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의 시대, 이러다 진짜 토르가 나타날라...

최순욱

발행일 2016.05.25. 14:16

수정일 2016.05.25. 16:36

조회 880

막말을 일삼다 토르의 망치를 맞고 쓰러지는 흐룽니르. 1865년 Ludwig Pietsch(1824∼1911)의 작품.(출처 : Wikipedia)

막말을 일삼다 토르의 망치를 맞고 쓰러지는 흐룽니르. 1865년 Ludwig Pietsch(1824∼1911)의 작품.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30) 막말의 끝은 결국 비극

북유럽 신화에는 ‘흐룽니르’라고 하는 거인이 등장한다. 그는 거인들의 나라인 요툰헤임에서 가장 힘이 센 자였고, ‘황금갈기’라고 하는 훌륭한 말도 한 마리 가지고 있었다. 신들의 왕 오딘에게도 ‘슬레이프니르’라고 하는 다리가 여덟 개인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고 하는 말이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말을 타고 평야에서 만난 흐룽니르와 오딘은 서로의 말을 자랑하다 경주를 하게 됐고 흐룽니르는 말 달리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오딘의 궁전인 발할라까지 쳐들어가게 됐다.

흐룽니르는 함정에 빠진 줄 알고 당황했지만 오딘을 비롯한 신들에게는 흐룽니르를 해칠 맘이 없었다. 오히려 그를 신들의 연회에 초대해 맛난 술과 음식을 정성껏 대접했다. 흐룽니르는 신들이 자신의 대단함을 인정해줬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해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시더니 취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태에서 이내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발할라가 훌륭하다고 입을 모으더니만 직접 와서 보니 아무 것도 아니군. 이까짓 발할라 따위 여차하면 내가 번쩍 들어서 요툰헤임에 옮겨놓을 수도 있다고!” 신들은 흐룽니르의 말을 그저 술자리의 허풍 정도로 듣고 웃고 넘기려 했다. 하지만 흐룽니르는 신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기세가 점점 등등해졌고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고 말았다.

“다들 아무 말도 못하는 것 보니, 아스가르드는 겁쟁이 신들의 소굴인 게 분명하군. 내가 조만간 이 한심한 아스가르드를 완전히 무너뜨리겠어. 너희들은 내 손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하지만 저 아름다운 프레이야와 시프만큼은 요툰헤임으로 데려가 내 첩으로 삼아주마.”

이 때 신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토르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는 신들의 궁전에서 거인이 술에 절어 말 같지도 않은 막말을 일삼고 있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할라 안에서 오딘이 초청한 손님의 피를 볼 수는 없는 법. 토르는 흐룽니르에게 결투를 제안했다. 흐룽니르는 순간 찔끔했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기에 결투 요청을 받아들였다. 며칠 후 ‘그리요툰그라드’라는 곳에서 토르를 만난 흐룽니르는 결국 토르가 던진 마법의 망치 ‘묠니르’를 얻어맞고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 죽고 말았다. 술에 취해 뱉어낸 막말이 자기 목숨을 앗아갈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막말 정치인’들이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70) 미국 공화당 대선 주자, 그리고 로드리고 두테르테(71) 필리핀 대통령 당선인 등이 대표적이다. 트럼프는 히스패닉과 무슬림을 비하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백인과 유색인종, 이민자들 사이의 편가르기에 앞장섰다. 하도 막말을 많이 하다 보니 “남편도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힐러리 클린턴)이 어떻게 미국을 만족시킬 수 있냐”란 말은 그냥 유머로 느껴진다. 지방 시장으로 재직할 때 자경단을 운영하며 범죄자 1000여명을 재판 없이 처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두테르테의 경우 최근 “범죄자 10만명을 죽여 물고기 밥으로 만들겠다”등 선동에 가까운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1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필리핀 방문 당시 도로 통제로 교통 체증이 빚어지자 “개자식,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건 카톨릭 신자 비중이 높은 나라의 정상적인 대통령이라면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는 말이다.

이런 막말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수년 간 이어진 불황과 이에 따른 금수저-흙수저 간의 양극화가 일반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막말은 이 분노를 정치적인 힘으로 변환시키는 가장 쉬운 수단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개적인 막말은 순간적으로 말을 뱉은 사람의 지지자를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전체적인 사회 공동체를 약화시킨다. 막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처럼 처음에는 웃어 넘기며 참을지라도 도가 지나치면 성난 민심으로 토르처럼 막말을 응징하게 된다.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막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고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재기 넘치는 유머가 필요한 시대다.

#막말 #최순욱 #신화여행 #토르 #흐룽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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