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여행을 잘하고 싶다면

김별아(소설가)

Visit571 Date2016.02.19 13:23

노을ⓒ시민작가 남윤창

런던에 사는 나의 에이전트가 말하길,
만약 그것이 정말 ‘뉴욕 영화’라면, 모든 ‘뉴욕 영화’는 근사하고 멋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치 여행기와 같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호로비츠 (Israel Horovitz)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가만한 생각’ 112

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 조금 긴 여행을 다녀왔다. 때마침 한반도는 폭한(暴寒)의 습격을 받아 연일 최저기온을 갱신하는데, 머리 위로 끓는 해를 이고 방울땀을 흘리는 일이 비현실적이기 그지없었다. 예상치 않게 피한(避寒) 여행을 하던 중 점심을 먹고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결국 비어있던 집의 수도가 동파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미리 옆집에 부탁하고 온 덕분에 신속히 계량기를 교체해 피해는 줄였지만 이웃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마음이 편편찮았다. 공항 세탁소에 겨울 외투를 맡겨둔 채 반바지에 맨발로 거리를 걷고, 맹렬한 추위에 얼어터진 수도를 걱정하며 열대과일을 먹었다. 내 몸은 여행지에 있지만 마음은 그곳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정녕 떠나온 것일까, 떠난 시늉만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지만, 나는 그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둔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하지만 떠나는 순간부터 다시금 여행 체질이 아님을 깨닫는다. 여행은 무릇 낯선 것들과의 조우다. 낯선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낯선 거리를 걸으며 낯선 풍물을 보고 낯선 음식을 먹는다. 여행은 우리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는 시간을 잠시 붙들어 잡는다. 여행지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아무리 느긋하게 움직이려 애써도 여행자의 다리는 고단하기만 하다. 하지만 나는 새롭고 특이한 사건보다는 일상의 도저한 힘의 신봉자, 여행이 손해날 일일 리는 없지만 큰 이득을 얻을 것도 없는 일인 것이다.

여행 중에 나는 아무 것도 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Writing is thinking!”의 원칙에 비춰보아도 여행에서 영감을 받지 못하는 자는 여행기를 쓸 수 없다. 예정된 여행지에 대한 사실적 정보 이상의 여행기를 미리 읽거나 돌아와서 다시 읽지도 않는다. 미리 읽으면 스스로 느껴야 할 감상을 방해하고, 돌아와서 읽으면 시나리오 작가 호로비치의 말마따나 근사하고 멋질 수밖에 없는 ‘뉴욕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곳이 여기와 다르고,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확고한 자각이 아니라면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굳이 ‘뉴욕 영화’가 될 필요가 없다. 기실 여행기 중에 흥미롭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이거나 아마도 평생 가볼 일이 없을 곳에 대한, 불가능하고 불가역적인 여행의 기록뿐이다. 근본적으로 모든 여행기는 이방인의 눈으로 지켜본 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여행을 잘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나라와 도시들을 얼마나 오래 떠돌았는가를 자랑삼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삶의 여행길에서 시시때때로 무엇을 느끼는가, 그 길섶에 핀 풀꽃 한 송이를 발견하는 밝은 눈을 가졌는가가 진정으로 여행을 잘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어차피 삶 자체가 거대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길고 멀고 험한 길을 지루하거나 흥미롭거나 고단하거나 부질없이 헤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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