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쇠' 장경자 할머니의 전 재산 1억 원

최경

발행일 2015.12.10. 17:09

수정일 2015.12.29. 13:21

조회 1,044

기초보장제ⓒ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3)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의 몸속엔 긴 세월을 버텨낸 비장함이 흐른다. 유독 부침이 많은 시절을 살아낸 이 땅의 할머니들은 한분 한분이 살아있는 근현대사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할머니를 소재로 다루는 건 주로 소외된 노인문제, 예컨대 학대나 복지 사각지대, 고독사 같은 부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사관련 다큐멘터리를 꽤 오래 집필해왔던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할머니는 앞서 말한 그런 비운의 주인공이 아니다.

16년 전, 한 대학교 앞과 캠퍼스 안을 오가며 폐지와 빈병을 주우러 다니던 팔순의 장경자 할머니는 어느 날, 자신이 매일 고물을 수집하러 오가던 그 대학교에 1억 원을 기부했다. 이북출신인 할머니는 19살에 서울로 시집을 왔지만, 이듬해 남편을 여의고 자식도 없이 평생을 홀로 살면서 가장 밑바닥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고물을 모으며 살아왔노라고 했다. 그런 할머니에게 1억 원이라는 돈은 일생동안 그야말로 한푼 두푼 모아온 전 재산이었다.

당시 대학교와 병원 등에 전 재산을 기부하는 할머니들의 미담이 간간이 들려올 때였다. 대부분 삯바느질로, 콩나물장사로, 김밥장사로 혹은 젓갈장사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구두쇠 할머니들이었다. 우리는 이 구두쇠 할머니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게 아껴 모은 전 재산을 어떻게 그렇게 선뜻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건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분명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이 할머니들에게는 뭔가 공통분모가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제작진이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 장경자 할머니였는데, 정작 찾아갔을 때, 손수레를 끌며 고물을 줍는 할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고물상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손에서 빈 깡통과, 신문지들을 놓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할머니의 열손가락은 온통 갈라지고 마디마디 휘어있다고들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김없이 찾아와 고물을 팔던 할머니가 일대에서 사라진 건, 방광암 수술 때문이었다. 수술을 받고 깨어난 할머니에게 제작진은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대체 왜 그토록 어렵게 모은 그 돈을 장학금으로 기부했는지를.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그랬어요. 월사금이 없어서 나는 보통학교도 못 나왔어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둬야 했던 것이 할머니가 평생을 품어온 한이었고, 그래서 훌륭한 인재들이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수십 년을 고물을 팔아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이다. 이 마음은 전 재산을 기부한 다른 구두쇠 할머니들... 김밥할머니, 삯바느질 할머니, 젓갈 할머니들도 똑같았다. 가난했고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으며, 스스로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인색했지만, 배움의 열망이 있는 학생들이 당신들처럼 발목 잡히지 않길 바랐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 부자라도 선뜻 하기 힘든 일, 그것은 분명 구두쇠 할머니들의 반란이었다.

제작진이 찾아낸 장경자 할머니의 집은 단칸방이었다. 방안엔 허름한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고, 작고 낡은 TV 한 대가 놓여있는 단출한 살림이었다. TV조차도 누군가 내다버린 것을 주워온 것이라고 했다. 전 재산 1억원을 기부한 뒤, 한없이 홀가분하고 환한 표정을 지었던 장경자 할머니는 몇 달 뒤,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하지만 할머니가 뿌려놓은 씨앗은 희망이 되어 16년 동안 가난한 대학생들의 힘이 돼주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병상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라면 한 개도 아껴 먹으며 살았어요. 4등분으로 갈라서 한쪽씩 먹었어요. 그렇게 돈을 모은 거예요. 참 지독한 세월이었죠.”

그 지독한 시간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할머니가 기꺼이 뿌려놓고 간 그 희망의 씨앗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전문칼럼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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