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와 다른 점
강원국
발행일 2016.01.11. 13:25
강원국의 글쓰기 필살기 (14) 퇴고 고수와 하수의 차이
우리가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와 다른 점은 무엇이고, 같은 점은 무엇일까.
우선, 같은 점이 있다.
그들이나 우리나 초고가 엉망이라는 사실이다.
헤밍웨이가 그랬다.
“모든 초고는 걸레다.”
다른 점도 있다.
헤밍웨이나 톨스토이는 퇴고를 열심히 했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이상 다시 손봤고,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35년간 퇴고했다.
우리 가운데 3번 이상 퇴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퇴고에도 고수와 하수가 있다.
하수는 단어와 문장부터 고치려 들지만, 고수는 전체 구조부터 본다.
하수는 첫줄부터 고치지만, 고수는 중간부터도 보고, 끝에서부터 거꾸로도 본다.
그래서 하수는 <수학의 정석> 1장만 공부하듯 첫 문단만 갖고 논다.
고수는 초고를 단지 고치기 위해 쓴 글쯤으로 여긴다.
그에 반해 하수는 초고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초고에 얽매인다.
고수가 초고 집필과 퇴고에 들이는 시간 비중은 3대7 혹은 4대6이다.
즉 퇴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하수는 이와 정반대다.
고수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지, 설득력이 있는지, 흐름은 매끄러운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한다.
하수는 맞춤법에 매달린다.
하수는 퇴고에 관한 핑계가 많다.
‘초안 쓰느라 진이 빠졌다’, ‘귀찮다’, ‘시간 없다’, ‘고쳐봤자 거기서 거기다’, ‘고칠 게 없다’
고수는 핑계 댈 시간에 고친다.
하수는 쓰면서 고치느라 끝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수는 일단 쓴 후에 고치기 때문에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일은 없다.
고수는 글을 쓴 후 일정 시간 묵혀둔다.
자기가 쓴 글이 낯설어 질 때쯤 다시 본다.
시간이 없으면 문밖이라도 한번 나갔다 온다.
그러나 묵혀두는 시간이 너무 길면 안 된다.
감을 잃지 않는 지점까지라야 한다.
하수는 쓰자마자 본 후, 고칠 게 없다고 한다.
당연하다.
방금 그렇게 썼다면, 그리 쓴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수는 반드시 종이에 출력해서 소리 내 읽어본다.
처음에는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부분을 체크만 하고, 다음에 다시 읽으면서 체크한 부분을 고친다.
하수는 모니터로만 본다.
손, 눈, 입, 귀를 사용하는 고수와 눈만 쓰는 하수는 결과에서 차이가 크다.
고수는 짧게 여러 번 본다.
하수는 길게 한 번 본다.
고수는 장소와 시간을 바꿔가면서 본다.
집에서 안보이던 것이 지하철에서는 보이고, 회사에선 못 봤던 것을 회사 앞 커피숍에서는 발견하기도 한다.
퇴고가 아침에 잘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녁에 잘 되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아침시간에 잘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 고수는 이런 노력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퇴고 시간과 장소를 찾아낸다.
하수는 그런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
고수는 쓴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준다.
하수는 지적이 두려워 혼자 끙끙 댄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이것이다.
고수는 고칠 게 반드시 있다고 확신하고 본다.
하수는 혹시 고칠 게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본다.
세계적인 문호가 되는 길은 두 개 있다.
하나는 한 작품을 수십 년 동안 붙들고 고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천 편의 작품을 쓰는 것이다.
수천 편을 쓰면 어쩌다 하나는 얻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전자를 권하고 싶다.
후자는 요행수를 기대해야하기 때문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60여 년간 썼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60년 간 쓰고 고치고 다듬으면 괴테처럼 못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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