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절로 시를 쓰는 아이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6.03.18. 15:59

수정일 2016.03.18. 15:59

조회 730

꽃봉우리ⓒ뉴시스

아이들이야말로 지극히 문학적인 존재다.
아이들은 자기 느낌 그대로를 말하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을 따라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울고 싶어요.”하지 않았다.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말이다.
대신 아이는 “눈물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16

지금 스무 살이 된 아들아이가 걸음마가 서툴러 등에 업혀 다닐 무렵, 가을날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후두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고사리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비, 노란 비다!”

그때의 신비롭고 뭉클했던 감동은 엄마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지만, 모든 아이들은 내 아이가 그러했듯 타고난 시인이다. 물고 빨고 쥐어뜯고 흩어놓아서라도 세상을 낱낱이 알고픈 공부벌레다. 지금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한때 우리는 그렇게 시인이자 공부벌레였다.

언젠가 그 아이들과 삼십여 년을 함께 생활한 초등학교 교사 출신 김용택 시인의 강연을 들었는데, 시인이 읽어주는 아이들의 시가 무척 재미있었다. 아버지의 회사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줄넘기 두 개가 꼬이면/ 풀기 어려운 거’에 빗대어 이해하는 아이, ‘이제/ 눈이 안 온다/ 여름이니까’라는 간명한 통찰로 계절의 변화를 전하는 아이, 거미줄에 동글동글 이슬이 맺혀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 ‘가만히/ 들어보면/ 음악이 들릴까?’ 궁금해 하는 아이...

아이들이 시를 쓰고자 애쓰지 않아도 절로 시를 쓰는 건 그들이 솔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멋있는지, 대단한지, 시가 될 수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을 흉내 내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치를 보며 따라하는 순간 시의 재능은 사라지고 진부하고 얄팍한 재주만 남는다. 남들처럼 느끼고 남들처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이 천부적인 시인을 바보로 만든다. 자기의 느낌을 숨기다 보니 서서히 잊어버린다. 느낌 자체가 사라진다.

글쓰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은 글재주가 없다기보다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이들이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쪽 팔릴까봐’ 한 줄의 글도 제대로 써내지 못한다. 삶에 대한 솔직함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감동이 될 수 있는지의 한 예로 장애인 시화전에서 읽은 포항장애인복지관 소속 나희진씨의 시 <엄마> 전문을 소개한다.

엄마,
혹시 내가 먼저 죽어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아.
엄마는 나한테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생각에 집중할 때, 우리 마음속에 웅크려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 멋있게 보이고 싶거나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은 욕심을 버리고 다만 그 속삭임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엄마 등에 업혀 어섯눈을 뜨던 그때처럼 세상 전부를 새롭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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