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조차 먹여주지 못하는 소설에 매달리는 이유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6.04.22. 15:35

수정일 2016.04.22. 16:21

조회 648

꿈새김판ⓒ서울시

마이클 벤투라는 유명한 에세이 <방의 재능(The Talent of the Room)>에서 이렇게 묻는다. “그 방에 얼마나 머물 수 있는가? 하루에 몇 시간 머물 수 있는가? 그 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얼마나 자주 들어갈 수 있는가? 혼자 견딜 수 있는 두려움은 (혹은 자만심은) 어느 정도인가? 어떤 방에서 몇 ‘년’ 동안 혼자 있을 수 있는가?”
그는 혼자 방에서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재능이 글재주나 문체, 기교, 예술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방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나머지도 다룰 수 없다.
-- 바버라 애버크롬비 《작가의 시작》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21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게으른 한 시절이 지나고 있다. 거룩하고도 참혹하게도 문학으로 밥벌이를 한 이후 거의 처음으로 소설을 쓰지 않고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나는 작가로서 몹시 부지런한 편이었다. 누군가는 매년 신간을 펴내는 나를 글 찍어내는 ‘공장’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펜을 멈추었다. 펜이 멈추었다. 농담처럼 진담으로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하는 이유야말로 “쓰지 않으면 쓰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말이 씨앗이 되어버렸다.

쓰지 못하는 나는 초조하고 불안함을 넘어서 얼마간 삶을 인지하거나 체감하지 못하는 듯 멍하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잠 속에서 꿈을 꾸는 듯도 하고 나를 꼭 닮은 사람이 무대에 오른 연극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어쨌거나 ‘제대로’ 살아있는 상태는 아닌 것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가라고, 주저앉아 멀찍이서 바라보니 내가 얼마나 일중독자로 살았는지가 분명하다. 생활인들이 누리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언감생심 꿈꾸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쓰고 있거나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잘 간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새가 우는 걸 듣노라니 한 계절이 간다. 그러다보니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는 지금껏 무엇 때문에 노력 대비 보상이 터무니없는 소설에 애면글면 매달렸던 것일까? 동료 작가들은 어떤 이유로 매정한 연인 같은 문학의 가랑이를 여전히 붙잡고 있을까? 마주치는 동료마다 붙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왜, 아직도, 이제는 거친 밥조차 먹여주지 못하는 소설에 매달려 있냐고?

며칠 전 시상식에서, 그것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내년부터 없어지는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에서 만났던 작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설가 이순원은 희망을 말했다. 그래도 소설을 통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지리라는 희망. 소설가 김탁환은 심상하게, 습관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되풀이하다 보니 후천의 본능처럼 덧입혀진 생활방식이라고. 그런가 하면 소설가 이현수는 한숨을 쉬며, 이젠 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처럼 기신기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동료들의 대답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저마다의 진실이다. 곱씹어보면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동력은 욕망이거나 결핍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욕망이 모두 사라졌거나 결핍이 완전히 채워진 상태일까? 언젠가 소설가 김형경이 말한 대로 이제는 오직 내 것인 욕망과 결핍이 아닌 세상의 무엇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일까? 다시금 혼자만의 방에 들어가 오오래 고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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