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안 일제 잔재는 말끔히 사라졌을까?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15.12.08. 10:50

수정일 2015.12.29. 13:16

조회 5,868

광복 50주년 기념 경축식에서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모습(1995년) ⓒ뉴시스

광복 50주년 기념 경축식에서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모습(1995년)

20년 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소식이 국내·외로 퍼져나가자 일본 관광객이 한국에 몰려와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앞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몇 일본인들이 옛 조선총독부 앞에서 잘 나가던 일본제국주의의 향수를 그리며, 총독부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 식민통치를 위해 10년간 연 200만 명의 조선인을 동원하여 1926년에 건립한 조선총독부는 북악산 산세의 대(大), 조선총독부의 일(日), 옛 시청건물의 본(本)을 연결하는 중심에 있었던 건물이었다. 조선의 수도서울의 정궁인 경복궁 자리 한 가운데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은 정문인 광화문을 누르고 대통령 관저 청와대를 가로막은 채 우리 수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 조선총독부 철거와 경복궁 복원의 역사적 의미

오늘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로 탁 트인 광화문과 경복궁, 멀리 북악산(백악산)이 보인다.

오늘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로 탁 트인 광화문과 경복궁, 멀리 북악산(백악산)이 보인다.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3년째이자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중앙청으로 불리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경복궁을 복원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전에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치욕적 역사를 씻어내자는 측에서는 완전 철거를 지지했지만, 일각에서는 증거로 보존해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 삼자고 주장하는 의견이 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치욕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철거를 강행하였다 .물론 아직도 이 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때의 결단 덕분에 지금의 탁 트인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 전경, 청와대 전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아니한가?

치욕의 역사,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 완전 회복되었을까?

‘궁궐'(宮闕)에서 ‘궐'(闕)에 해당하는 중요한 건물로 경복궁의 동쪽을 지키던 망루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은 일제강점시대를 거치며 슬픈 역사를 맞는다.

지금의 동십자각에서부터 안국동 사거리를 지나 창덕궁 삼거리, 원남동 사거리 그리고 이화사거리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는 길은 일제의 근대화 작업으로 하나의 길로 닦이게 되었다. 그 와중에 ‘서십자각’은 그 흔적조차 없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동십자각’ 역시 경복궁과 연결되어 있던 담장과 푸른 숲길로 이어진 계단이 사라진 채 지금처럼 외로이 떨어지게 되었다.

경복궁 궁궐과 떨어져 있는 외로운 동십자각

경복궁 궁궐과 떨어져 있는 외로운 동십자각

또한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하는 돈의문(敦義門)도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 강북삼성병원입구에 있는 `돈의문 터` 표지판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 강북삼성병원입구에 있는 `돈의문 터` 표지판

다행히 강북삼성병원 입구에 가면 서대문(돈의문 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보면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태조 때인 1413년에 잠시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한 후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철거된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터

옛 국세청 별관 철거후 탁 트인 성공회 성당 건물과 그 앞에 조성중인 시민문화공원

옛 국세청 별관 철거후 탁 트인 성공회 성당 건물과 그 앞에 조성중인 시민문화공원

덕수궁의 한 축이었던 국세청 남대문 별관 터는 1937년 일제가 덕수궁의 정기를 끊기 위해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생모(귀빈 엄씨)의 사당 덕안궁(德安宮)을 허물고 지은 곳이었다.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으로 사용됐다.

서울시는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4월부터 현 서울시의회 건물의 남측에 위치한 국세청 별관 철거를 진행했다. 덕분에 그동안 국세청 별관에 가려져 있던 서울시의회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다.

서울시는 현 서울시의회 건물의 남측에 위치한 옛 국세청 별관 터를 헐고 새로운 시민광장을 조성하고 있다. 지상부에는 광장을 만들고 지하부에는 덕수궁 지하보도와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과 연결되는 시민 문화공간을 조성중이다. 또, 시는 이 자리에 시민광장 조성과 함께 휴식시설을 만들고 서대문형무소, 남산 등과 연계해 인권 투어 코스로 꾸밀 예정이다. 

서울시가 남산 북쪽 기슭에 동상을 거꾸로 세운 까닭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동상에 사용됐던 판석으로 만든 `거꾸로 세운 동상`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동상에 사용됐던 판석으로 만든 `거꾸로 세운 동상`

서울시는 올해 8월 22일 경술국치일을 기억하기 위해 조선 침탈에 앞장섰던 일본 외교관이자 주한 일본 공사을 지냈던 하야시공사의 동상 주위에서 파괴된 동상 판석 3점을 모아 남산 통감관저터에 거꾸로 세웠다. 하야시는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광복 이후 관저는 철거되고 동상도 파괴됐었는데 지난 2006년 동상에 붙어 있던 표석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서울시는 이 표석을 9년간 보관하고 있다가 이 표석을 다시 세우기로 했다. 허물 수도 있었지만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거꾸로 세우기로 한 것이다. (☞관련기사: 거꾸로 선 역사, 하나씩 바로 잡습니다)

한편, 일본과 독일은 2차 대전 때 파괴된 건축 문화재의 경우 대부분을 원상복구 했지만 우리는 일제가 식민지 시절 악랄하게 파괴하거나 훼손한 건축 문화재를 대부분 그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문화재 보존사업이나 제 모습 찾기 운동이 지속되고는 있으나 예산문제, 반면교사를 위한 현상보존론 등으로 추진되지 못하는 것들도 아직 많이 있다.

서울이 국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물질적 선진화에 걸맞는 문화적, 정신적 선진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고유의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서울시민 모두가 서울 곳곳에 남겨진 장소의 뿌리와 그 의미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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