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할머니에게 나타난 낯선 조카

최경

발행일 2016.01.28. 16:05

수정일 2016.01.28. 17:29

조회 877

손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10) 존슨 할머니 구하기

1년 가까이 매일 두 세 번씩 병원을 찾아오는 할머니가 있다고 했다. 말끔한 차림으로 로비에 들어서서는 건강검진 문진표에 이름과 주소, 연락처를 적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의문의 할머니가 적어놓는 이름이 특이하게도 ‘존슨 미자’란다. 게다가 주민등록번호는 늘 자리수가 모자라게 써놓는다고 했다. 진료는 한 번도 받지 않고 오로지 문진표만 매일 작성해서 제출하고 간다는 존슨 할머니.

그런데 근처 우체국에도 할머니가 매일 빈 몸으로 와서는 출금신청서에 ‘존슨’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명을 남기고는 정작 출금은 하지 못한 채 돌아가곤 한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마을 상인들 중에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가게나 찾아 들어가, 직원들이 먹다 남겨둔 치킨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가 하면, 피아노 가게에선 우아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능숙하게 연주를 했고, 분식집에 들어가서는 맞은편 자리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아두고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이 할머니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뿐 아니라 물건을 그냥 집어 들고 나가려다 걸린 적이 많다는 것이다. 취재진이 지켜보던 그 날도, 할머니가 마트에서 초콜릿과 사탕 한 봉지씩 들고는 계산도 안한 채 나가려다 직원에게 발각돼 실랑이가 벌어졌다.

“할머니! 계산을 하고 가셔야지요.”

“걱정 말아. 내가 내일 갖다 줄게...”

직원이 안 된다고 강하게 이야기하자, 당연한 듯 외상을 요구하던 할머니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거 당신이나 먹어! 나 안 먹어!”

마을 상인들은 모두 할머니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치매인 것 같다고들 했다. 하지만 차림으로 보나, 말투, 행동거지로 보나, 형편이 나쁘다거나 못배운 것 같진 않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늘 혼자 다니며 돌발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족들이 할머니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취재진이 존슨 할머니가 병원에 매일 찾아와 적는 문진표에 남긴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할머니가 진짜 그 집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흔쾌하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취재진은 집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이름은 진짜 ‘존슨 미자’였다. 외국인인 남편의 성을 딴 이름이라고 했다. 피아노 위에 놓인 가족사진들엔 두 자녀의 모습도 보였다. 가족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둘 다 외국에 살아요. 우리 딸은 아주 유능한 의사야. 아들은 큰 기업에 다니고. 나도 벤츠 타고 다니잖아. ㄷ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내 차 세워져 있어. 거기 내 아파트가 있거든. 80평짜리야.”

남편 존슨과는 6년 전 사별을 했고, 자녀들도 모두 좋은 직업을 갖고 외국에서 살고 있어 한국에선 혼자 산다는 할머니는 자신이 벤츠를 몰고 다니며 80평대 아파트를 소유한 재력가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지금 존슨 할머니가 사는 집은 지방 소도시의 허름한 아파트 월세집, 그마저도 월세가 6개월째 밀려 보증금을 잡아먹고 있는 상태였다. 대체 할머니를 돌보는 가족은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그런데 존슨 할머니는 식탁에 밥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비록 밥은 오래돼 말라붙어 있었지만, 할머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조카가 온다고 했어. 반찬 차려 놓은 거예요. 지금 내가.”

돌이켜보니, 존슨 할머니는 동네 가게를 돌아다닐 때에도 분식집에 앉아 한동안 조카가 올 거라며 기다렸었다. 진짜 조카가 있다면 왜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치매 진단을 받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의문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드디어 며칠 뒤 한 남자가 할머니 집에 나타났다. 남자는 취재진에게 자신이 할머니를 돌보는 조카라고 했다. 우리가 존슨 할머니의 상태를 알리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할머니는 지극히 정상이며, 병원이며 우체국이며 동네 가게들을 순례하는 건 심심풀이로 놀러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 이모는 피아노도 잘 치시고 밥도 잘 드시고, 건강에 이상이 없어요. 내가 조카인데 애들한테 연락할 필요 없어요. 이모는 나만 믿어요. 내가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이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뭔가 이상했다. 취재진이 보기에도 존슨 할머니는 뭔가 진단이 필요해 보이고, 주변 사람들 모두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조카란 남자만 아무 이상이 없다며 취재진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존슨 할머니가 우리에게 얘기해준 대로 ‘ㄷ아파트’로 가서 수소문을 시작했고, 정말로 존슨 할머니가 벤츠를 타고 다니던 재력가 할머니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할머니를 알고 지냈던 옛 동네 지인들은 모두 존슨 할머니가 변을 당했을까봐 걱정스러웠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도 살아있다니 다행이네요. 그 남자가 데리고 가면서 틀림없이 끝이 안 좋을 것 같았거든요.”

“조카라는 그 놈. 조카 아니에요. 할머니가 갑자기 치매가 오니까 갑자기 나타나서는 옆에 딱 붙어서 재산 다 들어먹고 80평 넘는 집도 그 사람이 나서서 팔아먹었잖아요. 그런 다음 할머니 데리고 사라진 거예요.”

우리에게 조카라고 밝힌 김씨는 진짜 조카가 아니라 존슨 할머니가 남편과 사별한 뒤 접근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이다. 그 무렵부터 할머니에게 치매증상이 시작됐는데, 김씨가 그걸 알아챈 듯, 2,3년 사이에 존슨 할머니의 재정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 벤츠 승용차는 물론이고, 손에 끼고 다니던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며, 심지어 시가 수 십억 원에 이르는 집까지 김씨가 나서서 팔아버렸단다.

그 뒤에도 외국에 사는 자식들이 존슨 할머니에게 매달 부쳐주는 생활비를 김씨가 모두 갈취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에 가족들이 없는 상태에서 존슨 할머니는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치매를 앓고 있으니 더 이상 김씨의 손아귀에 뒀다가는 할머니의 신변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온갖 수소문을 통해 외국에 사는 존슨할머니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아들은 짐작대로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까맣고 모르고 있었고 우리가 상황을 설명하자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날 놀리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어머니와 가끔 전화하면 항상 잘 지내신다고 건강하고 매일 운동도 하고 있고, 모든 게 잘 되고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 모든 게 충격입니다. 당장 조치를 취해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존슨 할머니를 가짜조카 김씨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었고, 현재 치매전문 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존슨 할머니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건, 우리 사회가 점점 노년인구가 많아지고 있고, 몇 명 안 되는 자식들이 외국에 나가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잘 계실 거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통화해보니 아무 일 없는 것 같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존슨 할머니 같은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가족도 지역사회도 그리고 국가도 치매노인이 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체계적인 시스템을 촘촘하게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세상엔 약자의 틈을 호시탐탐 노리는 나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오늘 당장, 따로 사는 부모님께 안부를 꼼꼼히 물어야 한다. 진짜 안녕하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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