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개발과 함께한 터줏대감 복덕방

이장희

Visit169 Date2016.03.25 11:30

금성부동산

서울의 오래된 것들 (15) 금성부동산

한강에는 조선시대까지 물의 수량에 따라 면적이 변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백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홍수 때 이 넓은 백사장은 사라졌지만, 두 개의 섬만은 침수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오늘날의 밤섬과 여의섬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두 섬에는 사람이 정착했다고 전해오지만, 밤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는 반면 여의섬의 역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 여의섬이 본격적으로 세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간이비행장으로 쓰이던 작은 공항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여객기까지 뜨고 내리며 명색이 서울의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한다. 해방 후에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로 항공부대가 창설된 의미 있는 장소였으며, 김포국제공항과 서울공항으로 기능이 이전되면서 비행기와의 인연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개발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시작에 시범아파트가 있다.

여의도 개발은 ‘불도저’라 불렸던 김현옥 서울시장에 의해 1968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홍수에 대비하여 기초부터 다지기 위해 제방을 쌓았는데 이렇게 하천 한가운데 있는 섬 둘레에제방을 두르는 것을 윤중제라 한다. 지금까지도 섬 둘레를 순환하는 도로를 윤중로라 부르고 있다. 문제는 여의도의 개발로 섬이 커지니 장마철 홍수에 대비하여 한강의 흐름에 지장이 없도록 또 다른 섬인 밤섬을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폭파시킨 밤섬의 잡석은 여의도에 채워졌다.

금성부동산

섬의 초석을 다지고 제일 처음 들어선 건물은 다름 아닌 아파트였다. 근사한 여의도 개발 마스터플랜까지 만들었지만 선뜻 땅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이름도 맨션아파트니 고급아파트와 같은 것들을 제치고 ‘시범아파트’로 결정되었다. 앞으로 서울에 세워질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의 시범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 포부는 정확히 들어맞아 오늘날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아파트가 가장 일반적인 주거 형태가 되어버린 듯하다.

시범아파트는 이름에 걸맞게 국내 아파트 역사의 신기록들을 세웠다. 국내 최초의 중앙공급식 난방과 최초의 공동구, 엘리베이터가 달린 최초의 고층 아파트 등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이 최초이자 최대였다.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입주민들 또한 고학력자에, 전문직 종사자가 많았다. 입주자 어머니들의 70% 이상이 대학 졸업자였다는 사실은 그 시절을 감안하고 보면 놀랍기만 하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동장이 탄생한 곳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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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파트시대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부동산이 시범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다. 여의도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 가운데 하나라는 ‘금성부동산’이다. 시범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인 1970년부터 천막을 치고 영업을 시작하다가 완공 후에는 아파트 상가에 입주하여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해왔다.

김윤성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아파트를 접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초창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방 유지를 부모로 둔 어느 신혼부부는 집을 구하러 왔다가 아파트가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신혼집을 아파트 40평에서 시작할 능력은 역시 부모님의 재력이었는지라 시골 사는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찾아왔는데 거기서 뜻을 접어야만 했다. 시아버지 말씀인즉 뒷간과 사돈집은 멀어야 좋은 것인데 화장실이 안방과 너무 가깝다며 산통을 깬 것이다.

국내 최초의 대단지였던 만큼 그 익명성은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은폐나 은둔의 목적으로 집을 구하러 오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집을 소개해준 사람이 간첩으로 지목되어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나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사업가들에게 ‘여의도 거주’라는 모양새는 사업에도 도움을 주었기에 자영업자들도 꽤 많이 찾아왔다고 회상한다. 이런저런 선점의 효과로 최초분양가는 가장 큰 40평형이 571만2,000원이었는데, 그해 말에만1,000만 원을 가볍게 넘어서며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이후에도 한동안 여의도 아파트의 가격은 전국 최고치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이어졌다. 이런 ‘집값 상승은 곧 성공적인 사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울시내에 고층 아파트의 붐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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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부동산을 ‘복덕방’이라 불렀다. ‘복덕방 영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세 있으신 어르신들의 차지였다. 집을 소개시켜주고 받은 중개료도 담뱃값이나 술값 정도에 만족했다. 심심풀이로 그저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부동산이나 공인중개업 이라는 말로 바뀌면서 젊은 사람들에 의해 기업적인 측면과 세련된 기술이 합쳐졌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과 집을 연결해준다는 본연의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소개해준 집에서 신혼을 시작하고 집을 장만하고,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김윤성 사장 에게는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그를 믿고 열쇠를 맡길 수 있는 단골과의 교류 속에서 보낸 여의도에서의 45년여의 삶을 그는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많다며, 세상이 아주 각박해지지만은 않았다며 자부심을 갖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이야기가 끝나고 천천히 주변 여의도를 걸었다. 한강은 그리 멀지않았다. 공원에 내려서니 너른 하늘이 반갑기만 하다. 멀리 밤섬도 보였다. 개발에서 제외되어 폭파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퇴적작용으로 폭파 당시보다 더 커진 섬. 유일하게 시멘트를 덮어쓰지 않은 원초적인 모습은 이 시대의 초고층 빌딩숲 사이에서 이질적으로만 보일 따름이었다.

출처_서울사랑vol.154(2015_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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