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들의 보호처가 감옥으로 되는 순간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6.03.04. 14:10

수정일 2016.03.04. 14:19

조회 584

손ⓒ뉴시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방어적으로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헛소리!” 그가 말했다. 그는 화가 났다. 이런 해리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벤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일 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녀가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결코 행복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벼락이 떨어진 거야!”

--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14

문득, 확신에 가까운 예감에 사로잡힌다. 여자, 노인, 장애인, 유색인종,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많은 그룹 중에서도 가장 최종의 ‘식민지’는 바로 ‘어린아이들’일 거라고. 그들은 단체를 구성하지 못하고 투표권도 갖지 못하며 경제적으로 완전한 예속 상태에 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옹성에 분리되어 있다. 물론 사회는 그것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치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보호자’가 혈연관계를 위계로 해석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순간 가족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어디보다 위험한 곳이 된다.

아동 학대와 관련된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경악한다. 짐승 같은, 짐승만도 못한, 이라는 표현으로 그들을 ‘인간’의 무리에서 분리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작 사고는 우리가 본능과 욕망을 숨기고 고귀한 ‘인간’을 시늉할 때 터져 나온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에서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다섯째로 낳은 아이 벤 앞에서 스스로 폭로하는 본능과 욕망의 실체가 그러하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소망을 가진 전형적인 중간계층이다. 결혼을 하면서 애초에 세웠던 계획과 목표대로 예쁘고 착한 아이들을 낳고, 손님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웃음과 축복과 박수소리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앞서 네 명의 아이들과 전혀 다른,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과 성격을 가진 다섯 번째 아이 앞에서 가족의 환상이 깨어지고 부성애나 모성애조차도 기만이었음이 드러난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실은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공포영화는 원하지 않는 아이, 지배할 수 없는 아이에 대한 이기적인 공포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유전자를 물려주고 몸을 빌려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분리된 나의 일부로 치부하는 순간 과도한 애정과 부담이 ‘관계’를 무너뜨린다. 무릇 관계란 나와 상대가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므로.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했다는 해리엇의 고백은 아동학대를 저지른 부모들이 평소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주변의 증언과 겹쳐진다. 위험하고 음험한 본능을 숨긴 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가 모든 약한 것들의 보호처를 감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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