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그 날 이후부터 그랬어요..."

최경

발행일 2016.05.12. 15:47

수정일 2016.05.12. 16:35

조회 814

국립5·18민주묘지ⓒ뉴시스

국립5·18민주묘지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23) 살아남은 소시민의 트라우마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기 전까지 그곳은 그냥 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 살지 않았고, 인연이 없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36년 전,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 그곳은 가장 아프고 슬픈 우리의 현대사가 됐고,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역사로 기록됐다.

해마다 5월이 되고, 그곳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는 유독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와의 대면은 95년 경, 뜻하지 않게 조용히 찾아왔다.

119 구조구급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는 전국의 사고를 쫓아다니며 구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었다. 그러다가 찾아간 광주... 주인공은 ‘총기 오발사고’를 낸 40대 초반의 A씨였다. 구급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은 집에서 사냥용 엽총을 닦다가 총알이 있는 것을 미처 모르고 방아쇠를 당겨 탄환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민간인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특이할 뿐 아니라, 어떻게 했기에 총신이 긴 엽총에서 탄환이 발사돼 머리를 스쳤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사고를 당했어도 다행히 큰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인터뷰를 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우리를 맞은 A씨는 무척이나 조용조용했고 어쩐지 표정이 침울해 보였다.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날 어떻게 총기사고가 일어난 건지 물어보는데, 그는 한사코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TV에 나오고 싶지 않다며, 사고도 원래는 총을 손질하다 그런 게 아니라는 둥 계속 알아듣기 힘들게 이야기했다. 이리저리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 봐도 잘 맞지 않는 대목이 많다 보니 나는 자꾸만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총기가 집에 있었나요?”
“총신이 긴 엽총을 닦는데 어떻게 방아쇠가 당겨졌다는 거죠?”
“어떻게 총알이 머리를 스칠 수가 있죠?”
.......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는 데도 시종일관 침묵만 지키던 A씨가 갑자기 눈을 빛내면서 내게 되물었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취재 그만하고 돌아가 줄 수 있나요?”

잠시 당황했지만, 방송이고 취재를 못해도 좋으니, 진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A씨가 마치 폭탄을 떨어뜨리듯이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죽으려고 발로 총을 고정시키고,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빗나갔어요...”

그는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바로 그 날 이후부터 그랬다.

1980년 5월,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A씨는 퇴근길에 아무 이유 없이 계엄군들한테 끌려가 모진 폭행과 폭언 등의 수모를 당한 뒤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뒤부터 억울함이 가슴 가득 꽉 차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고, 정말로 죽고 싶었다며 흐느끼는 A씨를 보면서, 나는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결국 나는 A씨에게 그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흔하디흔한 말 밖에 하지 못한 채, 그 집을 나섰다.

그 때엔 A씨의 성향 때문에 그렇게 삶이 피폐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단지 A씨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는 걸 한참 뒤에 알게 됐다. 5월의 광주를 겪은 시민들 중 상당수가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차츰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시민들은 오히려 정신적인 타격을 별로 입지 않고 금방 회복하지만, 평범한 소시민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계엄군에게 끌려가 폭행과 수모를 당한 것은, 바로 그 ‘이유 없음’ 때문에 정신적인 상처가 더 깊고 치유하기 힘들다고 했다. A씨가 자살기도를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5월 광주를 겪은 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시민들 중 상당수가 병사 혹은 자살을 한 사실은 이미 수치로도 나와 있을 정도다.

여전히 5월이 되면, 나는 A씨가 떠오른다. 과연 그는 아직 살아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가슴가득 차오른 억울함을 풀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있을까. 그래서 5월 광주는 아직 살아있는 역사다.

#광주 #5월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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