 날을 섣달그믐(除日)이라 하고, 그 그믐날이 막 저물어 갈 때를 그믐날 저녁(除夕)이라 합니다. 네 계절이 번갈아 갈리고 세월이 오고가니,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 10년의 세월이 어느 날인들 아깝지 않겠습니까마는 유독 섣달 그믐날에 슬픔을 느낍니다. 그것은 하루 사이에 묵은해와 새해가 바뀌니, 사람들이 늙음을 날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날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실은 그 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그 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늙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저의 감회는 이런 것들과 다릅니다. 저는 덕을 닦지도 못하고 학문을 통달하지도 못한 것이 늘 유감스러우니, 아마 죽기 전까지는 하루도 유감스럽지 않은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해가 저무는 감회는 특히 유감 중에서도 유감입니다. 이로써 저는 스스로 마음에 경계합니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지나가고,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에게 칭송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성인은 싫어했다. 살아서는 볼 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하략)” --이명한(1595-1645), 1616년 광해군 8년 증광회시 책문에 대한 대책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5 그해 왕이 대과의 마지막 관문에 들어선 33인의 수험생에게 냈던 논술 주제, 책문(策問)은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였다. 1608년부터 1623년까지 15년간 재위한 광해군이 조선의 왕으로 살았던 시간의 한가운데, 바로 그때였다. 대과의 합격자들은 조선의 인재 중 인재로 왕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들이었으니 그들을 향한 책문이야말로 시험을 뛰어넘는 중요한 대화이자 비전(vision)의 제시였다. 세종대왕은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
비ⓒ연합뉴스

정녕 우리에게 ‘필요’란 무엇일까?

오늘 오전에 새로 발명된 깃펜 깎이를 샀습니다. 깃펜을 깎을 때 번거롭지 않아서 정말 기쁘더군요. 하지만 그 물건의 존재를 몰랐을 때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어요. 페트라르카가 고작 커피를 못 마셔봤다는 것 때문에 불행했을까요? --스탕달 《연애론(De l'Amour)》 중에서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4아이의 친구 엄마 중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그녀의 주 업무는 스스로 정리정돈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간을 청소하고 재배치해주는 일인데, 그 외에도 부수적인 업무가 뒤따른다 한다. 엄청나게 넓은 대저택이 아닐 바에야 만만찮은 비용까지 지불해가면서 정리정돈 할 것이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 그녀가 사진으로 찍어둔 ‘Before-After’를 보면 왜 전문가가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평범한 집의 공간이라 해봤자 거실, 주방, 침실, 드레스룸, 베란다나 신발장 정도가 전부인데, ‘Before’의 사진에서는 실제로 그 구분이 거의 없다. 모든 곳에 물건이 층층이 겹겹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들은 최소한 물건들을 사서 쌓을 만큼의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미 가진 것을 또 사거나, 혹은 산더미 속에서 이미 샀던 물건을 찾지 못해서 다시 산다. 한 번 입고 던져버린 옷,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물건들이 숱하다. 그것이 짐이 되어 그들을 짓누르고, 그 엄청난 산더미를 파헤칠 일이 두려워 당장 필요한 만큼 또 산다.정리수납전문가는 버리고 남길 것을 구분해 제자리에 배치하고 집주인에게 수납의 요령을 가르쳐준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부수적인 업무, 집과 짐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집주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무기력을 증상으로 하는 우울증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원인으로 마음을 앓고 있다. 최소한 가지고자 하는 욕망과 필요를 조절하는 절제 사이의 불균형이 병적인 수준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자본주의는 필요 이상의 물건을 과잉생산한다. 광고는 끊임없이 신제품을 선전하고 그것에 홀린 사람들은 지금까지 잘 쓰던 것들을 ‘...
트리ⓒ연합뉴스

이해받고 사랑받을 때 가장 빛난다

번지가 공자께 여쭈었다. “어짊(仁)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번지가 다시 여쭈었다. “앎(知)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을 아는 것이니라.” --공자 《논어》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3 공자의 제자 중에서 스승의 수레를 몬 사람은 번지와 염유 두 사람뿐인데, 그 중에서 번지는 질문을 잘하는 학생이었다. 어짊을 묻고 앎을 묻고 정치를 묻고, 묻고도 이해가 안 되면 또 묻고, 옆의 친구에게까지 물어 확인했다. 그리하여 궁금한 게 많고 이해가 안 되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번지 덕분에 우리도 성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질문들 중에서도 《논어》의 중심 주제인 인(仁)과 지(知)를 물은 것으로 번지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진다. 말몰이를 하면서도 배우려는 열의가 있으면 지척의 거리에 마주앉은 애제자가 부럽지 않다.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인, 사람을 아는 지, 그처럼 명쾌한 배움은 다시없을 것이다. 어진 이는 편벽됨이 없으니 차별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한다.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애정의 조건이 된다. 알기 위해 배우고 공부하고 다시 가르치지만, 그 공부의 근본은 다름 아닌 사람을 아는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사람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심오한 철학이나 종교, 문학예술 전부가 기실 이 간명한 진리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결국엔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고민하고 궁리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철학과 종교와 예술의 핵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롯해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인류의 고백이기도 하다.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각각이 살아내기 힘들고 고단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다붙어 살아가다 보니 아웅다웅할 수밖에 없다. 어진 마음은 편...
노을ⓒ뉴시스

처세란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

태평한 세상을 살아감에는 몸가짐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 좋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원만히 살아가야 하며 말세에는 방정함과 원만함을 아울러 가져야 한다. 착한 사람은 너그럽게 대해야 하고 악한 사람은 엄하게 대해야 하며 보통 사람들은 너그럽고도 엄하게 대해야 한다. --《채근담》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2 이제 조금쯤은 살아가는 법을 알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가까워지니 하늘의 뜻까지야 알지 못하더라도 세상살이의 이치쯤엔 어섯눈을 떠야 마땅할 텐데, 모르겠다. 갈수록 더 모르겠다. 본디 자존을 내세우며 오만불손하여 세상을 사는 이치니 법칙이니 하는 것들은 귓등으로 들었는데 정말 처세술이 필요한 시기가 왔나 보다. 난세는 과연 어떻게 견뎌야 하나? 태평성대에도 살펴야 할 몸가짐새가 있는지, 말세라면 어찌 처신해야 할지 궁금해졌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뭇 베짱이 두둑했다. 그들의 유행가를 요즘 식으로 풀어 보자면 대략 이렇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휴식하지. 내 손으로 내가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는데, 임금이 나랑 무슨 상관?” 임금의 이름조차 알 필요가 없을 만큼 권력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던 시절, 그런 때가 바로 태평성대였다. 《채근담》에서 가르치는 처세는, 그럴수록 스스로 말과 행동을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경거망동이야말로 평화를 해치는 악재이므로. 반듯한 사람들은 패악을 부릴 일이 없기에 평화는 통제 없이도 마땅히 유지되었다. 말하자면 ‘법 없이도 사는’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어지러운 세상, 난세에는 가능한 한 원만하게 살라고 한다. 원만함이란 결국 성격이 모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것인데, 이것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비겁한 사람들을 위한 덕목이다. 난세에 도리어 영웅이 났다. 영웅이야말로 원만함과 정 반대편에 있는 강강하고 까칠한 사람이다. 영웅의 자질을 가진 자도 태평성대에 태어났다면 마을 축제의 힘겨루기 대회 우...
나무ⓒaandd

“어쩌란 말이야? 난 할 만큼 했다고!”

인간은 곤란함을 피한다. 탐구를 견뎌내지 못하는 탓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희망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심오한 부분도 배척한다. 미신 때문이다. 경험의 빛도 거부한다. 자신의 오만함과 자존심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하잘 것 없고 덧없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낯설고 모두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도 외면한다. 통속적인 견해를 이기지 못하는 탓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1 듣는 순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의 원칙은 ‘첫 번째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은 도무지 알 수 없어도 그 말만은 사무치게 이해된다. 그 원칙이야말로 학문과 연구뿐만이 아니라 삶과 관계 모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과장을 포함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사기꾼이다. 자기를 속이기에 골몰하고 또 잘 속아 넘어간다. 기실 사기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욕망 혹은 욕망으로 인한 과실이 맞물렸을 때 일어나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데는 남들을 속이는 것만큼의 공력도 들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나의 취약점, 어떤 헛된 욕망을 품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를 정연하게 표현해 ‘인간의 오성은 냉담한 빛(명료하고 불편부당한 견해)이 아니라 욕구와 감정에 의해 고취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욕구와 감정 탓으로 ‘희망에 종속된 과학’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실제 사실보다도 자신이 진실이었으면 하는 것을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곤란함을 피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의 심오한 부분이나 경험으로 얻은 지혜마저 거부한다. 낯설고 모두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것이 바로 ‘창의성’의 출발점이다!)을 끝끝내 외면한다. 말로는 변화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무지개ⓒ정선화

최선을 다해 살면 그런 용기 낼 수 있을까?

겁쟁이는 실제로 죽기 전에 여러 번 죽지. 하지만 용감한 자는 죽음의 맛을 오직 한 번만 볼 뿐이야.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0 나이가 가르쳐준 교훈 중 하나는, 경사(慶事)는 다 챙기지 못하더라도 조사(弔事)는 되도록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쁨도 진심으로 같이 나누기 만만찮은 것이지만 슬픔이야말로 같이 나눌 필요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H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염치가 과한 H언니가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먼 길 오는 일이 폐가 된다며 가족끼리 장례를 치러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전해 듣고 미안함과 섭섭함이 뒤엉킨 채 펄펄 뛰었지만 상주의 의지가 강하니 초대받지 않은 문상객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호상(好喪)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4년생으로, 백수를 이태나 넘겨 102세까지 사셨다. 그리 연로하시면서도 병치레를 하지 않았고 제주도의 풍속대로 자식과 같은 대문을 쓰면서도 부엌을 따로 써서 끼니를 손수 해결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식에게 대소변 한번 받아내게 하지 않았으니, 조쌀하기가 어지간한 양반이었다. 그 아버지의 그 딸, H언니가 누굴 닮았겠는가? 하지만 호상이라고 말하려니 가슴이 애절하고 우릿하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곡기를 끊으셨다. 102살이면 살 만큼 살았다고,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스스로 떠나기를 결정하신 것이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강제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자식들은 그저 조용히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마지막을 결정하고 떠나는 분을 나는 꼭 세 번 보았다. 나머지 두 분은 투병 중 회복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치료를 중단하고 주변을 정리한 뒤 곡기를 끊으셨다. 세 분 모두 살아생전 대단히 강강했던 분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고 얌전했으며 섬세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