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를 실종신고한 푸른 눈의 노신사

최경

발행일 2016.05.19. 15:29

수정일 2016.05.19. 16:33

조회 6,101

노부부ⓒ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24) 고든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기억

한 지구대로 푸른 눈의 노신사가 찾아왔다. 그는 아침 운동을 다녀와 보니 집에 있어야 할 한국인 아내가 없어졌다고 했다. 잠깐 외출을 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며, 실종신고를 하러 온 것이다. 영국인 고든 할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경찰은 집까지 동행해 집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장대에 종이 하나가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고든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쓴 편지였다. 곧 천국에 가서 아내를 만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근처 병원과 주민센터를 통해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미 한 달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왜 고든씨는 죽은 아내가 없어졌다며 지구대를 찾아간 걸까? 할아버지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원은 제작진에게, 고든씨의 아내가 집에서 쓰러졌다는 걸 알린 이도 할아버지 자신이었다고 말해줬다. 그 후, 구급차를 함께 타고 병원까지 갔고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해주자, 고든씨는 마치 아내의 사망소식을 생전 처음 듣는 듯, 숨죽여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정말 최고의 아내였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여자였지요. 그녀를 만난 건 내게 행운이에요.”

고든씨는 5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다. 최근의 기억들이 치매로 자꾸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숨을 거두던 순간마저 머릿속 지우개가 지워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만드는 잔인한 병... 심지어 아내의 발인 날에도 할아버지가 없어지는 바람에 화장터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 시간, 정작 고든씨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잠옷 바람으로 집안에 있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항공기 기관사였다는 고든씨는 비행스케줄 때문에 들른 한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던 아내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한눈에 반한 그는 열정적으로 구애를 했고, 아내가 허락하면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고 한다. 그 뒤, 외국을 돌아다니며 생활해오다 그가 은퇴를 한 뒤, 아내가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해 한국에 정착했다. 고든씨는 영어 학원 강사 일을 꽤 오랫동안 했지만, 치매를 앓으면서부터 아내의 보살핌으로 집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지인들은 아내가 병이 깊어지면서 먼저 떠나게 될 것을 대비해 고든씨를 요양병원에 보내려고 알아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나 때문에 한국에 온 사람인데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겠느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건강이 허락하고 능력이 닿는 데까지는 할아버지를 돌봐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오직 자신을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에 온 남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던 아내. 하지만 끝내 죽음이 두사람을 갈라놓았다. 혼자 남겨진 고든씨는 매일 아내를 잃어버리고, 매일 아내의 사망소식을 처음 들으며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내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것뿐이다. 제작진은 고든 할아버지의 영국 가족들을 수소문했고, 다행히 영국인 딸과 연락이 닿았다. 잦은 이사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겼다는 딸은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몹시 놀라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당장 영국으로 모시고 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치매를 앓고 있는 고든씨가 아내도 없는 한국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고든씨가 가고 싶어 하는 민속촌을 함께 다녀왔다. 그곳은 젊은 날 아내와 함께 데이트를 즐겼던 장소였다. 머릿속 지우개가 아내의 얼굴마저 희미하게 만들어가고 있지만, 사진 속 아내가 웃으며 포즈를 취했던 그 장소에서 고든 할아버지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애틋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들에 끝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요. 하지만 그게 인생이잖아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천국에 가도 우리는 사랑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뒤에 남은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할 겁니다.”

끝이 있지만, 끝나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사랑일 것이다. 지금쯤 영국 어느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 고든 할아버지... 그는 아직도 아내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끝내 아내의 기억마저 지워졌을까? 그래도 괜찮다. 고든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가 서로를 완벽하게 사랑했다는 걸, 두 사람이 알고 있었고, 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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