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과 맞바꾼 약속

최순욱

발행일 2016.03.16. 15:53

수정일 2016.03.23. 13:53

조회 1,521

꽁꽁 묶인 펜리르의 입에 손을 집어넣은 티르. 1911년 존 바우어의 삽화ⓒwikipedia

꽁꽁 묶인 펜리르의 입에 손을 집어넣은 티르. 1911년 존 바우어의 삽화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22) : 손이 없는 민회의 신 티르

2016년 4월 총선이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2016년 5월부터 5년 간 국회를 책임질 동량(棟梁)들을 배출하는 국민주권주의, 입헌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는 이미 총선을 두고 달아오른 지 오래다. 이런 정치 이벤트가 벌어질 때면 종종 북유럽의 티르(Tyr)라는 신을 떠올리게 된다.

티르는 거인 히미르(Hymir)의 아들로 고대 게르만족 사회에서 최고의 결정권을 가진 민회(民會)를 보호하는 정의와 법의 신이다. 고대 게르만족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각 부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안에 대해 토론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티르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손을 높이 세우고 외친 맹세와 선서를 수호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민회와 선서의 수호자인 티르에게는 오른손이 없다. 무슨 연유일까.

요사스러운 거인 로키의 자식 중에 펜리르(Fenrir)라는 늑대가 있었다. 거인의 자식이 늑대라니 불길한 형상이었지만 어릴 때는 강아지마냥 귀여웠는지 신들은 처음엔 그냥 펜리르가 신들의 거주지에서 살게 내버려뒀다. 하지만 펜리르는 곧 거대하게 자라나 신들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터질 듯한 근육과 날카로운 이빨, 칼과 같은 발톱이 자라난데다 성질까지 사나워져 신들도 이놈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용감한 티르만이 펜리르에게 다가가 먹이를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들은 걱정이 된 나머지 멸망의 날이 오기까지 펜리르를 어딘가에 묶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는 것도 꺼려질 만한 거대한 늑대가 얌전히 포박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자칫하면 포박을 시도하는 날이 바로 신들의 제삿날이 될 판이었다. 결국 신들은 꾀를 낼 수밖에 없었다. 난쟁이들에게 부탁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마법의 끈을 만들어 온 후에 펜리르를 자극했다. “네가 그렇게 힘이 세다면 이 끈을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어떠냐. 네가 강하다면 이 끈을 몸에 묵어도 끊어낼 수 있겠지.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책임지고 너를 풀어주겠다.”

펜리르는 뭔가 계략이 숨어있다는 걸 직감했는지, 조건을 걸었다. 약속의 징표로 끈을 펜리르의 몸에 묶고 있는 동안 신 중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펜리르의 입에 집어넣고 있어야 한다는 것. 펜리르가 끈을 끊지 못할 경우 신들이 얌전히 끈을 풀어준다면 펜리르도 신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신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검은 속셈으로 시작한 일인데다 그게 아니더라도 펜리르의 섬뜩한 입 속에 손을 집어넣을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나서서 시커먼 아가리 속에 손을 밀어 넣은 건 용감한 티르였다.

펜리르는 결국 온 몸을 칭칭 둘러싼 마법의 끈을 끊어낼 수 없었다. 신들은 박장대소하며 바라보기만 할 뿐 당연히 끈을 풀어주지 않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펜리르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자유로운 입으로 티르의 손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뿐이었다. 민회와 맹세의 수호자는 이렇게 오른손을 잃었다.

티르가 손을 잃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요즘 같은 때엔 자꾸 정치와 관련해 생각해 보게 된다. 티르가 손을 잃었으니 신들 모두의 약속과 선서는 신뢰를 얻기 어렵게 됐다. 게다가 티르는 민회의 신이 아닌가. 티르가 손을 잃었으니 민회의 대표자들이 한 철석같은 약속도, 맹세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민회의 대표자들은 요새로 치자면 정치인들일 테다. 이건 정치인들의 말은 도통 믿기 어렵다는 걸 고대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과연 5년 후 이맘때에는 정치와 티르를 연관 지어 생각할 일이 없어질 수 있으려나.

#신화 #총선 #최순욱 #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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