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고 생각해 봐"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6.03.11. 11:25

수정일 2016.03.11. 11:30

조회 691

거울ⓒ뉴시스

당신이 거울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고 생각해 봐. 당신은 당신 얼굴을 꿈꾸었겠지. 아마 당신은 그 얼굴을 당신 내면의 외적 반영으로 상상했을 거야. 그러다가 마흔 살쯤 되었을 때, 사람들이 당신에게 유리 거울을 비춰 주었다고 가정해 봐. 얼마나 놀랄까. 아마 당신은 전혀 낯선 얼굴을 보게 될 거야. 그 때 당신은 분명히 알게 되겠지. 당신 얼굴이 곧 당신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 밀란 쿤데라 《불멸》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15

지난 명절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정식 제작 전에 맛보기로 선보이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보았다. 젊은 출연자가 시간 여행자가 되어 30년, 40년 후로 떠나 70대, 80대의 나이로 생활하는 내용인데, 이미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유사한 형식을 선보인 바 있음에도 ‘타임리프(Time Leap)’의 상상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특수 분장으로 노인의 모습이 된 자신을 처음으로 맞대면하는 대목인데, 꼭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 한 대목과 같다.

평생토록 거울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출연자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물을 흘린다. 사전에 받은 대본대로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연히 알면서도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여러 번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해도 눈앞에 나타난 주름투성이에 등이 굽은 노인이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그 모습으로 바깥에 나가 만나는 세상과 사람들은 더욱 당혹스럽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생각에 비슷한 말을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말의 나이’를 가려듣지 않는다. 겹겹이 늘어진 주름과 백발이 소통의 가능성을 막아버린 탓이다. 아름답고 건강했기에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진짜 자기’를 잃은 출연자들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진짜 자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유머러스하지만 날카롭게, 정작 기억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일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나이가 마흔쯤 되면 스스로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내면을 충분히 반영한 외면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거울은 그저 우리가 알고, 또 원하는 우리를 비춘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존재의 알짬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소설 속에서 거울과 대비되는 것이 ‘카메라’인데, 그것은 우리가 늘 의식하며 사는 타인의 시선이다. 거울과 카메라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속는다. 따라서 사랑도, 그 신비하고 거룩한 감정조차도 ‘상대를 안다는 환상으로 우리를 속여 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불멸이란 애당초 없을지니, 아름다운 폐허 또한 없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아름답게 늙지 못한다. 외면이 그러할진대 내면이라고 크게 다를까? 외면으로 반영해도 자신 있을 만큼 아름다운 내면 또한 착각이자 자기기만은 아닐까? 언젠가 시간에 쓸린 상처로 가득한 낯선 나를 만났을 때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거나 뒷걸음질하지 않도록, 매일 거울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잘 닦아두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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