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사연 품은 1970년생 ‘유진상가’

시민기자 김종성

Visit1,276 Date2016.02.23 14:09

놀라운 비밀을 품은 유진상가 1층 기둥들

B동(왼쪽 건물)이 A동(오른쪽 건물, 유진맨숀)보다 낮다

서대문구를 품은 아담한 하천, 홍제천이 아래로 흐르는 홍은동 네거리를 지나다보면 언제나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종로의 세운상가(1967년 완공)나 낙원상가(1968년 완공)처럼 오래된 건물 유진상가다. 1970년에 2개동 5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엔 드물었던 주상 복합 아파트로 한 눈에 봐도 육중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건물 B동이 A동보다 낮은 것은 1994년 개통된 내부순환로가 상부를 지나게 돼 B동의 4층과 5층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B동은 사무실 공간으로 리모델링돼 서대문구 신지식산업센터 등의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다. A동은 1층 전체와 2층 일부가 상가와 마트로 쓰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주거용이다. 바로 앞 건너편에 인왕시장이 있다.

유진상가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곳은 북쪽으로 향한 B동 건물 1층에 세워져 있는 기둥들이다. 기둥 사이 사이에 널찍한 크기의 공간이 비어 있다. 나머지는 주거용으로 ‘유진맨숀’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맨션은 아파트의 원조 격으로 아파트가 드문 시절에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고급 공동주택의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유진맨숀은 학창시절 짝사랑했던 동네 교회 누나가 살던 ㅇㅇ맨숀이 떠오르게 했다. 일요일마다 교회 친구들과 누나의 집에 놀러가곤 했던 추억을 떠올리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유진상가로 들어섰다. 그건 아마 짝사랑 누나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유진’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 지어진 맨션이라 그런지 그 구조나 모양이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의 맨션과 유사했다. 집집마다 취향껏 다르게 꾸며 놓은 대문이며, 큰 복도에 자리한 화분과 정다운 항아리들…

유진맨숀 A동은 상가와 주거지이다

유진맨숀 복도에 늘어선 화분들

당시 일반주택보다 3배가량 비싼 고급 공동주택답게 집의 평수가 33평~68평으로 큰 편이다. 1980년대만 해도 청와대, 정부청사, 법원, 검찰청 등이 가까워 고위 공무원과 법조인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두 개 동 사이 2층에 마치 공중정원처럼 넓은 옥외공간이 있는 것도 특징이다. 관리실, 놀이터, 자전거 거치대, 체육시설, 간이 정원 등이 있어 입주민들의 마당이자 교류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1994년 내부순환로가 건물의 상부를 지나가게 되면서 B동 아파트의 절반이 뜯겨나가는 등 오래되고 쇠락한 건물이다 보니 재개발 민원이 제기됐다. 이에 서울시는 2012년 유진상가를 헐어 홍제천을 복원한 뒤 천변을 따라 업무, 상업, 문화시설을 짓고 그에 더해 최고 48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를 신축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부동산 건설경기가 침체되면서 재개발 사업은 지지부진하고 있다.

작고 낡았지만 포근하게 느껴지는 경비실에서 일하는 아저씨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45년이 넘게 이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아저씨에게서 유진상가의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건물은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시절 군사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란다. 정확히 북쪽을 향해 세워진 두 동의 건물은 유사시 적군의 진입을 차단하는 방어벽 혹은 바리케이드란다. 한국 근대건축의 한 시대를 풍미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와 주상복합 아파트였던 낙원상가와는 전혀 다른 태생의 건물인 거다.

유진상가에 숨겨진 사연과 비밀을 알려준 동네 토박이 경비 아저씨

유진상가에 숨겨진 사연과 비밀을 알려준 동네 토박이 경비 아저씨

특이하게 보였던 1층의 기둥들은 유사시를 위한 탱크 진지용이었다. 북한군의 곡사화포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기둥 사이의 폭과 높이를 탱크 한 대가 쏙 들어갈 만한 규모로 설계한 것이다. 마치 비행기의 격납고처럼. 또한 이 기둥들은 몇 개만 폭파해도 건물 전체가 길게 옆으로 쓰러지게 되어 있어, 적 전차의 진로를 방해하게 되어 있다니 참 치밀하기도 하다. 두 개 동 건물 사이의 옥외공간 또한 이중의 두터운 차단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시 서울 시내의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많은 콘크리트와 철근을 넣어 튼튼하게 지은 덕택에, 1990년대 말 안전진단을 받은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받았다고 한다.

유진상가가 들어선 홍은동 사거리 일대는 만약 북한군이 구파발, 녹번동을 통과해 남하할 경우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에 속하는 중요한 자리라고 한다. 이곳이 뚫리면 무악재 너머로 바로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 한복판에 다다를 수 있어서다. 이에 북한군 전차에 대응할 수 있도록 튼튼한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

전시도 아니었던 1970년에 이런 건물이 지어진 건, 1968년 1월 김신조를 포함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 사건(1·21 사태)와 그해 말 울진과 삼척 지역에 북한 무장공작원들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해서였다. 1969년 ‘서울 요새화’가 선포되고 그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유진상가와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뚫은 남산 1, 2호 터널, 청와대 방어를 위해 만든 북악스카이웨이 등이다. 이 무렵에 생겨난 한강다리도 폭격 피해를 입을 경우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복구할 수 있는 형태를 염두에 두고 설계가 이뤄졌다.

한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70년이나 되어가고 있지만, 통일의 희망은커녕 남북의 대결적 대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최근 개성공단 폐쇄로 인한 남북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 걱정이다. 10대 소년시절 한국전쟁을 맞은 내 아버지는 식구들과 피란을 가다 그만 폭격에 여동생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지금의 내 여동생이 폭격에 죽는다는 생각을 해보니 그 충격과 참담함이 어떨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어떤 명분의 전쟁이건 가장 큰 피해자는 무고한 시민들과 어린이들이다. 유진상가가 바리케이드로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간곡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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