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시간조차 앗아버린 그 헛된 시간들

김별아(소설가)

Visit521 Date2016.05.27 13:11

학생ⓒ뉴시스

학생들이나 학문을 접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의 누구나 할 것 없이 통찰력 대신 정보력을 갈구한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한 정보 소유를 영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보란 통찰력을 얻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며 그 자체로는 거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좋은 정보력을 갖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할 때면, 나는 종종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이런, 저렇게 읽는 것에 시간을 많이 들여왔으니, 생각하는데 써야 할 시간은 얼마나 남을까?!”
— 쇼펜하우어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25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태어나 1860년에 죽었다. 1788년이라면 영국인들이 호주에 이주하기 시작하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시작된 해다. 1860년은 베이징 조약의 체결로 제2차 아편전쟁이 종식되고,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조선에서는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해다.

그때도 그랬다. 지금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사람들은 경박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어리석었다. 자기가 남들보다 얼마나 많이 아는가를 내세우기에 급급해 도대체 그것을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지를 잊곤 했다. 백 년 후쯤이면 기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해버릴 자료를 달달 외우고, 그것을 얼마나 완벽하게 기억하는가를 시험하느라 일생을 몽땅 써버리기도 했다. 먼저 아는 것이, 조금 더 아는 것이 지성의 척도이기도 했다. 오직 지혜를 사랑했던, 사랑하며 갈구했던 철학자의 눈에만 그 어리석음이 보였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태어났다 죽은 사람들이 모두 지난 역사가 되어버린 후에도 정보와 지성을 혼동하고 산다. 많이 안다는 것과 지혜로움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른바 정보량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나는데,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편리한 도구인 컴퓨터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누가 얼마나 더 많이 머릿속에 꾸역꾸역 정보를 밀어 넣었는가를 시험하기에 바쁘다.

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아이가 치른 중간고사 문제를 보고 기함을 했다. 선택교양이라는 과목의 시험이라는 것이 달달 외운 내용을 시험지 위에 빼곡하게 써내놓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아들아이는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자기의 의견을 적었더니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았단다. 그래서 기말고사에는 교수의 말 한마디,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쓰겠노라고 결심하며 강의를 녹음하고 수업 후 녹취하는데 기력을 쏟고 있다. EBS다큐프라임에서 방영했던 ‘서울대 A+의 조건’과 똑같은 상황이다. 요약정리를 잘 하고 키워드를 잘 잡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업 중에 교수가 던진 시시풍덩한 농담까지도 모조리 빠짐없이 적어야 A+를 받는단다. 알파고가 바둑과 체스에서 인간을 격파하는 세상에, 이게 무슨 어리석은 헛짓이란 말인가?!

어쩌면 대학 교육 수준은 20여 년 전 내가 받았던 것보다도 못한 수준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런데도 상대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며 경쟁으로 내몰아대니, 누가 생각을 하겠는가? 생각할 생각이라도 하겠는가? 등록금만큼이나 시간이 아깝다. 생각할 시간조차 앗아버린 그 헛된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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