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는 사라지지 않는다...다시 태어날 뿐
서울사랑
발행일 2016.06.08. 15:40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이자 산업화의 상징, 서울의 랜드마크였던 세운상가가 언젠가부터 서울시의 도시 환경을 해치는 골칫거리가 됐다. 세운상가군 중 하나인 현대상가가 철거되면서 세운상가가 없어졌다고 여기는 서울 시민도 많다. 하지만 세운상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서울의 기를 다시 모으고 있다.
1960년대 강북 한복판에 거대한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슈퍼마켓은 물론 골프 연습장과 헬스클럽까지 있었고 입주민도 상위 10%의 재력가, 권력가였다. 지금의 타워팰리스에 비견될 만큼 초호화판이었다. 1970년대에 1990년대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곳, 그곳이 어디일까?
바로 종로4가의 세운상가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운상가라고 하면 종묘 맞은편에 있는 세운상가만 떠올리는데, 종로를 시작으로 을지로를 지나 퇴계로로 이어지는 세운상가가동,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등 8개의 큰 건물군을 통칭하는 말이다. 현재는 종묘 바로 앞에 있던 현대상가가 허물어지고 7개의 건물이 남아 있다.
세운상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소이탄(불을 질러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폭탄) 투하에 대비해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곧게 뻗은 소개 도로를 만들었다. 그런데 완공 두 달 뒤 패망했고, 한국전쟁으로 생긴 피란민들이 이 도로에 판잣집을 지었다. ‘종삼’이라고 불리는 사창가도 생겨났다.
1960년대 도심 재개발 사업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의 눈에 이 빈민가는 눈엣가시였고, 건축가 김수근의 제안으로 서울의 랜드마크를 짓기로 했다. 처음 설계한 세운상가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 보행 덱, 공중 정원, 1층 주차장 등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과 기술을 적용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민간 업체로 사업을 전담하면서 도시 경관이나 첨단 건축 기술보다는 분양과 임대 수익을 올리는 방향으로 수정되어 현재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 살던 수천 명의 빈민은 당연히 외곽으로 쫓겨났다.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다
이렇게 생겨난 세운상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 1980년대까지 전기·전자의 메카로 승승장구했다. ‘세상의 기운은 이곳으로 모여라’라는 뜻의 ‘세운’이라는 이름처럼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이는 듯했다.
“구하지 못하는 부품이 없고, 조립하지 못하는 게 없었어요. ‘세운상가에선 잠수함과 미사일도 만든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30년 가까이 설치‧보수해 온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는 세운상가 안에서는 모든 부품을 구할 수 있었다며 처음 일을 배우던 40년 전만 해도 하룻밤에 한 개씩 전축을 만들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세운상가는 조립품, 국산 전자 제품 은 물론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가져온 녹음기, 카세트, 카메라 등이 거래됐고 이른바 빨간 테이프라고 불리던 불법 비디오나 해외 성인 잡지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잖아요. 빨간 테이프가 최고였지. 나도 호기심에 친구들과 몇 번 사러 왔었지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중년의 시민은 “세운상가는 남자 학생들에게는 원더랜드였다”며 간혹 집에 와서 틀어보면 <뽀뽀뽀>나 <매칸더브이> 등이 담겨 있어 심히 당황스러웠다고 그 시절을 추억했다.
■ 세운상가의 산증인
하루빨리 예전의 명예를 회복했으면 좋겠어요(송달석 세운상가 리모델링 추진위원회 회장) |
강남 개발과 용산전자상가 건설로 쇠락
하지만 세운상가는 198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고 1990년대 용산과 강변에 대형 전자 상가가 들어서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고층부에 살던 주민들은 강남으로 이주했고, 상인들도 용산전자상가로 흩어졌다. 여기에 건물까지 낙후되면서 재개발 논의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입주민과 상가 운영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로 진척되지 못하다가 2008년 당시 서울시가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 하고 세운상가 주변 지역을 전면 재개발해 거대한 도심 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현대상가부터 철거를 시작, 본격적 재개발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금융 위기와 종묘 문화재 심의에 부딪혀 진척이 없다가 결국 2012년 12월에 이르러 철거 계획이 전면 취소되었다.“현대상가가 철거되면서 세운상가가 없어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요. 남은 7개 상가는 아직 성업 중인데 말이죠.” 송달석 회장은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대단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존재가 너무 희미하고, 게다가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취급받아 무척 속상하다고 탄식했다.
■ 세운상가의 장인
백남준의 손으로 불리는 TV 장인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 세운상가는 제 청춘입니다(이천일 자연기술랩 대표) |
돈 없는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그런 세운상가가 올 2월부터 단계적으로 도시 재생에 들어갔다. 이름하여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상가끼리 덱(난간)을 연결해 사람들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녹지를 조성해 젊은 사람들이 찾기 좋은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또 제조업 기지로 부활하기 위해 5월부터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창업자를 돕는 ‘세운리빙랩’이 시범 운영을 시작하고, 11월에는 ‘다시세운협업지원센터’가 문을 연다. 세운상가의 상인과 장인을 발굴하고 외부의 창작자, 창업자와 협력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취지다.사실 세운상가는 이미 젊은 예술가들의 터전이 되고 있다. 임대료 싸고, 교통 편하고, 재료도 구하기 쉬워 주머니 가벼운 예술가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세낡은 분위기가 오히려 영감을 자극합니다
저렴한 임대료를 좇아 홍대에서 문래동으로, 그리고 다시 성수동으로 터전을 옮기던 젊은 예술가들이 세운상가로 향하고 있다. 예술 전시 공간 ‘800/40’(보증금 8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서점 겸 텍스트 전시 공간 ‘200/20’, 전시‧판매 공간 ‘300/20’도 그들 중 한 부류. ‘800/40’의 전솔비 작가는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임대료가 싸서 입주하게 됐다”며 “산업화의 흥망성쇠를 겪은 세운상가 특유의 분위기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200/20’의 김진하 작가도 “세운상가는 시간의 결이 그대로 쌓여 있다”며 “전시를 보러 왔다가 세운상가의 매력에 빠져 정착한 예술가가 많다”고 했다.“낮은 보증금과 월세 때문에 이곳을 찾았는데 생활하다보니 정말로 다양한 매력이 넘치는 곳이에요.” ‘300/20’의 왕자인 작가는 “좁고 낡은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상인들의 에너지가 충분히 느껴져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된다” 며 “제발 임대료가 많이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세운상가가 젊은 예술가들이 마음 놓고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술 타운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세운상가의 젊은 일꾼
느려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강원재 소장, 세운상가 거버넌스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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