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아이가 세상에 던진 숙제

최경

발행일 2016.02.18. 16:10

수정일 2016.02.18. 17:47

조회 1,016

모래ⓒ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13)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믿어왔던 상식이 이렇게 뒤집힐 수는 없다. 부모의 사랑은 타고나는 것이고 무조건적이라고, 자식을 향한 희생과 헌신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어왔건만, 요즘 터져 나오는 뉴스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름 반바지 차림의 앙상하게 마른 여자아이가 마치 할머니처럼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한 주택가 슈퍼마켓에 들어서서는 여보란 듯이, 장바구니에 과자를 가득 담아 그대로 나가려다 주인에게 붙잡혔다. 발각된 뒤에도 아이는 먹을 것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계단 하나 오르는 것도 힘겨워할 만큼 오래 굶은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 아이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는 슈퍼주인은 오히려 따뜻한 음료와 빵을 건네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고 했다. 그러자 차츰 입을 열기 시작한 아이는 자신이 고아원에서 탈출했노라고 반복해서 이야기를 했다. 남루한 행색이며 깡마른 몸이 심상치 않았던 슈퍼주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조사 결과, 아이가 슈퍼 인근의 집에서 친부와 동거녀, 그리고 동거녀의 친구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감금을 당해오다 스스로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말,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던 11살 여아 감금학대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1살이었지만, 실제 키와 몸무게는 4,5세 수준이었고,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갈비뼈 골절을 비롯해 온 몸이 멍투성이였다. 아이가 고아원에서 탈출했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자신을 다시 지옥 같은 집으로 돌려보낼까봐 두려워서였다. 1년여 전에도 탈출을 시도했다가 지나는 행인이 집으로 데려다주는 바람에 그 뒤에 친부와 동거녀, 그녀의 친구로부터 감시와 폭행, 그리고 굶기는 일이 더 심해졌던 것이다.

아이는 무려 3년이 넘게 학교를 다니지 않는 장기결석생이었지만, 학교도, 교육청도, 지자체도 이 사라진 11살 초등학생이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당해왔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유기적인 연계가 전혀 돼 있지 않았고, 그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결국 아이는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스스로 탈출했다.

이 11살 여자아이의 탈출을 계기로 아동학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시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지 여실히 드러났고, 서둘러 장기결석 초등학생에 대한 전수조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불과 두 달 사이 그동안 봉인돼 있던 진실의 문 안에서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져 왔는지 목도하고 있다.

겨우 7살인 아들을 지속적으로 폭행하다 사망하자, 시신을 훼손해 일부는 유기하고 머리 등 사체일부를 무려 3년 동안이나 냉동고에 보관해 오던 친부모가 장기결석생 전수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는가 하면, 중학교에 갓 입학한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 사망하게 한 뒤, 집에다 시신을 방치해온 인면수심의 목사 아빠도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작은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엄마를 조사하다가 큰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추궁한 끝에 이미 6년 전, 큰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야산에 암매장한 끔찍한 사실이 드러났다. 놀라운 것은 이 학대, 사망, 암매장 과정에 엄마의 친구 등 지인들이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모두 아이를 둔 엄마들이다.

모성과 부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능마저 잃어버릴 만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잔혹함이 판치는 곳이 된 걸까? 그래서 그 공격성을 가장 약자인 아이들에게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대체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학대 속에서 누군가 구출해주기를 기다리다 끝내 숨을 거뒀을지, 지금도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닫힌 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왜 우리는 이 여린 생명들이 죽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야 하는지, 미리 구출해줄 시스템을 왜 만들지 못하는지 반성하고 바꿔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산다.

그것이 지난 12월 아무도 구출해주지 않아 스스로 탈출한 11살 여자아이가 세상을 향해, 어른들을 향해 던진 숙제다.

#아동학대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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