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힘을 일깨워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최순욱

발행일 2016.05.18. 14:43

수정일 2016.05.1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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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회 번역가의 수호성인 성 제롬. 1605-1606년 카라바지오(Caravaggio) 작품ⓒWikipedia

카톨릭 교회 번역가의 수호성인 성 제롬. 1605-1606년 카라바지오(Caravaggio) 작품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29) 좋은 번역가의 본, 히에로니무스

지난 16일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한국 문단에서는 이번 쾌거를 한국 문인들의 세계 진출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수상 소식이 좋은 번역가의 중요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강 소설의 작품성도 물론 훌륭하겠지만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이 없었다면 수상은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맨부커상 선정위원회가 지난 4월 ‘채식주의자’를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리면서 번역의 우수함을 칭찬한 것과 그가 한강과 함께 이번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여러 뉴스에 따르면, 데보라 스미스는 영국에 한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번역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7년 전쯤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5년에는 런던대학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고 이미 한강의 또 다른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를 번역하기도 했다. 문학이든 과학이든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이 저자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저술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는 훌륭한 번역을 낳는다는 뜻이다. 일부 무식자들은 대충 단어만 사전에 나온 뜻에 맞게 바꾸면 번역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담긴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원 언어의 맛을 다른 언어의 표현으로 살려내야 하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작업이 바로 번역이다.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해 내는 번역가는 한국어에서 외국어로 번역하든, 외국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든 귀하디귀한 것이다.

이런 번역가들의 본이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카톨릭 교회 번역가의 수호성인(Patron Saint)인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또는 성 제롬(St. Jerome)이다. 2세기 이후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은 4대 교부(敎父) 중 하나로도 잘 알려져 있는 그가 번역가의 수호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391~406년에 걸쳐 그리스어, 또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서 원문을 라틴어로 훌륭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은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식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5세기 이후 기독교 사회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대중적 판본’이라는 뜻의 'versio vulgata'(불가타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의 번역이 얼마나 훌륭하다고 인정받았느냐 하면, 후에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의 오류 수정 작업에 참가했던 학자들 중에 성경 원문에 맞춰 번역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에 맞춰 원문을 수정하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1600년 전에 이뤄진 그의 번역에서 이미 현대 해석학의 중요한 몇 특징들이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신학 논문도 있다.

히에로니무스의 성경 번역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가른 기적의 주인공 모세의 외양과 관련된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 원전에는 “…모세의 머리가 빛으로 둘러싸여…”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빛과 뿔의 발음이 비슷한 나머지 히에로니무스가 이를 “…모세의 머리에는 뿔이 나 있어…”라고 번역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번역이 워낙 멀리 알려진 바람에 르네상스 시기까지도 상당수의 서양 예술가들은 모세를 그리거나 조각할 때 머리의 뿔을 빼놓지 않고 묘사해 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모세에게 강렬한 신화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제로 부오나로티의 모세상은 이 때문에 한층 유명해진 명작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오역들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히에로니무스의 업적 자체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는 현재 국내 다른 작가들의 책도 번역중이라고 한다. 데보라 스미스가 카톨릭 신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한강의 책을 번역할 때 성서를 번역할 때의 히에로니무스만큼 열과 성을 다했었을 것이라 믿는다. 다른 작가들의 번역에도 그만큼의 기운이 더해져 좋은 결과물이 출간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번역가들이 국내에도, 해외에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박철우(2011). 히에로니무스의 전도서 1장 1-11절 번역과 주석의 특징에 관한 연구. <구약논단>, 17권 1호, 108~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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