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
최순욱
발행일 2015.12.09. 13:33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10) 법과 재판의 엄정함을 상징하는 해치
유스티티아(Justitia)는 로마 신화 속 정의의 여신이다.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서양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눈을 가렸다는 것은 선입견이 없음을, 저울은 공정함과 공평함을, 칼은 권위와 엄정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여신이 눈을 가린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로, 그것도 처음엔 맹목적으로 법이나 소송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풍자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나, 눈을 가렸건 그렇지 않건 간에 법 자체나 판결, 판결을 내리는 사람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동일할 터다. 참고로 우리나라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뜬 채 양 손에 각각 저울과 법전을 들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화권에도 법과 재판의 엄정함을 상징하는 신성한 존재인 해태(海陀), 또는 해치(獬豸)가 전해진다. 사자와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머리에 뿔 하나가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목덜미는 구름 같은 갈기로 덮여 있으며, 몸에는 비늘이, 겨드랑이에는 날개를 닮은 깃털도 있다고 전해진다. 여하튼 해치는 성품이 매우 충직한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뿔로 받아버리거나 옳지 못한 자를 물어버린다고 한다. 원래 법(法)이라는 글자 자체가 ‘해치가 부정한 자를 뿔로 받아버린다’란 말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법과 관련된 것에 해치의 모습을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사헌부는 관리들이 잘못한 것이 없는지 감찰하는 임무를 맡은 곳이었는데, 사헌부의 상징이 바로 해치였으며,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의 관복에도 해치의 모습을 넣었다고 한다.
해치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대 중국 요순시대에 고요(皐陶)라는 동이족의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재판과 형벌을 관장하는 직책을 그야말로 귀신처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런데 고요도 사람이었던지라 가끔씩 재판 과정에서 누가 죄 지은자고 그렇지 않은 자인지 가리가 어려울 때가 있었는데, 바로 이때 고요가 데리고 있던 뿔이 하나인 짐승, 즉 해치가 나섰다고 한다. 이 동물이 본능적으로 죄인을 알아보고 커다란 뿔로 들이받아 버리는 신령한 능력이 있었던 덕분에 모든 송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해치는 최근 마블 코믹스의 만화에도 등장했다. 마크 심(Mark Sim)이라는 동양계 청년이 슈퍼히어로로서 갖는 이름이 바로 해치(Haechi)인데, 이마에 뿔이 돋아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위기가 닥치면 모습이 변하는데, 변신이 완전히 끝나면 우리가 여기저기서 흔히 본, 그야말로 위엄이 넘치는 해치의 형태가 되어 악당들을 물리친다. 2014년 봄 정도부터 등장한 완전 신인 히어로니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다.
수년 간 로스쿨과 사법시험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이 지난주 사법시험 폐지 유예와 함께 최고조로 달아오르고 있는 것 같다. 누구는 금수저와 흙수저 간의 논쟁이라고 하고, 누구는 이미 밥그릇을 가진 기득권자들과 그걸 빼앗으려는 도전자들 간의 싸움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가장 중요한건 해치와 같은 공명정대한 법률가들이 많이 나와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일 터다. 2015년에 해치가 나타나나 논란을 해결해 주는 걸 기대할 수는 없지만 ‘해치가 한 것처럼’ 논란이 잘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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