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아들'이 알바했던 설렁탕집

이장희

발행일 2016.02.23. 06:01

수정일 2016.02.23. 14:53

조회 1,145

이문설렁탕

서울의 오래된 것들 (13) 이문설렁탕

오늘날 전통 음식으로 손꼽히는 설렁탕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 정확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고 여러 설만 전해 오는데 역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선농제에 얽힌 이야기다. 예로부터 농사를 중요시하던 이 땅에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선농제라는 풍습이 있었으니 왕이 직접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매년 봄이 시작되기 전 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에서 왕이 제사를 올리고 손수 농사를 짓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 행사가 끝나고 이어진 축제에서 제물로 사용된 소를 사용해 국을 끓여 모두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것이 설렁탕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도축 금지령까지 내려가며 농사를 위해 소를 중시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농사의 상징인 소를 잡아먹었다는 것이 정서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이견도 있다. 그래서 거론되는 설이 몽골의 ‘공탕’이라는 요리다.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였기에 곰탕과 설렁탕이 모두 여기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들의 발음 또한 ‘슈루’라고 하니 어감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작이 어찌 되었든 드물게 서울 음식으로 꼽히는 설렁탕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런 설렁탕을 100년도 넘게 팔아오는 식당이 서울 한복판 종로에 있으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까.

선농제에서 유래되어 선농탕으로 시작된 명칭은 부르기 쉽게 설농탕으로 바뀌었고 모음조화를 거쳐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 설농탕이었던 말의 한자를 보면 눈 설(雪), 짙을 농(農), 끓일 탕(湯) 자를 사용하였는데, 눈처럼 하얗고 진한 국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소의 머리와 내장, 뼈다귀, 다리 부분 등을 푹 고아 고깃국을 만들어 가난했던 시절 더 많은 서민들에게 기름기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문설렁탕

설렁탕은 지금도 서울의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로 인기가 높지만, 전성기는 역시 힘들게 살았던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조선 음식계의 패왕’이라는 말을 써 가며 설렁탕에 대한 기사를 싣기도 했는데, 실로 수많은 설렁탕집이 서울 곳곳에 새로 문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이문설렁탕’ 집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늘날 짜장면처럼 대표적인 배달 음식이었던 설렁탕은 주변 관공서를 비롯해 사무실에서 시켜먹는 인기 메뉴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수십 명의 배달부가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많은 설렁탕집이 문을 닫았고, 점차 서구의 여러 음식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설렁탕의 인기도 예전 같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대표 음식 중 한 부분을 차지하며 묵직하게 세월을 먹어감에 있어 이문설렁탕집이 갖는 의미도 깊어감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식당이 오래된 만큼 이곳에서 설렁탕을 먹었던 사람들도 많다. 초대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을 비롯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받았던 손기정 옹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장군의 아들’로 잘 알려진 야인시대의 김두한은 10대 시절 이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서구 스포츠를 도입했던 YMCA가 있어 체육관을 드나들던 운동선수들도 많았다. LA올림픽금메달리스트였던 하형주나 1980년대 복싱 전성기를 이끈 문성길 선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문설렁탕

끝으로 설렁탕과 얽힌 이야기들 중에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인력거꾼이었던 김 첨지가 많은 손님을 태워 나르던 운수 좋은 날의 끝, 아파 누운 부인에게 먹이기 위해 사 들고 간 설렁탕. 그렇게 고깃국을 옆에 놓고 부인의 죽음을 확인하는 김 첨지는 아프고 힘들었던 우리 옛 시대상의 무거움을 일깨워준다.

어느새 나는 설렁탕 한 그릇을 국물까지 뚝딱 비워냈다. 종로에는 다시금 살포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다. 세상은 부유해졌고 많은 이들에게 고깃국을 나누기 위해 설렁탕을 끓이던 시대는 저만치 멀어졌다. 이제 운수 좋은 날의 끝도 더 이상 불행은 아닌 시대라며 단정지어본다. 문을 나서는 동안에도 여러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우산을 접는 얼굴에는 운수 좋은 날을 맞은 듯 웃음이 환하다. 변치 않는 맛을 찾아 먼 길을 달려오는 이들의 시간이 하나하나 모여 다음 백 년을 이어가는 식당의 역사가 되리라.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경쾌하게만 느껴졌다.

출처_서울사랑vol.152(2015_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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