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00주년 전시…첫날부터 뜨거웠다

시민기자 김수지

Visit361 Date2016.06.07 14:49

이중섭`백년의 신화` 전시회 표를 구매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이중섭`백년의 신화` 전시회 표를 구매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미술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중섭의 작품 <황소>를 보면 ‘아~ 이 그림!’하고 익숙하게 느낄 것이다. 그만큼 한국 근대 서양화의 대가인 이중섭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작가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런 그가 올해 탄생 100주년, 작고 60년이 되었다니 올해는 이중섭이라는 작가를 기념하기에 적절하기 그지없다. 마침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개관 첫날이 평일이었음에도 약 1,600명의 관람객이 전시회를 찾았다니, 이중섭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빈곤한 삶 속에서도 예술의 혼을 불태운 이중섭

빈곤한 삶 속에서도 예술의 혼을 불태운 이중섭

이중섭은 1916년에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1956년에 생을 마감했다. 오산보통고등학교에 재학하며 미술에 대한 꿈을 품었고, 1935년 도쿄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문화학원’로 옮겨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신인 작가로서 발을 내딛었고, 학교의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과 인연을 맺게 된다. 한국 근대기를 살았던 그의 삶을 생각하면 한없이 처절하고 격동적이다.

한민족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그려낸 `흰소`를 배경으로 한 팜플렛

한민족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그려낸 `흰소`를 배경으로 한 팜플렛

일제 강점기에도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소’를 그리며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였고, 6·25전쟁 속에서 피란을 다니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계속해서 남겼다. 하지만 그런 그의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비해 그의 말년의 삶은 춥고, 가난하고, 외로웠다. 1952년에 전쟁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 이후 가족들을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사업도 해보고, 작품도 팔았지만 사기도 당하고 수금도 제대로 되지 않아 빈곤한 삶을 벗어나지 못 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소위 ‘먹고 사는 일’도 온전하지 못했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숭고한 예술혼을 죽는 마지막 날까지 치열하게 불태웠다.

이중섭의 작품 엽서를 구입하는 사람들

이중섭의 작품 엽서를 구입하는 사람들

이번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최초로 개최하는 이중섭 개인전이다. 50여개의 소장처에서 모은 이중섭의 유화, 수채, 드로잉, 은지화, 엽서 등 작품 총 200여점과 이중섭과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함께 전시되었다.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이 된 이번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 준비했는지 촘촘한 짜임새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배우 이정재 씨가 오디오 가이드 녹음을 하여 친숙한 목소리로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중섭의 많은 작품을 한 곳에 모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전시의 매력이지만, 그가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번역해서 전시한 섹션에서는 뭉클한 슬픔과 그리움을 피부도 느낄 수 있다. 아내에 대한 찬사와 사랑의 표현이 낯간지러울 정도로 애틋했던 사랑꾼 이중섭의 면모도 볼 수 있고,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미안함과 절절한 그리움은 관람객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한 쪽에서는 ‘그리움으로 그린 편지’라는 코너를 준비해 관람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눈에 띈다.

이번 전시에서는 화가로서 천재적인 이중섭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함께 느낄 수 있어 한층 더 생생하게 이중섭을 만날 수 있다.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해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그림을 손에 잡았던 그의 치열했던 삶을 곱씹어보며, 지금 우리의 삶과 행복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Creative Commons 저작자 표시 비영리 사용 변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