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매일마다 찾던 요리

서울식품안전뉴스

발행일 2016.03.16. 09:39

수정일 2016.03.16. 17:05

조회 869

잡채

잡채는 한식 최고의 음식이다. 단 하나의 음식을 두고 한식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 음식은 잡채나 잡채와 닮은 비빔밥이다. 잡채는 한식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한식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음식

‘잡채(雜菜)’는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상세히 나온다. 음식디미방은 1670년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저술한 최초의 조리서다. 오이채, 무, 참버섯, 석이버섯, 표고버섯, 송이버섯, 숙주나물, 도라지, 마른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시금치, 동아, 가지 등이 재료다. 꿩고기도 쓴다. 잡채와 한식의 정체성은 마지막 부분이다. “이 모든 식재료들은 반드시 가지가지 다 쓰라는 말이 아니고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있는 대로 하여라” 라는 구절이다.

잡채는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일 뿐이다.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재료는 없다. 그저 있는 재료만 사용해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한식은 귀한 것을 따지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인근에서 나는 재료들을 잘 갈무리하는 음식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냉장고 안에 있는 상하기 일보 직전의 재료들로도 훌륭한 잡채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잡채

광해군 시대 기록된 ‘잡채상서’ 이야기

역사 속에서 잡채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겼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오랜 전쟁으로 궁궐은 불탔다. 왕이 머무를 곳조차 없다. 겨우겨우 거처를 얻은 곳이 월산대군의 사저다.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먹을 것도 마땅찮다. 판서가 잡채와 더불어 궁을 드나들며 왕을 알현한다. 임금에게 잡채를 올리고 얻은 벼슬이다. 호조판서 이충(李沖)이다. 사람들은 ‘잡채상서’라고 쑥덕였다. 이충은 출신 성분부터가 문제였다. 할아버지 이양은 명종 시절 탄핵된 간신이었다. 그런데도 호조판서까지 하고 사후 우의정으로 추존되었다. 소문은 늘 따라다녔다. 명종, 선조, 광해군까지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이충과 조부 이양을 두고 ‘속이 좁은 소인배이며, 권문세가에 줄을 대고, 지방 관리로 있을 때 탐학했다’는 내용이 많다. 실력도 없으면서 음식을 해다 바치며 왕의 눈에 들어 벼슬을 얻었다는 뜻이다. 실록에는 물론이고 <상촌집>, <연려실기술> 등에도 이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해 보면 조선 중, 후기 내내 유명한 이야기였음은 분명하다. 지금으로 치면 매일 청와대에 음식을 배달하며 장관에 오른 셈이다.

광해군은 이충의 집에서 음식이 와야만 식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워낙 없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이충 집안의 솜씨가 좋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치, 나물, 더덕 등 흔한 재료들이었음을 볼 때 진기한 재료보다는 솜씨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권력을 탐하며 임금께 진상하는 음식에조차 귀한 재료는 따지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잡채는 묵나물과 산나물, 들나물조차 따지거나 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물

동북아에서 나물을 가장 사랑하는 한국인

한국인은 유독 나물을 좋아한다. ‘한국일보’ 출신의 고(故) 홍승면 씨는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1920 ~ 30년대 북간도 일대는 그 당시의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였다. 중국인과 조선인, 일본인은 물론이고 러시아인, 그 외 중국의 변방국가 사람들까지 뒤섞여 살았다. 봄이 오면 유독 조선 사람들만이 바구니를 들고 산을 다녔다고 한다. 한반도가 척박한 땅이라 먹을 것이 부족해서 나물을 먹었다는 가설도 있다. 그러나 북간도는 쌀조차 귀한 추운 땅이다. 유독 조선인만 가난했을 리가 없다.

17세기 무렵은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는 소빙하기였다. 조선은 17세기 4차례의 기근을 겪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병자호란이 덮친 가운데 농사의 소출은 계속 줄어들어, 국가로서는 위기를 겪는다. 조선뿐만이 아니었다.

시기와 원인은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 대륙과 국가는 국가체계가 흔들리는 기근을 겪는다. 일본은 텐메이 대기근이 가장 끔찍했다.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나오고 국가체계가 흔들린다.

지금 먹는 잡채는 전통 잡채가 아니다?

봄에 채취한 나물은 그대로도 먹고 남으면 말려서 저장을 했다. 묵나물이다.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동안 나물은 발효, 숙성 과정을 거친다. 풋내는 사라지고 나물 고유의 풍미가 깊어진다. 이 묵나물은 이듬해 봄이 오기 전인 정월대보름까지 먹는다. 잡채는 묵나물이든, 방금 뜯어온 나물이든 가리지 않는다. 잡채는 이렇게 한국인이 음식을 어떻게 대했는지, 음식에 있어서 어떤 철학을 추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음식이다. 잡채에 밥을 더하면 비빔밥이다.

당면

잡채는 일제강점기 무렵 왜곡된다. 당면이다. 녹말가루로 만든 국수다. 중국에서 온 것은 대부분 ‘호胡’나 ‘당唐’을 붙였다. ‘호’는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쓰는 편이고 ‘당’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해 왔다. 1910년 대 중국에서 건너왔다. 1912년에 일본인이 당면공장을 세웠고 1919년에는 한국인이 사리원에 당면공장을 세웠다. 이 당면공장들은 해방 무렵까지 당면을 꾸준히 생산했다. 당면이 공식적인 조리법에 등장한 것은 1924년 발간된 <조선 쌍무 신식 요리 제법>이다.

여기에 일본에서 대량생산방식의 공장제 간장이 더해진다. 공장제 간장은 맛은 균일화 했지만 장이 가진 본질은 없다. 지금도 이름과 모양만 바꾼 채로 우리 식탁에 범람하고 있다. 해방까지 불과 20년 남짓 세월 동안 당면과 대량생산 공장제간장은 한식에 스며들어 잡채를 왜곡했다.

이렇게 1920년 대 무렵에 변형된 잡채를 우린 지금껏 전통잡채로 오해해 왔다. 이제는 좋은 산나물을 구하는 일이 어렵다. 산나물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인건비가 비싸니 산나물 값이 비싸다. 사람들도 찾질 않으니 좋은 잡채가 사라졌다. 이쯤 되면 이충의 잡채를 탐했던 광해군이 오히려 좋은 음식을 먹은 것일까?

출처_서울식품안전뉴스
글,사진_음식평론가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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