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의 ‘홀로서기’와 ‘늘어서기’

정석

Visit906 Date2016.01.12 15:50

ⓒ시민작가 문청야

정석 교수의 ‘서울 곁으로’ (7) 건물보다 더 중요한 길, 길을 배려하는 건축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서기>를 익혀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대학 4학년 때 새내기 여학생이 꽃무늬 편지지에 예쁜 손 글씨로 시를 적어 보내준 적이 있었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란 시가 적힌 편지를 한 번에 한 장씩 일곱 번째 받았을 때 처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답장이 화근이었는지 내게 다가오던 그녀는 움찔 물러섰고, 시의 제목처럼 결국 그도 나도 홀로 서서 제 갈 길을 갔지만, 그래도 <홀로서기>란 시와 시인의 이름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그땐 시인이 여성인 줄 알았고, 나중에야 남자인 줄 알게 되었지만.

사랑을 하는 데 홀로서기는 중요하다. 홀로 설 줄 아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해야 그 사랑이 반듯하고 지속가능할 테니까. 아이들이 자라는 데에도, 꽃과 나무가 성장하고 새와 동물들이 스스로 날고 내달리기 위해서도 홀로서기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말이다. 홀로서기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홀로서기 때문에 오히려 엉망이 되고 건강과 활력과 지속가능성까지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도시와 건축의 관계가 그렇다. 도시 안에서 건축의 자세나 태도가 그렇다는 얘기다. 도시에서 건물들이 저마다 홀로 선다면 그 도시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종로를 보자. 광화문 네거리의 교보문고와 오래 전 재개발된 르메이에르, 최근 재개발이 끝난 청진동까지 종로1가 구간은 양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보신각 지나 종로2가 구간은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다. 길을 따라 건물들이 죽 늘어서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도 떼지 않고 붙어있고,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의 1층은 대부분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전시하고 파는 가게들이다.

반면에, 재개발이 시행된 서린동이나 을지로2가는 어떤가? 길을 따라 죽 늘어서있던 낮고 작은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고, 커다란 빌딩들이 길에서 떨어져 띄엄띄엄 홀로 서있다. 재개발은 이렇게 길을 따라 늘어선 작은 건물들을 따로따로 홀로선 큰 건물로 바꾼다.

재개발로 인한 변화는 매우 크고 복합적이다. 건물들의 크기와 모습과 자리가 바뀌게 된다. 새 건물 비싼 건물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 안에 담기는 용도나 업종도 크게 바뀐다. 값싼 음식을 팔던 오래된 식당들과 선술집들 그리고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일하던 사무실과 가게와 업체들의 상당수는 그 자리에 남아있지 못하고 밀려나간다. 대신 비싼 임대료를 부담할 수 있는 은행이나 대기업 사무실이나 프랜차이즈 카페와 고급식당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재개발은 도시환경을 말쑥하게 정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곳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다양성과 활력에 큰 충격과 손상을 준다는 걸 알 수 있다. 도심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의 점심메뉴 선택권도 크게 준다. 직장인들이 식사시간에 어디를 더 선호하는지 따라가 보면 안다. 재개발 빌딩 지하의 푸드코트인지, 아직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골목동네 옛 식당들인지.

재개발로 인해 바뀌는 게 또 하나 있다. 길이다. 예전의 실핏줄 같은 골목길들은 모두 지워지고, 넓은 길과 주차장과 공원이 만들어진다. 좁은 길을 넓히고 주차공간과 휴식공간을 만들었으니 환경이 개선된 것처럼 볼 수 있지만 꼭 그렇지 않다.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보행공간의 면적과 연결성은 재개발로 인해 오히려 나빠진다. 을지로2가 장교마당처럼 덩그러니 만들어놓은 공원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해 별로 쓰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재개발의 가장 큰 문제를 나는 <홀로서기>라고 생각한다. 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길에게 공손하다.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고 품어주며 즐거움을 선물한다. 건물 저층부 상업용도는 거리에 활력을 준다. 길가에 늘어선 카페 안팎에 앉아 차와 술을 즐기는 유럽 도시들의 풍경을 보라. 사람들이 늘 오가는 길, 머물러 앉아 쉬며 도시 삶을 즐기는 거리는 범죄로부터도 안전하다.

<늘어서기>에서 <홀로서기>로 바뀐 도시풍경은 이전과 판이하게 다르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뚝 떨어져 선 건물은 그만큼 멀게 느껴진다. 그 사이를 녹지나 주차장 또는 공개공지로 채우지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은 크지 않다. 어깨를 마주하고 붙어있던 건물들이 뚝 뚝 떨어져 서게 되니 사람들의 활동은 건물 안에 갇히기 십상이다. 고층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지하 식당이나 카페를 오가는 <수직이동>이 많아지고 거리를 오가는 <수평이동>은 줄게 된다.

도시를 유기체나 생명체로 본다면 길은 핏줄과 같다. 핏줄에 피가 돌 듯 거리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갈 때 도시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 도시가 패션쇼나 박람회장이라면 덩치와 피부와 생김새를 뽐내는 건물들이 너도나도 <홀로서기>를 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이 많아야 한다. 길에게 자상한 건물, 길을 길답게 해주는 건물, 길을 섬기는 건물의 <늘어서기>가 필요하다. 서울 길을 걸으면서 판단해보자. 어느 게 좋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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