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사무실

이장희

발행일 2016.01.08. 14:53

수정일 2016.01.08. 16:59

조회 1,279

서울의 오래된 것들 (11)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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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더불어 지속된 개발지상주의는 역사 도시라는 서울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옛 건축물의 흔적들을 지워 왔다. 그나마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도 일제 강점기에 외국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데, 자선사업가이자 한국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인 세브란스의 기부로 만들어진 정신여학교의 세브란스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제 이곳을 사용하던 학교는 강을 건너 잠실로 이사를 갔고, 용도가 사무실로 바뀐 이 건물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사무실이 되어 옛 정신여학교의 추억만 조용히 전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과거 1980년대 이전 서울의 도심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학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인구 분산 정책과 부족한 녹지를 해결한다는 정책 하에 학교들은 사대문 밖으로 옮겨져 갔다. 학교가 가고 남겨진 장소는 공공도서관이나 박물관이 들어서 문화 발전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빌딩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문제들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종로5가 부근 연지동에 있는 옛 정신여학교 건물도 마찬가지다. 학교가 떠나고 남은 건물은 사무실이 되었고, 일부 부지에는 육중한 고층빌딩이 위압적으로 들어섰는가 하면 운동장은 주차장이 되었다. 하지만 여느 도심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을 듯한 이곳에도 옛 흔적들은 끈질기게 남아 과거를 말해 주고 있다. 그 속삭임이 반가워 나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풍경들을 담았다.

정신여학교의 시작은 18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의료 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여의사 애니 앨러스(Annie.J.Ellers)에 의해 정동에 첫 여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당시 고아가 된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출발한 정신여학당은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1890년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 인가를 받게 된 이후 당대의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며 근대여성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정신여학교의 굳건한 독립운동의 열의는 그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다.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30여 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나왔고, 1939년에는 국어말살정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장이 해직되고 학교가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다시 문을 열고 오늘날 강남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런 역사의 흔적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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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건물 주변을 둘러보며 학교였을 때의 흔적과 만나며 어떤 편안함을 느꼈다. 본관과 신관 사이에는 학교보다 훨씬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꿋꿋하게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화분에 심어 놓은 커다란 화초 같아 측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긴 역사를 묵묵히 내려 보며 버틴 여러 시대의 증언자로서 애써 말을 참고 있는 듯 든든해 보이는 것은 오래된 나무가 갖는 매력이 아닐까.

아마도 나무의 목격담 가운데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은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일 것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던 역할을 했던 항일여성단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이 학교에서 회합을 다졌는데 한 간부의 배신으로 일경의 대대적인 수색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수색을 피해 조직원들의 신상명세가 담긴 비밀문서와 태극기, 한국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국사 교과서와 공책을 묻어 놓았던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였다는 것. 나는 잠깐 동안 나무를 보며 다가오는 봄의 오후를 느꼈다. 신학기가 시작된 교정 가득 피어났을 봄꽃들은 여전히 화려했고, 학생들의 재잘거림 대신 흐르던 도심 한복판의 자동차 경적 소리는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새잎을 틔울 회화나무를 올려다보며 과거를 이어주는 고마운 연결고리에 이내 반가움이 피어올랐다.

출처_서울사랑 vol.150(2015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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