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천재, 서번트 쌍둥이 형제를 만나다

최경

Visit592 Date2016.04.21 16:12

피아노ⓒ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21)

벌써 10년 전 일이다. 어느 날 TV를 보다가 놀라운 사람들을 보게 됐다. 그들은 미국과 말레이시아 등에 사는 천재들이었는데, 자폐증으로 알려진 발달장애아들이었다. 사회성과 표현력이 떨어지고 지능지수도 평균이하로 알려져 있는 이 발달장애아들이 음악과 미술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이며 막힘없이 연주를 하고 사물들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뇌기능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천재성을 보이는 사람들 가리켜 석학이라는 뜻의 ‘서번트’라 부르고 있었다. 주로 발달장애인들 중 극히 일부에서 이런 천재성이 발현된다고 했다. 영화 ‘레인맨’의 주인공이 자폐 증세가 있는 장애인이면서 탁월한 암기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서번트이기 때문이다.

당시 관련학계에서는 이 서번트에 대한 연구가 그리 심도 있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서번트는 암기력, 기억력, 수리력을 갖고 있어서 악보를 외워서 절대음감으로 곡을 연주한다거나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대로 그려낸다거나 하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창의력은 떨어진다는 것이 그때까지의 연구결과라고 했다. 감탄을 하며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에도 서번트들이 있을까?’

시사다큐멘터리를 집필하면서 아이템회의 시간에 용어도 낯선 ‘서번트’를 들고 나온 건 그 호기심 때문이었다. 먼저 국내의 관련학자들을 접촉해서 조언을 구하려고 했지만, 모두 그런 발달장애아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다 외국 논문에서 본 게 다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발달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부모는 아이의 재능을 발견한다 해도 먼저 생활훈련을 시키는 일이 더 다급하고 절실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혀있는 서번트를 찾기는 난망했다. 추천을 받거나 제보를 받는 것도 진척이 없었고 남은 방법은 저인망식으로 훑는 것 뿐. 막내작가가 전국에 있는 특수학교에 일일이 전화를 돌려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청주의 한 특수학교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졸업생 중에 피아노 실력이 뛰어난 남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학생이 쌍둥이 형제란다. 섭외에 들어가 허락을 구하고 취재를 내려 보냈다. 악보 없이도 곡을 들으면 그대로 피아노를 연주한다고 하니 적당한 피아노곡 하나를 선정해 CD에 담아갔다. 과연 특수학교 선생님 얘기대로 이 남학생이 서번트 능력을 보이게 될까? 그런데 취재를 내려간 PD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작가님, 밀레니엄 소나타라는 곡이 있어요?”

클래식 곡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밀레니엄 소나타라는 곡은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전화를 받으며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지만 실제로 그런 곡은 없었다.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우리가 가져간 곡을 틀어주면서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이 친구가 그러마고 피아노앞에 앉더니 이상한 곡을 막 치는 거예요. 엄청 잘 쳐요. 그래서 이게 무슨 곡이냐고 물어보니까 밀레니엄 소나타래요. 근데 그런 곡은 실제 없다는 거죠? 그럼 이 친구가 작곡한 건가?”

놀라운 얘기였다. 나중에 촬영해온 테이프를 보니, 그 상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오유진. 다섯 살 무렵, 차에서 흘러나오는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 피아노곡을 듣더니 집에 와서 뚱땅거리며 그대로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 음계도 피아노 치는 법도 모르던 아이가 보여준 놀라운 천재성, 쌍둥이 형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들의 장애 앞에서 음악천재로 키울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만 손동작을 많이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특수학교에 다니면서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각종 장애인 예술제에서 상을 휩쓸었지만 딱히 음악가로 키우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특기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싶었단다.

당시 유진씨는 한 대학교 작곡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학생들 중에서도 절대음감이 단연 뛰어났고, 작곡 실력도 출중했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카메라 앞에서 연주해보인 밀레니엄소나타는 즉석 연주로 탄생한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재차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자, 처음 것을 변주해서 피아노를 쳤다. 그런 식으로 즉석에서 2악장과 3악장까지 뚝딱 만들어냈다.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이론, 그러니까 서번트는 암기력과 기억력이 뛰어나 음악을 그대로 복사하듯 연주하는 건 잘 할 수 있지만, 창작능력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와 전혀 달랐다. 게다가 유진씨의 형 또한 먼 미래의 달력의 요일까지 맞추는가 하면 세계의 국기와 국가의 기본 정보를 줄줄 꿰고 있었다. 서번트 쌍둥이 형제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방송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큰 화제가 됐고, 이들 쌍둥이 형제는 미니시리즈 휴먼다큐 5부작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세월이 꽤 흐른 지금 ‘서번트’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건, 분명 이들 형제 덕분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감동했던 그 시간들은 내게도 큰 축복이었다. 유진씨 형제가 내게 준 선물은 편견을 깨고 세상을 만나라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장애는 껍데기일 뿐, 모두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서번트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제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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