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방에 갇힌 아이와 ‘은빛 나비’

최경

발행일 2015.12.17. 16:28

수정일 2015.12.29. 13:37

조회 833

꽃ⓒ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4)

그해 초겨울, 철지난 여름 미니스커트 차림의 두 여학생이 멀리서 건널목을 건너오고 있었다. 카메라 앵글에 우연히 들어온 10대 소녀 둘. 그런데 한 중년의 아저씨와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한잔 했는지 중년 아저씨는 불콰해진 얼굴로 아슬아슬하게 짧은 치마를 입은 아이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고, 두 여학생도 이에 질세라 거칠게 받아치고 있는 듯 했다. 정말 우연히 거리를 스케치하고 있었을 뿐인데, 실랑이가 붙은 세 사람은 바로 카메라 코앞까지 와서 서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한 여학생이 제작진을 향해, 경찰서에 증인으로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다. 두 10대 소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제작진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아무 편견 없이 생활을 담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들을 촬영할 수 있었다.

열여섯 살 동갑내기라는 두 아이는 서울 변두리, 예전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소위 벌집방이라고 부르는 단칸 쪽방에서 살고 있었다. 한 아이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켜 징계를 받은 뒤 집을 뛰쳐나왔고, 또 한 아이는 바닷가 시골마을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다가, 대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겨우 열여섯 살 나이에 대책 없이 거리로 나온 두 아이가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당장 하루를 버틸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찌어찌 흘러간 곳이 성매매업소였다. 그곳에서 동갑내기 두 아이가 만났고, 포주가 당초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자, 새벽에 몰래 뛰쳐나와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벌집방을 구했다는 것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맨 다리로 철지난 여름옷을 입고 있었던 것도, 업소에서 맨몸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가출생활을 이어가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을 아이들, 그래서인지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룰 수도 없는 꿈 따윈 잊은 지 오래라고 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냐고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세상 다 산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이 답답했고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왜 이렇게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는 고생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는 뻔한 질문에, 아이들은 ‘돌아가면 혼날 것 같다, 이제 공부해서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자유가 없을 것 같다’는 뻔한 답을 했다. 어느새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 생각 없고, 요즘 말로 ‘노(NO)답’인 아이들... 그런데 한 아이가 꼬물거리며 무언가를 접고 있었다. 담뱃갑 은색속지를 두 장으로 나누어 꼼꼼히 접어서 완성한 것은 바로 ‘은빛 나비’ 였다. 꿈을 잊은 지 오래라 했지만, 실은 아이들 마음속 깊은 곳에 예쁜 나비 하나씩을 간직한 채 애써 외면하며 지내온 것은 아니었을까. 비좁은 벌집단칸방에서 낮잠에 빠진 아이들의 앳된 얼굴에선 고단함이 묻어났다.

다음날, 아이들은 멀리 외출을 했다. 새벽에 뛰쳐나온 포주를 찾아가 기어코 떼인 돈을 받아오겠다며 안주면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얼마 뒤 우리와 다시 만난 아이들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남대문 시장에 가서 겨우살이를 장만하겠다고 했다. 얼마간의 돈을 받아낸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맨 처음 산 것은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였다. 그날 저녁, 단칸방 벽에는 두 켤레의 긴 부츠가 걸렸다. 그것은 내일을 기다리는 소녀의 설렘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작은 것에도 아이들은 즐겁고 설레어했다.

우리와의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언제까지 이 방에서 지낼지, 집에는 언제쯤 돌아갈 것인지, 앞으론 무엇을 하며 살 생각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어른들이 하는 뻔한 잔소리로 받아들일까봐 묻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고이 접어두었던 꿈이 꺾이거나 사라지지 않고, 나비처럼 날개를 펼쳐서 팔랑거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벽에 걸린 긴 부츠 대신 희망으로 가슴이 설렜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 뒤로 나는 늘 자문하곤 한다. 과연 이 꿈을 잊은 거리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세상은 긴 부츠만큼이나 따뜻함과 설렘을 주고 있는지, 노력은 하고 있는지...

#나비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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